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 31번지의 심심헌(02-763-3393). ‘ㄱ자’ 한옥에 행랑채가 더해져 결과적으로 ‘ㄷ자’형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청마루 ‘열어 들개문’을 올리니 아담한 마당을 감싸는 ㄷ자형 한옥이 펼쳐진다.
한옥은 2000년대에 들어와 거듭났다. 말이 그렇지, 거듭나기가 그리 쉽던가? 피, 땀, 눈물이라는 세 가지 액체를 바가지로 흘려야만 거듭난다. 그러나 일단 거듭나면 한 꺼풀 벗게 마련이다. 구질 구질한 것도 없어지고, 탁 트인 안목도 생기고, 어지간한 까탈을 포용할 수 있는 글로벌한 관용이 생긴다. 한옥도 마찬가지다. 불편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질구질한 집이라는 인식을 확 벗어 던졌다. 이렇게 거듭나기까지는 해방 이후 약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업료로 지불해야만 했다. 서울 가회동의 한옥들은 한국 문화사에서 피, 땀, 눈물을 흘리고 거듭난 한옥이라고 해야 맞다. 오래된 등기부 등본을 보면 가회동은 조선 왕조가 망한 뒤인 1913년부터 1920년 무렵, 집 장수들이 20~40평 규모의 작은 주택들로 분양한 기록이 나온다.
해방 이후로는 고만고만한 집들로 이루어진 한옥 단지로 이어져 오다 IMF 외환 위기를 만났다. 2000년 무렵부터 몇 사람의 ‘한옥 아낌이’들이 구옥舊屋을 사서 고생 끝에 ‘거듭난 한옥’ 짓기에 들어갔다. 이화여자대학교 김홍남 교수(전 국립박물관 관장), 성북동 가구박물관 관장 정미숙 씨 그리고 조주립 씨가 멤버로 구축됐다.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새로운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여자들이 살림을 하다 보니 남자보다 집 내부의 세세한 점에 대해서는 많이 알 수밖에 없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외국에서 상당 기간 공부도 하고 거주도 해본 터라 한국적인 것의 어떤 부분이 아름답고, 어떤 부분을 고치면 글로벌 미학에 도달할 수 있는지 감을 잡은 것 같다. 외국에 나가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두 가지 태도로 나뉜다. 우선 무조건 서양 것이 좋고 한국 것은 열등하며 천하게 보는 태도가 있다. 종서주의從西主義 태도라 하겠다. 또 다른 태도는 ‘내가 내놓을 만한 것은 무엇인가’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유형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오랫동안 묵혀온 자기 것을 보여주는 것이 미학의 완성이다. 주로 자존심 강한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한다. 서양의 좋은 점과 우리의 좋은 점을 융합하는 태도, 즉 동골서육東骨西肉이 가장 바람직하다. 동양의 골격에다가 서양의 살을 접합한다는 말이다. 이 두 번째 유형이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가회동의 ‘한옥 아낌이’가 바로 이 유형이다.
1 심심헌은 서울 북촌한옥마을의 둘러보는 집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대문을 열면 단정하게 자리 잡은 소나무 옆 기운차게 솟아 있는 누마루를 만난다.
2 박물관이 아닌 실제 사는 한옥의 미감을 느낄 수 있는 주방. 메탈 소재의 싱크대, 비비드한 컬러의 가전 제품, 가죽으로 마감한 테이블과 자수 방석 등 현대의 라이프스타일과 전통 한옥이 조화를 이룬다.
3 누마루 한쪽에 고이 놓인 찻상. 담장 너머 기와지붕을 감상할 수 있는 뷰포인트다.
4 창밖의 대나무, 비취색 타일이 싱그러운 느낌을 전한다.
불편한 점을 개선한 모던 한옥
북촌의 한옥 풍광을 대표하는 거리는 가회동 31번지다. 이 31번지가 왜 대표인가? 전봇대가 없기 때문이다. 전깃줄을 지하로 묻어 깔끔하고 탁 트인 골목길 풍경을 선사하는 거리가 바로 31번지다. 전봇대를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조주립 씨다. 2004년 완공한 그의 한옥 심심헌 尋心軒은 그 골목길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31번지에서 가장 볼만한 집인 데다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협력해 외부인이 볼 수 있도록 개방한 집이기도 하다. 북촌을 찾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볼때 박물관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는 제대로 된 한옥을 본다는 것은 상당히 흥분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심심헌은 어떤 점이 볼만한가? 우선 실내가 따뜻하다. 한옥은 기본적으로 여름 집에 해당한다. 여름에 좋다. 시원하고, 실내가 나무로 되어 있어 맨살에 닿는 촉감이 부드럽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집이다. 그러나 겨울에는 춥다. 문이 많고, 문틈 사이가 벌어져 있어 외풍이 많이 들어온다. 더군다나 마룻바닥은 차다. 겨울에 신발 벗고 양말만 신은 채 재래 한옥의 마룻바닥에 서 있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집은 추위 문제를 해결했다. 실내에 들어가니 그리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바닥에 가스보일러의 열선이 들어가서 따뜻하다. 누마루에도 바닥에 열선을 깔고 그 위에다 다시 얇은 철판을 깔았다. 한번 가열되면 엉덩이가 뜨근뜨끈해진다. 그래서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 에도 누마루에 앉아서 놀 수 있다. 문도 삼중으로 되어 있다. 바깥 문에는 유리를 달았고, 안쪽 문에는 한지를 발랐다. 게다가 나무로 된 문이 하나 더 있다. 아파트의 새시 수준은 아니지만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거의 차단한다. 전선, 여름 냉방용 에어컨, 거울, 조명등 같은 걸 눈에 보이지 않게 집어넣었다. 그래서 천장이 깔끔하고 서까래와 대들보만 보이는 것이다.
심심헌처럼 북촌의 거듭난 한옥의 장점은 동선動線이 편하다는 것이다. 마당에서 마루에 올라오면 마루에서부터 방 두 개, 그다음 누마루까지 모두 통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물론 중간 중간에 칸막이 문이 있다. 이 문을 ‘열어 들개문’이라 부른다. 열어서 천장을 향해 들어 올려 고정할 수 있는 문이다. 열어 들개문을 모두 열어 천장에 고정하면 하나의 열린 공간이 된다. 바닥에는 문턱이 없다. 발에 걸리는 문턱이 없으니까 긴장이 줄어든다. 한옥이 20평만 되어도 굉장히 크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칸막이 문을 여닫으면서 공간을 축소하기도 하고 확대할 수 있는 구조가 바로 한옥인 것이다. 한옥은 실내에 수십 명이 모여연주회를 감상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재래 한옥에서 불편하던 점이 화장실과 주방이었다. 심심헌은 아파트처럼 주방과 화장실을 모두 실내에 들였다.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특히 이 집 주인은 ‘화장실’에다 힘을 주었다. 화장실 세 곳이 모두 다른 디자인이다. 화장실 바닥에는 비취색 타일을 깔았는데 이슬람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주립 씨는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같은 남미에서 거의 20년을 살았기 때문에 취향과 감각이 국제적이다. 그 이국적인 취향이 화장실 꾸미는 데 반영된 것이다.
행랑채가 바라보이는 누마루 창가에 입식 소파를 배치했다. 브라운, 퍼플 등 깊은 색감이 한옥의 고졸한 멋과 잘 어우러진다.
한지 바른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그 자체가 아트다. 빛의 농도가 더 진한 문 중간의 네모난 부분을 ‘불 밝기’라 하는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충만해진다.
담장 너머 기와지붕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은 가회동에서만 볼 수 있는 풍광.
어둠 속에선 시간이 더디 흐른다
이 집은 지하실도 있다. 이국적 분위기의 사적인 공간이다. 책도 있고, 소파와 탁자도 있고, 술병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여러 가지 생활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도 있다. 벽에 걸린 여러 가지 장식품과 공예품은 남미풍도 있고, 유럽풍도 섞여 있다. 위층이 조선시대라면 아래층은 현대적 분위기다. 그런데 지하실에 있는 화장실 문이 주목을 끈다. 검은색 철문이다. 위에는 도르래를 설치하여 여닫을 때 이 도르래가 돌아가는 구조인데, 그 검은색 철문의 무게감이 아주 육중하게 전달된다. 이 철문을 닫고 변기에 앉아 있다 보면 완벽하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한옥을 자세히 보면 오행五行 가운데 쇠가 부족하다. 나무와 흙이 주조를 이루다 보니까, 어디 한 군데는 단단한 금속이 있어야 균형을 잡을 것 아닌가. 그 균형을 아래층 검은색 화장실 철문이 잡아주고 있었다.
지하실 있는 한옥은 북촌 가회동 한옥이 효시인데, 가회동에서도 이 심심헌이 지하실 한옥의 원조에 해당한다. 공간이 좁으니까 위로는 올라갈 수 없고,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처음 시도하는 사람은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 지하실의 단점은 세 가지다. 어둡고 환기가 잘되지 않으며 습기가 찬다. 먼저 ‘어둡다’는 점은 지하실을 파면서 어느 정도 수용하기로 했다. 집주인의 철학이 바로 ‘어두워야 시간이 천천히 간다’다. 너무 밝으면 과민해진다. 그래서 그는 간접조명을 선호해 벽면 쪽에 조명등을 설치했다. 습기가 차는 부분은 벽을 이중으로 처리했다. 벽 사이에 50cm가량 공간을 비워뒀다. 이중벽을 치니 습기는 잡을 수 있었다. 그 대신 실내 공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습기 없는 대신에 공간이 줄어드는 손해를 감수한 셈이다. 환기 문제는 어떻게 했는가? 천장 구석에다가 두 대의 환풍기를 설치했다. 필요할 때는 강제 환풍을 한다. 그러고는 위층의 담벼락 밑에다가 작은 창살문을 설치했다. 지표면에서 불어오는 자연 바람이 지하실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살문을 설치하고 통로를 열어놓았다. 중간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는 구조물이나 벽을 일부러 설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지하실 문제는 모두 해결했다.
(왼쪽) 거칠게 마감한 회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작품과 수공예품이 놓인 지하 공간.
1 ‘감옥’을 콘셉트로 한 화장실. 철공소에 특별 주문한 육중한 철문을 열면 마치 중세 서양의 어느 작은 비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2 대청마루 안쪽 안방은 포근한 느낌을 더하기 위해 천장을 막았다. 지붕과 천장 사이 남는 공간은 다락방으로 활용하는 데 접이식 사다리를 감쪽같이 숨겨놓은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3 남미의 이국적인 색감이 돋보이는 화장실. 창밖 다른 집 담장까지 핑크색으로 페인트칠한 집주인의 감각과 열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4 함지박에 수북이 쌓인 감, 기와를 얹은 담벼락이 어우러져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 밝기를 보며 갈라진 마음을 달래다
조주립 씨에게 물었다. “심심헌에 살아보니 한옥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은은함이 아닐까 싶어요. 햇살이 들어올 때 방 안에 앉아 있으면 너무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중간 단계의 상태가 됩니다. 한지로 바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농도가 그렇게 사람 마음을 안정시켜주죠. 한옥 창문은 ‘불 밝기’라고 하는 장치가 있죠. 문 중간의 네모난 부분에 해당하는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의 햇볕 농도보다 빛의 농도가 약간 더 진하죠. 이 ‘불 밝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방 안에 앉아 불 밝기를 보고 있으면 바깥세상에서 갈라진 마음이 원래 상태로 봉합되는 것만 같아요.” “가회동이 지닌 장점도 있나요?” “시내 한복판과 가깝다는 점이죠. 10~15분이면 인사동, 삼청동, 안국동 일대를 다 갈 수 있습니다. 걸어서 말이죠. 가회동은 대도시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전통 분위기를 지닌 동네입니다.
앞으로도 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노력 말입니까?”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고,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곳이 북촌의 한옥입니다. 한옥의 골 목길을 걸어가면서 담장도 보고, 기와도 보면서 사진 찍는 것이 요즘 서울 관광의 포인트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가회동 골목길이 너무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정갈한 주택가의 분위기도 필요합니다. 조용하면서도 정갈한 북촌이 되면 그 자체로도 깊은 인상을 남길 것입니다. 그렇다고 관광객을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 점이 딜레마입니다. 방문객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조용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사전 교육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북촌에 문화인이 많이 와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가회동이 먹고 마시는 상업 공간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관광객만 들락거리는 상업 공간으로 변할까 봐 걱정스러워요. 천박하지 않으면서 고급스러운 전통 분위기를 유지하는 공간 하나쯤은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른쪽) ‘심심헌’처럼 젊은이들에게 모델이 되는 설득력 있는 한옥이 필요하다고 설파하는 조용헌 씨. 주인장 조주립 씨는 외국 생활을 하면서 역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최근 가회동에 새롭게 들어서기 시작한 한옥은 세계적인 주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재로 되어 있어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는다. 더군다나 한옥은 전부 수제품이다. 붕어빵으로 찍어낸 집이 아니다. 수제품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식을 내면으로 집중시키는 주택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옥에 들어와 있으면 그 어떤 안정감과 충만감이 든다. 한류란 무엇이겠는가. 결국 동골서육이 아닌가? 해방된 지 70년이다 되어간다. 이쯤 되면 한국의 골격에다가 서양의 살을 붙여 새로운 초석을 내놓을 때가 된 것이다. 심심헌이 그러한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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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용헌 사진 박찬우 담당 이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