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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부럽지 않은 사진 한 장 걸기 요즘 왜 사진이 뜨는가?
왜 요즘 사진 작품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일까? 과연 사진은 예술품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사진 컬렉션으로 어떻게 집안을 멋지게 단장할 수 있을까? 사진에 관심 있다면 누구나 품고 있는 호기심. 사진에 관한 네 명의 전문가가 말하는 사진의 다양한 매력 속에서 그 궁금증을 풀어본다.

공간을 입체적으로 연출하는 평면 예술
로드앤스톡 아트 디렉터 겸 대표 이호준

예전에는 ‘사진을 건다’라는 의미가 기념 사진이나 가족 사진 등 개인적인 기억을 위한, 극히 좁은 부분에 제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현대 미술의 경향이 사진으로 넘어오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진 작품을 공간 꾸밈에 활용하는 추세가 일고 있다. 호텔 객실, 공항 라운지, 레스토랑 그리고 일반 상점에 이르기까지, 그림이 있던 자리에 사진이 자리하고 또 이런 여파는 점점 집안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주거 및 상업 공간이 점점 세련되고 갤러리화 되면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사진으로 장식하는 것을 들 수 있고, 또 사진이 회화에 비해 저렴하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 덕분에 작가의 표현력이 다양해지면서 ‘흑백 사진’에 한정되던 ‘작품’의 세계가 무한대로 넓어지면서 대중에게 사진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으니, 사진이 공간을 장식하는 데 한몫을 하게 된 것이다.
사진은 평면적인 예술이라는 특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실재를 담아내는 풍부한 표현력 덕분에 일상 공간을 한층 입체적이고 생명력 있게 만들어준다.  또한 ‘필름’이라는 ‘원본’이 있는 한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각 프레임 안에 머물던 동일한 이미지가 벽지가 되어 공간 전체를 색다른 분위기로 변신시킬 수 있다. 하늘을 담은 사진은 창문이 없는 공간에 숨통을 트여주고 안개 낀 소나무 숲 사진은 삼림욕을 한 듯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사진은 그 어떤 시각 예술보다 일상 속에서 친숙하게 생활에 활력과 즐거움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현대 사진은 종합 선물 세트다
  황록주(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사진을 예술로 받아들이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진이 갖고 있는 사진적인 매력, 즉 포착된 순간의 진실성에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게 된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독립적인 장르로만 존재하던 사진이 언제부터인가 미술 작품의 기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사진작가들이 ‘결정적 순간’이나 객관적인 사실을 렌즈에 담아 사람들과 교감했다면, 이제 사진가는 사진을 찍기 위해 어떤 상황이나 메시지를 연출하고 조작한다. 대표적인 작가로 신디 셔먼Cindy Sherman을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사진의 대상을 찾아내고 그것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사체가 되기 위해 자신을 분장하고, 이것을 사진에 담아냄으로써 작품을 완성시켰다. 사진이 본래 지니고 있는 ‘포착’은 그대로 남겨두고 그 대상을 조작해내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현상은 오늘날 또 하나의 사진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디지털 사진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촬영 기법상의 조작이나 합성 등으로 한층 다양한 이미지를 표현해내고 있는데, 이는 좋은 사진 작품을 위한 기법 중 하나로 당당히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진은 바로 사진의 고전적 의미와 현대적 기법이 교묘히 중첩된 작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은 특히 독일 현대 사진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토마스 루프Thomas Ruff는 인터넷 포르노사이트의 사진, 원색적인 일본의 만화사진, 천체 망원경으로 찍은 별의 사진, 낡은 건물 사진, 수많은 신문의 보도 사진 등을 재료로, 이들을 과감히 합성하고 조작해낸 사소한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우리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반영해낸다. 국내 사진계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황규태, 구본창, 홍성도와 같은 작가들은 이미 다양한 실험을 통해 사진의 스펙트럼을 넓힌 선구자다.  사진의 재합성을 통해 사진 작품을 마치 입체감과 중량감을 갖고 있는 조각품처럼 표현하는 권오상의 작품은 “정말 사진 맞아?” 하는 감탄사를 끌어내며 사진 내용뿐만 아니라 그 표현 방법에 대한 호기심까지 유발한다. 이제 사진가는 피사체를 창조하고, 또 이를 앵글에 담아 다양한 조작과 기법을 통해 이미지를 자신의 상상으로 재조합한다. 이제 사진 한 장에는 무수한 예술 장르가 함축되어 있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잡히는 것은 단순한 사진 한 장이 아니다. 


사진, 문학과 회화 사이를 달리다  김승현(시지락 편집장·프리랜서 큐레이터)

자고로 멋진 그림 앞에서 들려오는 감탄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에, 저렇게 잘 그릴 수가!” 또 하나는 “세상을 저렇게 다르게 볼 수가!”이다. 전자는 손(솜씨)의 문제이고 후자는 눈(시선)의 문제인데, 카메라라는 기계가 그중 솜씨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니, 사진 앞에서 우리는 두 번째 감탄사밖에 날릴 수 없다. 그렇듯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은 사진예술의 본질, 아니 전부다. 그런데 사진은 오랜 시간 회화와 문학(혹은 언어)의 우산 속에 있었다. 회화가 되려 했을 때 사진은 기계적 재현이 선사한 일상의 구체성을 반납하면서 회화의 값싼 대용품이 되었고, 문학이 되려 했을 땐 이미지 바깥에 감도는 서사에 의존하면서 언어에 종속되었다. 사진의 짧은 역사에서 빛나는 걸작들이란 대개 두 콤플렉스의 진동 속에서 회화나 문학이 담아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것들이다.
바야흐로 사진은 매체의 꽃으로서 봄날을 구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오랜 콤플렉스는 극복된 것인가?  사진 고유의 속성이 실은 굴레가 아니라 더없이 강력한 무기였음을 깨닫고 나자 사진은 비로소 등 뒤로 펼쳐진 자신의 영토를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영토에서 만개한 꽃 몇 송이를 살펴보는 일은 사진이 왜 매력적이고,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잘 알려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찰나의 철학, 이른바 ‘결정적 순간’을 완성했다. 그의 뒤를 이어 나타난 로버트 프랭크의 사적私的 다큐멘터리는  자신을 에워싼 사회와 일상을 가감 없이 노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것은 순도 높은 ‘재현’이 가진 힘을 증명하는 문화적 사건이었다. 당대에 가장 비싸다는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은 ‘프레이밍’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육안이 경험해보지 못한 스펙터클로 바꿔버리고, 우리는 믿던 풍경에 발등을 찍힌다. 명쾌한 도식화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방금 언급한 세 가지 키워드,  즉 ‘찰나성’, ‘재현성’, ‘프레임’은 사진의 본령을 이루는 삼박자다. 사진의 형식적 가치는 그 삼박자가 얼마나 새로운 좌표를 만드느냐에 달려 있으며, 사진가의 세계관은 그 좌표 위에서 구현된다. 결국 사진을 감상한다는 것은 사진가가 삼박자의 좌표 위에다 열어놓은, 감춰져 있던 세계와 대면하는 일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육체적, 시각적  경험이 고스란히 예술로서 의미를 지니는 일이란 다른 장르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사진만의 서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궁금하다면, 오늘도 렌즈 앞에 서는 수많은 풍경, 정물, 사람들에 주목해볼 일이다.


알 것 같아서 친숙해진 풍경 김홍희(사진가)
세상에는 알 것 같아서 친숙해지는 것들이 많다. 1970~ 80년대에는 팝송 한 줄 모르면 인생의 진미를 모르는 낙오자라도 되는 듯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적어 외우고 다녔다. 암울했던 시절 자신의 가슴속을 퍼질러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속내를 남의 노래, 가사로 대신했던 것. 그때 젊은이의 필수품은 통기타였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통기타는 일탈로 가고자 했던  상징이었고 그들은 남의 노래로 자신의 일탈을 암시했다. 서로가 서로를 알 것 같아서 친숙해진 것들이고  그 시대가 그들을 그렇게 몰아넣었다. 그런데 요사이는 통기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할 말 못 할 말 다 해도 잡아가는 이 없고, 인터넷의 발달로 속내를 접어둘 일도 없다.  통기타와 남의 노래 대신 ‘디카’와 ‘폰카’ 그리고 컴퓨터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어디서든 카메라를 디밀어도 견제하는 사람이 없는 ‘카메라 불감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직설적, 폭로적, 급기야 엽기적 사진으로  내면을 보인다.  이것은 세계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듯하지만 실은 영상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없는 한계에서 세계의 표면만 담아내는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  사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착각으로 이어진다. 세계의 표면만 담고도  자신은 세계의 온갖 질서와 혼돈을 알고  표현한 듯한 황홀한 자기 암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글로 된 팝송 가사를 외워 혀를 꼬부려 노래를 부르면 마치 자신이 본래 그 노래를 부른 가수마냥 정확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줄로 착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어느 순간 결코 그 사람이 될 수도 , 그처럼 노래 부를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자기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나서거나 아예 그의 팬이 되어 음반을 사모은다. 둘은 어떤 쪽으로든 자신과 그 가수의 차이에 대해 이해하고 결국은 그만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요즘 사람들이 카메라를 하나씩 갖고 있듯, 이전의 사람들이  붓과   캔버스, 유화물감을 사놓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예전  그들에게 유화가 경외의 대상에 가까웠던 것은 아마 이런 친밀감의 부재에서 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누구나 찍을 수 있고, 좋건 나쁘건 결과물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 있다. 그 익숙함을 통해 우리는 사진과 친밀해지고 이를 통해 각개의 사진에 담긴 가치의 다양성을 알게 된다. 요즘 사진이 인기가 있는 것은 익숙한 것에 대한 친밀함의 표현, 혹은 알 것 같은 것에 대한 과신이 낳은 지적 문화 소유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세상에는 알 것 같아서 벽에 걸리는 것들도 꽤 많다.

 

김선래 이정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