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 덴마크를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에 알려지기 시작한 북유럽 가구는 실용적이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디자인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가구 디자이너와 캐비닛 메이커라 불린 가구 전문 제작자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처럼 철저한 전문성과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가구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가구 디자이너들이 보는 북유럽 빈티지 가구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모벨랩의 리디자인 프로젝트를 위해 뭉친 디자이너 김선태, 이삼웅, 황형신 씨는 모벨랩의 방대한 컬렉션을 경험한 뒤 ‘생활이 곧 디자인’이라는 북유럽 가구의 가치에 공감했다고 입을 모은다. 학창 시절 이론으로만 접하던 북유럽 가구의 지극히 인체 공학적 구조를 경험하고 분석하며 기능과 쓰임이라는 가구 본연의 가치를 다시금 깨달았다는 것. 또한 그들은 목재 가구에 다양한 소재를 매치하며 작가 고유의 개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리디자인’이란 한마디로 예전에 있던 모델을 한층 업그레이드한 버전으로 선보이는 것으로 단순히 카피와는 다른 개념이다. 디자인은 반복의 연장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는 결과물이 나오는 법이니, 꼬박 1년간 진행한 세 작가의 작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당연하다. 전통 소재와 오리지널 북유럽 디자인의 가치를 재발견한 업사이클링 가구는 성북동 모벨랩 쇼룸에서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9월 9일(일)까지. 문의 02-3676-1000
이삼웅 스칸디나비아와 자개, ‘미스 매치’의 즐거움
자개라는 지극히 한국적 소재를 이용해 이토록 컨템퍼러리한 가구를 만들 수 있다니! 디자이너 이삼웅 씨의 ‘옥토버스’ 시리즈를 볼 때마다 자개 유닛을 활용한 유기적인 형태와 부드러우면서도 파워풀한 미감에 감탄하곤 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씨와의 협업, 디자인 바젤/ 마이애미 출품 작가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이지만, 지난 1년간 진행한 모벨랩 프로젝트는 고민과 방황(!)의 연속이었단다.
디자이너 이삼웅 씨의 트레이드마크인 유기적 형태와 직선 위주의 북유럽 가구가 조화를 이루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터. “모벨랩에 전시된 북유럽 가구는 하나같이 선이 간결하고 자체로 아름다웠죠.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면서 자개를 하나 둘 붙여봤더니 어울리기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거예요. 조화에 의미를 두기에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기에 이질적인 것들이 만났을 때의 의외성, 재미에 중점을 두고 디자인했어요.”
그는 처음에는 파손된 부분을 자개로 메우거나 서랍 안쪽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자개를 입혔다. 껍데기는 북유럽 가구 그대로지만 서랍을 열면 풍성한 자개가 넘쳐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의 책상을 완성한 후 조명등, 트레이 등 작은 소품을 공략했다. “나이트 스탠드의 경우 사이드 테이블에 비해 조명의 비중이 큽니다. 사이드 테이블 역시 자개 서랍으로 이뤄진 상판과 두꺼운 다리가 어딘지 언밸런스하죠. 흔히 말하는 황금 비율 대신 이질적인 것들의 ‘미스 매치’로 의외의 즐거움을 주고자 했어요.”
책상, 사이드 테이블, 의자 등 작업을 진행할수록 표현법은 더욱 진화해 최근에는 크기나 높이가 다른 동그란 자개 유닛을 활용해 입체적인 느낌까지 부여했다. 이처럼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스스로 성장해가는 것을 기꺼이 즐기며 희열을 느낀다는 이삼웅 씨. 코리안 빈티지의 대명사 ‘자개’와 북유럽 빈티지 가구의 조우는 이미 성공을 예고하고 있다.
가구 디자인부터 인테리어, 건축 분야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싶다는 이삼웅 씨. 전통과 현대 공간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모색한 그는 개성 넘치는 자개 가구를 완성했다.
김선태 가공하지 않은 소재의 담담한 매력
북유럽 빈티지 가구에 한지와 왕골을 접목해 한국적 정서가 깃든 작품을 선보인 가구 디자이너 김선태 씨. 그가 만든 의자와 테이블은 언뜻 보면 평범한 디자인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공예적 디테일이 돋보인다. 나무의 여린 속살처럼 말갛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한지 배접, 천연 염색한 왕골 커버링 등이 그것.
“가구를 지을 때 더 이상 특별한 디자인이나 재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어떤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는지 아이디어가 매우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 자체로 완벽한 비례미를 갖고 있는 북유럽 가구를 보는 순간, 구조를 바꾸기보다 지금 우리만의 색깔을 입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김선태 씨가 선택한 빈티지 의자는 베니어합판을 겹겹이 붙여 밴딩 처리한 제품으로, 부분 부분 표면이 벗겨진 상태였다. 일반적으로는 한 겹을 벗겨낸 후 다른 무늬목을 입히거나 칠을 했겠지만, 가장 ‘나’다운 것이 무얼까 고민한 그는 ‘한지’에 주목했다. 몇 년 전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출품작으로 전주 한지를 이용한 작업물을 선보인 터라 한지는 제법 익숙한 소재였다. 파이프 형태의 다리를 비롯한 기본 프레임은 그대로 두고 좌판과 등받이에 얇은 한지를 스무 겹 정도(5mm) 배접한 뒤 오일 피니싱으로 마감한 의자는 은은한 색감과 부드러운 촉감이 일품. 한지를 벽지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가구에 활용하고 전통 왕골 공예의 쓰임새를 높인 것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오래 봐도 질리지 않게, 느낌은 있지만 그것이 최대한 도드라지지 않도록 한 디자이너의 담백한 미감을 촉감으로 생생하게 느껴보시라.
북유럽 빈티지 가구 중 가장 흔한 디자인의 의자와 커피 테이블에 한지를 배접하고, 벼 줄기를 엮어 함이나 자리를 만드는 왕골 공예를 접목한 가구 디자이너 김선태 씨. 세월을 품은 북유럽 빈티지 가구와 전통 공예의 고고한 멋이 조화를 이룬다.
황형신 색다른 조합이 빚어낸 유쾌한 하모니
북유럽 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쌓을 수 있는 의자, 스태킹stacking 체어의 일반 형태와는 모양새가 다르다. 등받이와 좌판을 분리해 제각기 다른 의자의 ‘주재료’로 활용한 데다 기존의 북유럽 가구와 색감이 비슷한 체리목을 사용해 어떤 부분이 스태킹 체어이고 어떤 부분이 새로 덧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등받이가 좌판이 되고 좌판이 등받이가 된 의자, 바로 가구 디자이너 황형신 씨가 만든 시리즈Series1이다.
처음 북유럽 빈티지 가구를 접했을 때 사람이 세월에 따라 늙어가는 과정을 보듯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는 황형신 씨. 본래의 기능이 소진된 가구를 되살리는 과정에서도 말 그대로 ‘Re-’ 가 될 수 있도록 원형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췄다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해체 작업을 했다. “음식도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기존 가구 자체가 좋다면 굳이 프로젝트라는 명분 아래 양념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어요. 아예 부러졌거나 휘었다면 수정이 자유로웠겠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었기에 더욱 고민이 되었죠. 의자의 각 부분을 의자의 구성품이 아닌, 의자를 만들기 위해 잘 다듬어놓은 재료라 생각하니 의외로 고민이 쉽게 풀리더라고요.” 스태킹 체어를 분리해 각 부분을 등받이, 좌판, 다리 등으로 역할을 바꿔 활용하고 기존 의자와 색감이 비슷한 체리목을 직각 판재로 재단해 덧붙여 완성. 그렇다면 과연 등받이가 좌판이 되었을 때 착석감이 편할까. 1번부터 7번 의자까지 완성한 그는 자신 있게 “앉아보라”고 답한다. “저도 한때는 팝한 디자인, 실험적인 작업에 열광하며 멋진 스케치를 완성하려 부단히 노력했죠. 하지만 요즘은 스케치하는 시간보다 행동하는 시간이 더 길어요. 만들고 써보고 불편하면 수정하고, 또 가구가 완성되면 어떤 공간에 둘지도 고민해보고요.”
최근 모벨랩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구는 생활이다”라는 말에 공감했다는 가구 디자이너 황형신 씨. 등받이가 좌판이 되고, 흔들의자의 바퀴가 되는 등 색다른 조합으로 감각적인 디자인을 완성한 의자 7점을 선보인다.
취재 협조 모벨랩(02-3676-1000, www.mobellab.com)
- 모벨랩 RE-DESIGN PROJECT 展 북유럽 빈티지 가구의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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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북유럽 가구 컬렉션 숍 모벨랩이 현대 가구 디자이너 3인과 함께 1년 동안 ‘리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담백한 디자인의 목가구를 선보이는 김선태, 자개 가구로 명성을 떨치는 이삼웅, 재료와 기능에 대한 역발상으로 신선한 감각을 선보이는 황형신 씨가 그 첫 번째 주인공. 북유럽 빈티지 가구를 각자의 철학과 개성대로 리디자인한 진중한 창작물을 만나보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