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살림살이가 급변했다. 대량생산되는 제품 위주로 생활이 구성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미풍양속은 서양 문물에 견주어 ‘궁핍함’으로 여겨졌다. 누가 볼세라 숨기고 버리느라 바빴던 것이 현실.
한지, 옻칠, 나전칠기, 단청 등 전통 공예품은 이제 역사 전시관이나 관광 상품으로 존재할 뿐 당장 우리 생활 공간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기억 속에 희미해진 전통 공예의 맥을 잇고 생활에 쓰임새 있는 물건으로 가다듬어 경쟁력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공예트렌드페어’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면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지역성’을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디자인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재료의 ‘오리진origin’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전통 공예는 저마다의 성격에 적합한 지역 공예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왔기에 결국 ‘지역 공예’가 살아나야만 우리 전통 공예가 발전하고 현대화, 세계화로 이어지는 것. 한지를 비롯한 한국 스타일 마감재를 개발하고, 우리나라에서 나는 지역 특산물을 재료로 현대화한 디자인을 풀어내는 것이 바로 공예트렌드페어를 주관하는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하 KCDF)의 궁극적인 역할이다.
공예트렌드페어를 앞두고 지난 2012년 8월부터 10월까지 석달간 진흥원 내 트렌드페어사무국에서는 40여 개의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각 지역의 특화된 공예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컨설팅했는데, 그 결과로 총 열세 개의 지자체가 이번 페어에 참여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제로 한지와 소목 공예품을 출품한 전주시(전주문화재단), 물레 시연을 통해 도자 제작 방법의 우수성을 소개한 이천시, 원주 옻의 우수성을 토대로 상품 개발을 추진해온 원주시, 죽 세공품 개발에 주력해온 담양군, 12공방의 진수를 보여주는 통영시, 서울 종로구의 북촌 등이다. 또 지역적 가치를 지닌 해외 사례를 모아 기획전을 마련. 자연재해로 뽑힌 고목만으로 작업하는 에른스트 감펄 Ernst Gamperl의 최신 목공예 작품, 핀란드의 이름난 공예 마을 피스카스Fiskars의 공예품, 양질의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일본 후쿠오카 벳푸 Beppu의 대나무 공예품은 신선한 미감을 전했다. 통영, 전주, 이천, 담양 등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모던 디자인으로 풀어낸 전통 공예품을 만나보자.
1백여 가지 나전 작품을 선보인 통영 12공방 전시 부스. 옻칠을 하고 나전을 붙인 뒤 장석을 다는 과정으로 마무리하는 통영 나전 공예는 장식성과 섬세함을 자랑한다.
‘법고창신’을 주제로 한지와 가구를 선보인 전주시의 부스 외관. 왼쪽 공간 디자이너 강신재, 최희영 씨가 디자인한 전주시의 전시 부스. 공간에 들어서면 발길은 여유로워지고 생각이 차분해진다.
1, 4 태풍을 맞아 쓰러진 나무만 재료로 활용하는 에른스트 감펄, 동남아시아에서 식재하는 등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필리핀 디자이너 케네스 코본푸의 기획전도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2 먹감나무의 은은한 문양과 절제된 디자인으로 세련된 미감을 선사한 천년전주명품 온Onn의 목가구.
3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 기능 보유자 이형만 씨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원주의 옻칠 공예와 생활 식기.
5 벳푸의 죽공예 그룹 Baica가 새로 개발한 대나무로 만든 일상용품을 모았다.
6 담양관에서 선보인 대나무 차탁.
7 이천관은 식문화 트렌드와 맞추어 다양한 생활 자기를 선보였다.
8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문양을 자랑하는 통영의 나전 공예. 통영 지자체에서 발행한 통영 문화 맵도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9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담양 죽 세공품.
통영 12공방 예부터 예술적 DNA를 키워온 통영의 12공방(칠기, 소반, 갓, 부채 등)은 이미 2009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조화’를 콘셉트로 모던 퍼니처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당시, 공간 디자이너 김욱선 씨가 아트 디렉팅을, 크로스포인트 손혜원 대표가 BI를 맡아 전통으로만 여기던 나전 공예에 쓰임을 담고 모던한 감성을 불어 넣었다. 2010 리빙디자인페어에서는 공간 디자이너 마영범 씨가 디렉팅을 맡아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알루미늄을 레이저로 커팅한 뒤 그 위에 자개를 입힌 다용도 함, 뚜껑을 열면 디지털 슬라이드 쇼가 펼쳐지는 경대 등 현대적 기능을 더한 전통 공예품으로 장인과 젊은 디자이너의 협업의 장을 연 것. 이 명맥은 공예트렌드페어에 그대로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통영의 목가구는 디테일이 확연히 다르다. 귀가 딱 맞아떨어지고 문양은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다. 가장 큰 자랑거리는 목재를 얇게 켜 겹으로 붙이고 다시 단면이 드러나도록 잘라 만든 가장자리 장식이다. 작은 차호부터 다구함,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되는 수납장까지 과거에 기인하지만 현대적인 것, 디지털 시대와 잘 어울리는 전통이다.
전주, 천년전주명품 온Onn 2008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를 통해 론칭한 이래 매해 많은 관심을 받아온 전주 전통 공예품 통합 브랜드 천년전주명품 온Onn. 공간 디자이너 김백선 씨가 디자인을 맡아 목재로 골조를 만들고, 부드러운 한지 마감으로 완성한 부스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장인의 사방탁자, 향 꽂이, 조명등, 서랍장 등의 작품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담담하면서도 품격 있는 이미지를 완성해냈다. 전주 한옥에서 모티프를 따온 부스 디자인, 옛 선조들의 문화와 정신을 담은 명품 서재 가구, 짜맞춤을 모티프로 한 텍스처 디자인 등 매해 전시마다 진화를 거듭하며 관람객에게 감동을 선사해왔다. 한지발장, 선자장, 소목장 등 장인과 협업해 생활 가구와 마감재를 선보였는데 그중 단순 명료한 형태의 먹감나무 좌탁과 사방탁자는 온이 추구하는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가구의 대표 격으로, 이번 공예트렌드페어에 메인 아이템으로 소개됐다. 특히 상품 가치가 높지만 점점 명맥이 희미해지고 있는 전주 한지를 마감재로 구현한 시도가 돋보였다. 먹감나무의 문양처럼 은은하게 먹이 물든 한지로 외피를 만든 부스는 ‘작품’이었다.
강화, 완초 공예 여름에는 시원하면서 수분을 잘 흡수하고, 겨울에는 냉기를 방지해주며 오래 사용해도 잘 부스러지지 않는 천연 소재 완초 (왕골). 강화가 완초 공예로 유명한 것은 왕골이 품질이 우수하기 때문. 땅이 습하면서 날씨는 맑고 따뜻해야 잘 자라는 왕골의 특성과 강화도의 기후가 잘 맞아서 강화도 왕골은 다른 지방 것보다 길이가 더 길고 빛깔도 더 하얗다. 단, 손으로 엮는 완초 공예품은 도제식 수업을 통해 다년간 기능을 연마해야만 만들 수 있으므로, 명맥을 이을 전수자 확보가 시급하다. 강화군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화문석 문화관을 설립하고 염색 방법, 왕골의 길이와 굵기 개발 등 새로운 화문석 디자인 개발에 힘쓰고 있으며 다양한 생활 소품을 제안한다.
원주, 옻칠 공예 옻은 청동기시대부터 사용해온 천연 도료로 온도와 습도에 따라 변질되지 않으며, 살균력이 강하고 오래된 것일수록 은은한 고유색을 띤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칠 기능 보유자인 김봉룡 선생이 경상남도 충무시(현 통영시)를 떠나 품질 좋은 옻을 좇아 원주시 태장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원주의 옻칠 공예가 본격적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 기능 보유자 이형만 씨를 중심으로 옻칠 공예가 이어지고 있다. 옻칠은 보통 제기나 교자상, 함 등 귀한 물건에 주로 사용해왔으나 인체에 무해한 특성을 살려 최근에는 생활 식기류를 개발하는 등 대중화를 꾀하고 있다. 치악산 자락에 옻나무 재배 단지를 조성해 옻 채취량을 늘리고, 원주옻문화센터를 열어 칠장인의 입주 스튜디오로 활용하는 등 원주산 옻칠을 장려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천, 생활 도자 이천은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을 재배하는 비옥한 토질로 유명한데 도자기를 빚어내는 흙과 물이 바로 이 진상미를 길러내는 비옥한 토양과 수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래식 기법으로 도자를 굽는 오름가마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페어에서는 자연과 어울리는 생활 자기와 차구를 선보였다. 선이 곱고 아름다운 이천 도자의 전통 도예 작품은 물론 식문화 트렌드에 맞는 생활 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담양, 대나무 공예 전시장을 돌면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즐거움을 발견한 관람객이 꽤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보던 온갖 종류의 소쿠리가 가득했으니, 바로 담양군의 대나무 공예품이다. 소쿠리를 비롯해 대나무 바구니, 부채, 베개, 대나무 가지를 휘어 만든 전등까지…. 특히 대나무 껍질을 얇게 저민 다음 색색의 고운 빛깔로 물들여 천을 짜듯 몇 가닥씩 엇갈려 만든 채상은 정교한 무늬 하나하나에 장인의 혼과 땀이 배어 있어 그 가치를 단순히 돈으로 환산하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무분별한 산업화로 머지않아 천연, 자생 원료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담양의 죽공예처럼 그 지역만의 재료와 품질로 특화된 지역 공예품을 온 국민이 일상 생활용품으로 적극 찾아줘야 합니다. 기계로 찍어내는 것보다 가격 경쟁력은 없지만, 중간 이익을 없애는 방식으로 가격을 낮추는 노력이 필요하죠.” 2012 공예트렌드페어 이상철 예술 감독의 메시지처럼 공예인이 전통문화를 이어갈 좋은 공예품을 만들 수 있도록, 또 정성껏 만든 공예품을 소비자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취재 협조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02-398-7900)
- 2012 공예트렌드페어 지역 공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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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1일부터 24일까지 코엑스 전시장에서 진행한 2012 공예트렌드페어는 역량 있는 공예가들이 한 해 동안 만든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재발견, 공예와 지역성(Rediscorery! Craft and Locality)’. 통영과 전주를 포함한 열세 개 지자체가 참여했으며, 해외 공예 마을 기획전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협업이 펼쳐져 한국 공예의 무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