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덕 정점에 자리한 덕분에 취운정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한옥 지붕들이 이루는 아름다운 능선뿐이다. 전통미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마당에는 흙을 깔았다.
2 취운정 본채 대청마루는 창호 문을 통해 둘로 나뉜다. 창호 문을 닫으면 이곳은 독립 객실이 되고 손님이 없으면 개방, 로비 라운지처럼 사용한다. 가구와 소품은 모두 취운정 주인장 이숙희 씨가 모은 앤티크다.
바야흐로 한류 바람을 타고 주거 문화의 꽃으로 떠오른 한옥. 한눈에 봐도 전통 그 자체인 한옥은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문화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보기에 좋고 살기에 힘든 것이 한옥이라는 점은 살아본 이만 아는 은밀한 내막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에게 한옥은 어쩌면 주거 문화로 누리기보다 애써 보전해야 할 상징적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일례로 몇 해 전 북촌한옥마을의 이국적 풍경에 도취된 어느 대사 부인이 한옥에 살고 싶어 집을 알아봤지만, 생활인으로서 한옥의 한계를 접한 후 그가 선택한 것은 창밖으로 한옥 지붕이 산처럼 둘러져 있는 전망 좋은 단독주택이었으니 말이다.
1 본채에 자리한 대청방 객실. 이 호텔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가진 곳으로 천장의 서까래를 중심으로 왼쪽 창으로는 마당과 꽃담, 한옥 지붕이, 오른쪽 창으로는 마천루가 기막히게 펼쳐진다.
2 호텔의 편의 시설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텅 빈 듯한 방 안에 창호 문을 열면 이렇듯 미니 바가 갖춰져 있다. 창을 통해 보이는 기와지붕이 그림 그 자체다.
3 취운정 본채와 별채 사이로 보이는 대문. 대문 옆 샛길을 따라가면 후원에 딸린 또 하나의 대문이 나온다.
4 본채 대청방에서 안방으로 향하는 복도. 개방형 한옥 구조를 독립형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벽면이 모두 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 꺾이는 곳마다 접혀 있는 문을 닫으면 방 자체가 별채가 된다.
취운정을 대표하는 객실, 안방. 모란도로 장식한 옷장 문짝은 실제 이명박 대통령이 기거할 당시 사용하던 병풍을 재활용한 것이다. 내국인보다는 외국인에게 먼저 알려진 취운정은 현재 전화 예약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 작업 중이며, 11월 내 완성할 예정. 전화를 통해 객실에 대한 정보와 서비스 사항을 안내받을 수 있다.
하루를 지내도 한국의 정서를 알 수 있는 곳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지만, 한옥의 생활 문화를 체득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의미에서 한옥을 체험하고 싶어 하는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반면 이에 대한 공급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 때마침 반갑게도 이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한 곳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 가회동 31번지, 한옥이 밀집한 언덕에 자리한 여염집중 두 채가 한뜻을 모아 부티크 한옥 호텔로 탈바꿈했다니,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 재미있는 호텔에 또 하나의 드라마가 더해져 있으니, 바로 그곳은 현 대통령이 살았던 곳이자, 대통령을 배출한 명당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눈에도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은 북촌의 한옥. 어느 하나 저 잘났다 나서기보다는 겸손한 자태를 유지하며 어우러진 풍경이 매력적인 이곳에 새롭게 탄생한 부티크 한옥 호텔, 취운정翠雲亭. ‘취운정이라고 쓴 파란색 현판’이 걸린 한옥을 찾으라는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한옥 그 자체인 이곳은 한마디로 왜곡과 과장 없는 한국의 현재 한옥 문화를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을 피할 수는 없었지요. 대청마루까지 온돌을 깔고, 천장에는 에어컨을 설치했고, 각 방마다 욕실도 마련했죠. 하지만 이는 숙박을 위한 기본 서비스이기에 한옥이라고 예외일 수 없는 부분이었어요. 대신 한옥에서 누리는 정서는 지금 서울에서 한옥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원시적인(?) 수준으로 전통 그 자체를 존중했습니다.” 취운정은 인사동에서 20여 년간 고급 한정식 전문점 ‘두레’를 운영해온 이숙희 씨가 지난 10년간 차근차근 준비하고 다부지게 꿈꿔온 한옥 부티크 호텔이다. 음식만으로는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터라 그에게 한옥 호텔을 운영하는 의미는 남달랐다. “일례로 일본 료칸에서 하룻밤만 묵어도 그 나라의 최고 생활 문화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되잖아요. 같은 바람으로 한옥 부티크 호텔을 생각했습니다.”
본래 대청마루는 취운정 호텔의 로비와 라운지를 겸한다. 우물정자로 깐 전통 마루는 온돌이 깔려 있어 한겨울에도 걱정 없다고. 원래 한옥대로라면 겨울에 마루 위에 앉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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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급 료칸에는 전통 가구가 없는 반면, 취운정에는 주인장이 오랫동안 모아 온 고급 전통 가구가 자리한다는 사실. 백자에 꽂은 꽃은 이숙희 대표가 직접 연출한 것이다.
도공이 깬 도자기 파편을 떠올리게 하는 도자 타일로 연출한 욕실. 도예가 김대훈 씨가 제작한 작품이다.
전통을 위한 파격이랄까. 창호 문 대신 유리창을 만들어 한옥 지붕이 보이는 대청방. 창 아래는 이불장이고, 창호문 위에 민화 작가가 그린 초충도를 붙여 장식했다.
댓잎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발자국을 따라 나는 흙 소리
두 개의 대문, 두 개의 마당 그리고 두 개의 별당을 포함해 세 채로 구성된 취운정. 개인 집이라면 구중구궐이지만 다섯 개의 객실을 갖춘 부티크 호텔로서는 아담하니 아늑한 규모다. 그리고 이렇듯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호텔이기에 주인장 이숙희 씨는 용기를 내어 진짜 ‘전통 한옥’에서 맛볼 수 있는 생활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기로 결심했단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흙 마당. 취운정을 찾은 오전 10시, 호텔 매니저가 방문객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 것은 마당을 쓸고 물을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아침 시간 대부분의 호텔에서 이뤄지는 ‘하우스 키핑’의 한 부분이라 무심코 지나칠 법한 상황이다. 그런데 문득 돌이켜보니 이는 도심형 한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원래 한옥 마당은 정원도 없는 흙바닥 그 자체죠. 그래서 예전 한옥에서는 아침이면 물을 뿌려 먼지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물을 뿌리기 전, 잠시 마당을 거닐어봤다. 처음 대문에 들어섰을때 구두 굽이 폭 빠지던 순간의 당황했던 기색은 이제 마당 안에서 왠지 모를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빗자루로 곱게 쓸어놓은 흙 마당 위에 얄미울 만큼 콕콕 찍어놓은 구멍들이 바로 내 족적이라니.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댓돌에 놓인 흰색 고무신에 손을 뻗는다. 뾰족구두보다는 편편한 고무신을 신어도 좋은 곳. 편안한 신발을 신고 흙바닥 위를 유유자적 거닐다 보니 어느새 귓가에는 옮기는 걸음마다 사각이는 돌 조각 소리가 경쾌한 리듬이 되고, 담장을 따라 늘어선 대나무 사이를 걸을 때는 미사여구로만 알던 사랑방 창 너머 댓잎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다.
“밖에 관광객이 많이 오가지만 차 소리,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죠. 한옥의 신비로움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마치 요새, 아니 세상과 단절된 듯 은둔처 같은 이 한옥 호텔은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던 텔레비전 설치를 과감하게 포기했단다. 물론 무선인터넷은 가능하지만, 굳이 이런 호젓한 곳에서 번잡한 세상만사를 볼 필요가 있을까. 대신 호텔 곳곳에는 평안한 국악의 선율이 공기처럼 흐르게끔 오디오, 스피커 장치를 은밀히 설치했을 뿐이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점은 이마저도 한옥에 존재하는 자연의 소리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고가구와 소반 위에 놓인 꽃이 반갑게 맞이하는 별채 객실 입구. 한옥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2 중정의 운치를 한껏 돋우는 물확에는 평화로운 물소리가 담긴다. 역시 주인장의 컬렉션이다.
3 쪽마루 옆 벽면에 숨겨진 신발장. 슬리퍼 대신 고무신이 마련되어 있다.
4 안방에 딸린 안채. 한지로 마감한 옷장 문에도 수묵화 장식을 더했다.
5 안방 객실로 향하는 복도. 모노콜렉션의 전통 패브릭으로 만든 발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아래) 별채의 안방. 텅 빈 무중력 같은 공간, 쪽창 너머 중원의 풍경이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취향과 역사가 담긴 한국의 고품격 주거 문화
마당을 빼고 논할 수 없는 것이 한옥의 참의미일진대, 이를 충실히 반영한 취운정. 그렇다면 과연 그곳의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호텔로 개조하다 보니 공간 구성상 바꿔야 할 것이 많았죠. 각 방에 욕실을 만드는 것도 그렇거니와 방과 방 사이의 독립성도 보장해야 했죠.” 이숙희 씨가 이곳을 호텔로 만들기 위해 가장 고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공간 분리. 한옥의 본질이 소통과 순환이라는 면에서 개방적인 구조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은 당연히 난제였다. 하지만 이는 한옥 호텔을 지어본 건축가 조정구 씨가 재치 있게 해결했다. 이미 한옥에 존재한 문을 적극 활용한 것. 각 공간은 가능한 한 사방을 문으로 만들었는데, 이 문은 접히거나 벽면 속으로 삽입되고, 또 위로 들어 올려 천장에 고정하면 탁 트인 개방형 공간이 되고 닫으면 독립된 별채가 되기도 한다.
한편 취운정의 내부는 전통 한옥의 모습을 유지하지만 그보다 감각적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박물관을 방문한 듯 고색창연한 가구와 도자기가 운치 있게 조화를 이루고, 다른 곳에서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국 전통문화의 멋이 도도하게 펼쳐져 있다.
“틈틈이 모은 골동품과 무형문화재 작품 그리고 패브릭 디자이너와 도예가의 협업을 통해 한국 주거 문화의 품격을 제대로 담은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부티크 호텔에 가는 것은 그 나라의 고급 주거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 바람이라는 걸 생각하니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죠.”
이숙희 씨는 한옥 곳곳에 손수 꽃꽂이한 화병을 올려놓고, 벽장 창호문에는 엽서 크기의 민화를 붙여 장식했다. 또 욕실은 도예가 김대훈 씨가 만든 분청사기 타일을 붙이는 등 모든 공간에서 한국의 정서, 고급 주거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정취 속에서 대청마루에 앉아 아름다운 전통 찻상을 받고, 저녁이면 기품 있는 한정식 식사를 하며 때로는 휘영청 둥근 달 아래 국악 공연까지 즐길 수 있으니 이처럼 오감 만족 한옥 생활이 또 있으랴. 물론 이 중 몇몇 가지는 ‘최고의 서비스’를 추구하는 부티크 호텔이기에 가능할 테지만, 취운정의 탄생이 반갑고도 고마운 것은 잊히거나 변형되기 십상인 한옥과 전통 주거 문화를 다시 한 번 정리해 초석을 세웠다는 점이다.
*10월 18일부터 31일까지 취운정에서 <살림전>을 개최한다. 11월 정식 오픈을 기념해 미리 2주일간 오픈하우스 형식으로 진행하는 <살림전>은 취운정에 있는 모든 공간을 둘러보고 이곳에서 사용하고 먹는 모든 것을 판매할 예정.
취재 협조 취운정(02-765-7400, www.chiwoonju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