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나영, 이혜영, 이혜상 등 스타들이 앞다투어 찾는 ‘스타’ 메이크업 아티스트 고원혜 씨. 1989년 잡지 모델 메이크업을 시작으로 영역을 점점 넓혀간 그는 현재 뷰티 살롱 ‘고원’을 운영하며 매체 화보, 광고, 영화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다이닝룸에서 바라본 주방. 5년째 가지를 쳐가며 정성껏 키우는 아이비와 원목 상판을 얹어 원재료의 맛을 살린 시멘트 아일랜드,1950년대 독일에서 사용하던 라탄 스툴 등 고원혜 씨가 열광하는 자연 소재가 가득하다.
지난가을 가로수길에서 촬영하다 노천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카페 앞마당에 있는 허브를 바라보며 햇살처럼 웃던 모습.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집을 레노베이션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디자이너의 제보에 따르면, 집이 아주 곱단다. 그저 ‘피부가 참 좋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넘치지도, 덜하지도 않은 메이크업 같은 느낌이랄까. 특별히 꾸미지 않는 것 같은 편안함이야말로 난도 높은 화장법일진대, 그의 공간은 메이크업에 비유하자면 최고 난도란다. 어떤 집일까 곰곰이 상상해보려는데, 허브 향을 맡으며 활짝 웃던 그 미소가 오버랩된다. 첫인상은 다소 차가워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여린 감성을 지닌 천생 여자 고원혜 씨. 배우 이나영, 고현정, 이혜영, 공효진, 이혜상 씨 등 스타들이 앞다투어 찾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지만 의외로 혼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중요시한다는 그의 공간이 궁금했다.
햇살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듯한 거실 풍경. 집을 레노베이션하면서 디자이너에게 첫 번째로 요청한 게 바로 조명등을 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거실에는 천장 조명등 대신 간접 조명등만 설치. 벽등은 1930년대 바우하우스 디자인 제품으로 칼 짜이스가 디자인했다. TV장은 원목으로 제작.
1 곰돌이가 입은 앙증맞은 스웨터는 어머니가 손수 뜨개질해 만든 것.
2, 4, 5 특별히 좋아하는 소품은 시계.
3 오전 7시, 다이닝룸 책상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즐기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6 디자이너 김보영 씨가 고원혜 원장을 위해 제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휴지 걸이. 파우더룸 창틀, 벽장 문도 고재로 마감했다.
7 여행길에서 하나둘씩 구입한 접시. 모아놓고 보니 파란색이 대부분인데, 와인 상차림에는 잘 어울린다.
8, 9 그릇장과 서랍장 위, 집무실 책상 위에 살포시 깔린 레이스는 일본 여행길에 구입한 것.
공간, 색조보다는 베이스가 중요하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알기 위한 것으로 언행과 취미 생활, 그리고 그를 둘러싼 공간을 꼽는다면 직접 꾸민 집의 인테리어야말로 가장 결정적 단서가 되곤 한다. 비교적 평범한 동네, 평범한 아파트라는 생각도 잠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깊고 고요한 전실을 지나 거실 너머 하얀 섬광이 비친다. 시원한 전망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거실은 햇살이 쏟아지듯 들어와 공기를 타고 부드럽게 퍼지는 느낌. “가장 좋은 인테리어는 빛이라고 생각해요. 아침 7시,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다이닝룸에 앉아 맞은편 벽에 드리우는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모닝커피를 마시죠. 사실 별것 아닌데, 그 순간이 감동스럽기까지 해요.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긍정적 기운이 되니까요.”
거실과 침실, 다이닝룸, 드레스룸 등 공간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 복잡 한 구조 변경도, 흔한 아트월도, 화려한 조명 박스도 생략했다. 꼭 필요한 매트리스 받침대, TV장, 신발장, 파우더룸의 작은 화장대를 짜 넣었을 뿐 이사하면서 특별히 새로 장만한 가구도 없다. 대신 원목 마루, 타일, 벽 도장 등 마감재 선택에 심혈을 기울였다. 까슬까슬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오크 원목 바닥재는 맨발로 두런두런 걷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질석을 빻아 넣어 마치 돌을 만지듯 내추럴한 질감이 느껴지는 벽면은 모서리마다 둥글리는 공정을 더해 어디 하나 날 선 곳이 없다. 메이크업에 비유하자면 색조보다 베이스 메이크업에 힘준 결과랄까.
“유행이라고 하면 특정 넘버 립스틱이 동날 정도로 동일한 제품을 구입해 바르는 경우가 많은데, 내게 어울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잖아요. 인테리어 역시 트렌드를 무작정 좇기보다 바탕을 잘 만들고, 그다음에 자신에게 맞는 색조를 천천히 찾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는 메이크업을 할 때 주로 자신만의 색상을 만들어 쓰는 편이다. 기존 아이섀도를 크림 타입으로 만들어 깊이 있는 색조로 표현하고, 서로 다른 립스틱을 혼합해 색다른 색깔을 빚어낸다. 그런 원칙은 라이프스타일에도 적용된다. TV를 벽에 거는 대신 티크 원목으로 장을 짜 단정하게 넣어두고, 작품도 바닥으로 내려 벽에 턱 기대둔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벽면이 최대한 간결하고 평온하길 바란 것. 머리가, 생각이 쉴 수 있는 인테리어가 진정한 인테리어의 역할이라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집 ‘쉼’의 코드는 거실에서 침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드르륵 미닫이문을 여는 순간 생각지 못한 반전이 펼쳐진다. 햇살이 부서지는 거실과 정반대로 침실은 무척 어둡다. 벽면 한쪽에 달린 잉고마우러 날개등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침실 전체를 밝히기엔 역부족. 고운 모래를 넣어 시멘트 색깔을 재현한 카키색 도장과 어우러져 엄숙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침실 옆 작은 파우더룸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창의 크기를 줄이니 한결 아늑하고, 액자 틀을 통해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색다르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집을 인테리어할 때는 그 사람이 집에서 어떤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는지 호기심을 가져야 해요.
이 집은 동쪽에 창이 있기 때문에 아침 햇살이 참 아름다워요. 그래서 화장실을 파우더룸으로, 부엌 옆 작은 방을 다이닝룸으로 바꿨죠. 아예 창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의자도 입구에서 등이 보이게 배치했죠.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만큼 냉난방도 중요해 이중창을 설치하고, 전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위쪽은 고정 창, 아래쪽은 이중 새시를 골랐어요.” 고원혜 씨의 든든한 조력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보영 씨의 말이다. “김보영 실장과는 살롱 레노베이션도 같이 진행했죠. 다이닝룸의 녹색 펜던트 등은 포토그래퍼 조남룡 씨가 수입한 톨릭스 빈티지 제품이고요. 집에 시계랑 조명등이 많죠? 대부분 빈티지 컬렉터 사보 씨한테 구한 거예요. 아, 소파 맞은편 벽면에 세워둔 사진은 포토그래퍼 보리의 작품이죠.”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은 이처럼 역사와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인연들은 왠지 공간을 아주 친밀하고 인간적으로 만들어준다. 처음에는 그저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던 그 역시 이제는 사람들을 하나 둘 초대한다. 간접 조명등뿐이라 저녁에는 유명 와인바처럼 제법 분위기가 난다고.
사실 집 취재를 의뢰했을 때 특별한 취향과 콘셉트가 없다고 한사코 고사했지만, 집 안 전체를 아우르는 이런 편안한 분위기야말로 그의 일관된 취향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나무 물성이 주는 편안함,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빈티지의 편안함, 5년 여를 키워 이제 샹들리에 조명등처럼 보이는 아이비 허브가 주는 편안함 말이다.
모래를 넣어 오톨도톨한 질감을 살린 카키색 벽이 차분한 느낌을 주는 침실. 마치 묵상의 방처럼 종교적 느낌이 풍긴다. 집의 모든 문은 미닫이문을 사용해 드르륵하고 열리는 소리가 좋다.
1 평소 사용하는 그릇을 딱 필요한 만큼만 꺼내 단정하게 수납했다. 그릇장은 세덱 제품.
2 주방 옆 작은 방을 개조한 다이닝룸은 거실과 연결감을 주기 위해 문을 없앴다. 다이닝룸이지만 식탁이 서재도 되는 멀티 공간이다. 청록색 타일이 인상적.
3 현관 전실. 세덱에서 수입하는 원목으로 문틀을 짜고 고방 유리로 마감해 마치 그릇장처럼 보이는 신발장은 이 집을 찾는 누구나 탐내는 아이템이다.
4 세면대 위, 창틀에 원목 패널을 더해 정갈하게 완성한 파우더룸. 인테리어 디자인과 시공은 여름 디자인(02-543-3415)에서 맡아 진행했다.
10년 후에도 여전히 7년 전 도산공원 앞에 자리 잡은 뷰티 살롱 고원高媛은 고원혜 원장을 쏙 빼닮은 공간이다. 돌, 나무 등 원재료 고유의 맛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디자이너가 특별히 제작한 1층 로비의 시멘트 카운터, 샴푸실의 나무 발받침, 비례미가 돋보이는 합판 테이블 등 볼거리투성이다. 뷰티 살롱은 일상의 번잡스러움을 잊을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고원혜 원장의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그의 개인 집무실은 작은 공간이지만 북유럽 빈티지 가구와 가리모쿠 소파, 회화 작품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무척 평온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가 메이크업을 배운 것은 28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뒤였다. 지금처럼 사설 교육 기관이 없던 때라 화장품 회사에서 운영하는 메이크업 학원을 다녔는데, 처음에 친구 어머니 몇 분을 메이크업해주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메이크업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했고, 이후 미국 조 블라스코 메이크업 스쿨로 유학을 가서 메이크업 특수 분장까지 배웠다. “후배들에게 메이크업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정답을 가르쳐주진 않아요. 스스로 현장에서 찾아내게 하죠. 메이크업 경력이 어느정도 쌓이면 다른 부분에 관한 눈썰미도 자연적으로 생겨나는데, 이처럼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자연의 순수한 색을 접하는 연습을 많이 해서 감각을 키워야 하죠.”
그는 2년 전 메이크업 브러시 세트도 론칭했다. 20여 년 간 브러시를 써본 노하우를 바탕으로 붓의 각도, 대와 모의 비례까지 체크하고 연구해 만든 것. 곧 미국 백화점에서도 판매할 예정이다. 또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의 메이크업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다. 10년 전에 작업한 메이크업 화보를 봐도 어색하거나 촌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건 라이프스타일을 넘나드는 그의 남다른 열정과 노력 덕분일 터. 그러고 보니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보영 씨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인테리어의 기본은 휴머니즘이에요. 집은 6~7년이 지나도 편안해야 하죠. 또 이왕이면 10년 후에도 잘 고쳤다는 얘기를 듣고 싶고요.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이 없으니 오히려 10년 후에 봐도 격이 떨어져 보이지 않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죠?”
고원혜 씨의 집을 방문한 날, 마치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며 봄 소풍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햇살을 받으면 하얀 파라다이스가 되는 공간, 햇살을 받지 않아도 환하게 빛나는 공간.
1 뷰티 살롱 고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ㄱ자형 카운터. 거푸집에 시멘트를 부어 만든 것으로 투박하지 않은 디자인이 매력적이다.
2 일상의 번잡스러움을 잊을 수 있는 뷰티 살롱을 만들고 싶다는 고원혜 원장. 3층 그의 집무실은 몇 사람만 들어가도 꽉 찰 정도의 아주 작은 공간으로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좋다.
3 도산공원 앞, 건물과 건물 사이 밀도가 높은 곳에 자리해 채광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1층 한쪽 벽면의 인공 불빛이 은은한 분위기를 완성해준다.
4 1층 입구 정면. 신부들의 동선을 고려해 공간을 배치한 세심함도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