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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정원, 자연과 사람이 함께 쓴 대지 위의 시
폭신한 흙,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아무리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무성한 푸른 잎, 마음속 분노를 잠재우는 물소리….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늘 자연을 꿈꾼다. 정원은 이렇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내민다. 점점 멀어져만 가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기꺼이 다리를 놓아준다. 오늘 당신은 순천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초대받았다. ‘지구의 정원’ 순천만을 보호하는 곳, 자연과 인간이 손잡고 함께 노래하는 곳.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자연이 아낌없이 주는 치유와 회복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 조경가이자 건축가인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가 디자인한 순천호수정원. 순천시의 풍경과 순천만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호수는 도심을, 여섯 개의 언덕은 순천 도심을 둘러싼 산을, 호수를 가로지르는 나무 덱deck은 동천東川을 상징한다.


하나은행 시드뱅크가든
씨앗은 식물이 지구에게 주는 선물
‘지구가 멸망해도 식물만 다시 자란다면 지구는 복원될 수 있다.’ 시드뱅크seed bank는 이런 생각으로 만들었다. 일종의 지구 최후의 날을 대비해 씨앗을 모아두는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 북극의 만년빙1300m 아래 만든 노르웨이의 시드뱅크부터 2020년까지 세계 식물 20%의 씨앗을 모을 계획인 영국 큐가든의 밀레니엄 시드뱅크까지,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현재 약 1천4백여 개의 시드뱅크가 운영되고 있다.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공식 후원사인 하나은행이 참여정원 구역에 조성한 정원은 시드뱅크를 주제로 만들었다.

‘은행(bank)’의 주요 기능이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매우 적절한 주제 선정이 아닐 수 없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에서 조경학 박사 과정을 마친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씨가 참여한 이 정원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시드뱅크와 자갈정원 그리고 재활용이다. 보통 시드뱅크는 영하 25℃로 유지해야 하지만 화물 컨테이너로 만든 이곳의 시드뱅크는 전시용이라 상온에서 운영하며 씨앗도 발아 시점을 넘긴 것들이다. 하지만 늘 먹는 채소와 과일의 씨앗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한 공간이다. 하나은행 시드뱅크가든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자갈정원이다. 두꺼운 거름층 위에 물이 침투할 수 있는 부직포를 깔고 식물을 심은 후 자갈을 덮어 만드는데, 극심한 가뭄이 아니라면 자연 상태의 강수량만으로도 식물의 생존이 가능하다.

디자이너 오경아 씨는 가뭄에 강한 한국 야생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식물들을 적절히 섞어 이 정원에 심었다. 털수염풀, 아기범부채, 애기말발도리, 수크령 등 화려하지 않지만 자갈 사이에 꿋꿋하게 몸을 세우고 있는 작고 소박한 식물들이 묘한 위안을 준다. 폐기름통과 낡은 신발 속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풀, 폐목으로 만든 그늘집 등을 보고 있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곱씹게 된다. 물이 잘 투과되는 개비언gabion(돌망태) 담장을 자세히 보면 떨어진 낙엽을 모아 거름을 만드는 공간이 숨어 있는데, 썩어가는 나뭇잎이 신비로운 자연의 ‘순환’을 일깨워준다.


하나은행 시드뱅크는 화물용 컨테이너 두 개로 만들었다. 한 개는 세로로 세워 시드타워(약 6m 높이)로 이용하고, 다른 한 개는 사무실 겸 홍보관으로 사용한다.


1 하나은행 시드뱅크에는 희귀종보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식물의 씨앗이 보관되어 있다.
2 폐목으로 만든 그늘집 주변으로 하얀 나무껍질(bark)이 매력적인 자작나무를 심었다.
3 버려진 기름통을 이용해 정원을 꾸몄다. 
4 금속공예가 이순직 씨가 디자인한 낙엽모으는 통에 모은 낙엽은 식물의 거름으로 다시 사용할 예정이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씨
“이 정원의 콘셉트는 ‘미래를 대비하는 정원’입니다. 시드뱅크는 전 인류적 차원의 프로젝트입니다. 생태계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을 때 지구를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지요. 하나은행 시드뱅크가든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야생화, 곡물, 채소 등 2백여 종의 식물 씨앗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 저는 인간이 버린 것들을 식물이 감싸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디자인할 때 새로운 재료나 물건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폐 기름통이나 폐목 등 폐품을 재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정원 안에 ‘순환’이 있어야 의미있는 정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겨울을 포함해 사계절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식물을 선택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스트로브잣나무와 자작나무, 만년청이 만들어내는 푸른색ㆍ 하얀색ㆍ붉은색의 하모니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갯지렁이 다니는 길
드러나지 않는 것, 버려지는 것에서 찾은 가치
지면 아래에서 치열한 생명 활동이 펼쳐지는 곳, 바로 갯벌이다. ‘갯지렁이 다니는 길’은 순천만의 갯벌을 모티프로 만든 정원이다. 이 정원은 2011년 영국 첼시플라워쇼에서 아티즌 가든 부문 최고상과 금메달을 동시에 수상하고, 다음 해에도 전체 최고상(회장상)과 금메달을 한꺼번에 거머쥔 황지해 작가의 작품이다. 선큰가든(지상보다 낮게 조성한 공원) 형식으로 만든 이 정원은 조감도를 보면 갯지렁이가 움직이며 갯벌 위에 만들어낸 길이나 거대한 나뭇잎을 떠올리게 한다.

첼시플라워쇼에서 찬사를 받은 ‘해우소 :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이나 ‘고요한 시간 : DMZ 금지된 정원’처럼 이 작품에도 한국적 정서와 작가의 예술적 감성이 듬뿍 배어 있다. 구석진 곳이나 돌 틈에 고집스레 자리한 쑥, 질경이, 오이풀, 민들레, 뱀딸기, 더덕 같은 정겨운 한국 식물들은 “김치를 먹고 사는 저에게 한국적 느낌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작가의 말을 공감하게 만든다. 풀들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는 겸손한 초지가든과 서서히 갈변하는 잔디밭과 색의 조화를 이룰 상록수들도 갯지렁이 다니는 길이 자연이 선사하는 최고의 쉼터라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준다. 이 정원의 가장 큰 매력은 아기자기하게 만든 재미있는 공간과 눈에 잘 안 보이는 곳까지 섬세하게 신경 쓴 장식 디테일이다. 손바닥만 한 빛의 조각에 매료되는 쥐구멍 카페, 숨고 싶고 쉬고 싶은 개미굴 휴게 공간 등 정원 곳곳의 재미있는 공간은 사람들의 발길을 저절로 멈춰 서게 한다.

바위에 그린 그림, 나뭇가지에 달아놓은 피더feeder(먹이통), 고철로 장식한 바닥 등 이 정원은 끊임없이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작가는 “비철, 잡철, 타일 조각 등 ‘가난한’ 재료를 부활시키는 정크 아트는 일일이 사람 손으로 작업해야 한다. 하지만 의미 전달 능력, 장식성, 조형성, 심미적 가치 모두를 충족해주는 훌륭한 소재”라고 말한다. 작가가 ‘다시 살려낸’하찮은 소재들은 그의 정원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1 가든 디자이너 황지해 씨가 나무와 돌을 이용해 만든 쉼터.
2 ‘덤불숲파고라’라는 이름의 쉼터. 토끼와 다람쥐 등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들이 사는 곳을 표현했다.
3 정남향으로 지어 태양이 길게 머무는 ‘쥐구멍 카페’.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카페 앞에 심은 때죽나무의 그림자가 멋진 그림을 만들어낸다.


4 갯지렁이 모양을 본떠 만든 갤러리와 도서관.
5 타일은 외부에 노출 되었을 때 오래가고 색감이 좋아 황지해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가난한’ 재료 중 하나다.
6 마치 잎맥처럼 정원 전체를 관통하는 물줄기 주변은 돌망태를 이용해 둑을 쌓았다.



가든 디자이너 겸 환경 미술가 황지해 씨

“갯벌이 지닌 가치,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생태계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제약이 많았습니다. 지반이 약해 큰 나무를 심을 수 없었고, 지형적으로도 푹 꺼져 있는 형태였죠. 예산도 한계가 있었고, 찰스 젱크스의 작품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전체 동선을 지루하지 않게 구성하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였습니다. 땅이 가진 본래 특성을 기초로 쥐구멍 카페, 갯지렁이를 형상화한 도서관과 갤러리, 덤불숲 파고라 같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견하는 재미가 있고 진정한 ‘쉼’을 깨달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해당 기사는 6월 둘째 주에 최종 업데이트 됩니다.

글 전은정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