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디자이너 최시영 씨가 얼마 전 4층에서 2층으로 이사하면서 한 달간 레노베이션한 집은 시원한 전망과 탁 트인 구조를 자랑한다. 구조 변경은 거의 하지 못했지만 이사 후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라이브러리와 야외 덱이 생겨 대만족. 사진은 심플한 선반장과 원형 테이블로 모던하게 꾸민 라이브러리 공간이다. 원래 드레스룸이던 작은 공간을 십분 활용했다. 고흐의 조각상은 김민 작가의 작품.
최시영 씨는 그가 직접 설계하고 시공하고 인테리어까지 도맡아 작업한 동호인 주택 리버웨이에 산다. 한남동 유엔 빌리지 언덕길에 있는 이 빌라는 언덕 아래 한강 쪽에서 보면 6층이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4층 건물이다. 그는 설계할 때 경사진 대지의 특징을 살려 1층은 주차장과 창고를, 2층은 헬스장을 만들어 입주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지난 2005년 <행복>에 소개된 그의 집도 역시 이 빌라의 4층이었다. 입주 후 7년간 살던 4층 집에서 2층으로 이사하면서 레노베이션을 진행한 것.
성제야, 을아, 같이 놀자
그가 이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주인이 공간 디자이너라 대대적으로 집을 고쳤겠지’라고 지레짐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집은 전실 앞 드레스룸과 주방 벽면을 개방한 것 외에는 구조 변경을 거의 하지 않았고, 마감재 역시 대부분 그대로 사용했다. “내가 50대에 내 집을 디자인한다면 새로 짓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건상 아래층으로 이사하면서 욕심을 버렸죠. 레노베이션에 허락된 시간은 한 달뿐이었어요. 성격 급한 아내는 남편이 디자이너니까 다 될 줄 알았던 거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데 말이죠, 허허. 욕심을 내서 마음에 들 만큼 고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시간도 별로 없고… 디자이너 말고 여느 집주인처럼 저 역시 시간을 포함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자는 생각으로 꾸몄어요.”
원래 살던 집이 동서양의 앤티크 가구와 어두운 컬러 마감재로 무거운 분위기였다면 이사한 집은 전체적으로 밝고 환하다. 가장 큰 특징은 거실이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 시원한 전망을 시크하게 등지고 있는 곳은 라운지, 고가구를 파티션 삼아 푹신한 소파를 둔 공간은 편안한 AV룸, 드레스룸을 레노베이션한 공간은 라이브러리다. 빈티지 와인 컬러에 반해 한 달을 기다려 도착한 에그 체어가 놓인 라운지는 차를 마시거나 손님을 맞는 응접실 역할을 한다. 푹신한 소파가 놓인 가장 안쪽의 거실은 강가를 바라보며 음악을 듣기 좋다. 그리고 라이브러리는 두 아들을 컴퓨터에서 잠시나마 떼놓을 수 있는 남자들만의 아지트, 가족실이다. 이처럼 가족이 함께 또 따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열린 거실은 “디자인은 공간을 위한 공간이 아닌, 실제로 사는 사람들의 욕구를 능동적으로 이끌어내는 커다란 그릇” 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 서재 선반 뒷면을 유리로 마감해 공간이 유기적으로 소통한다.
2 그가 4층에서 2층으로 이사 오면서 덤으로 얻은 공간은 바로 야외 덱이다. 창가 쪽에도 벤치나 소파를 두어 공간 어디에서든 둘러 앉을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최시영 씨네 네 식구. 발끝으로 전해오는 원목 마루의 온기, 왁자지껄하면서도 소란스러운 가족의 목소리, 거실 풍경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따뜻함 그 자체다.
특히 디자인에 중점을 둔 곳은 라이브러리다. 현관 입구부터 책장을 배치한 과감한 시도가 돋보이는 라이브러리는 널따란 책상과 예술 작품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보통 거실 가장 안쪽에 서가를 배치하지만, 안쪽 거실은 오롯이 멋진 전망을 감상하는 자리로 살려두고 싶었단다. 사실 디자이너 최시영 씨와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책 모양의 대리석 오브제, 멋진 빈티지 책장에 꽂힌 각종 디자인 서적 등 그가 머무는 공간에는 어김없이 책이 가득 차 있다. 그런 그가 ‘서가’를 테마로 집을 꾸몄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다. 단순히 취향을 뛰어넘는 필연적 이유도 있었다. “우리 집 애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그 모습이 참 싫어요.” 그가 ‘거실을 서재로’ 열풍에 뒤늦게나마 동참한 이유는 아마도 미디어 중독으로 각자 노는 시대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감수성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아빠의 책임감이자, 디자이너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기 위함이리라.
라이브러리는 오픈 책장을 사용한 것이 특징인데, 책장 뒷면을 두꺼운 강화유리로 마감해 전실 바로 앞을 막고 있어도 답답하지 않다. 책장 선반은 모두 시트지로 마감했다. 명색이 디자이너의 집인데, 도장 대신 시트지를 쓱 발랐다는 사실이 의아했지만 이는 시간과 실용성,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집을 디자인한 뒤 1백 가지가 넘는 하자 리스트를 받아본 적이 있다면 믿겠어요? 참 아찔했던 기억이지만 그때 하나하나 점검하며 많이 배웠지요. 시트지를 선택한 것은 책장이라는 용도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계속 넣고 빼고 해야 하는데, 도장을 하면 깨질 수 있어요. 시트지를 발라야 하니 디자인이 심플해야 하잖아요? 가로지르는 선반만 두껍게 재단해 포인트를 줬지요.”
(오른쪽) 돼지띠인 성제를 생각하며 컬렉션한 돼지 오브제.
침실 복도에서 바라본 공간은 언뜻 보면 모던하지만 디자이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빈티지 가구와 전문 서적, 개성 있는 오브제, 작품들이 슬그머니 더해져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라이브러리 책장과 AV장을 겸하는 거실 전면 수납장 등 공간에 새로 맞춘 가구들, 즉 심플한 가구들은 모두 화이트 시트지로 마감한 것. 서재를 꽉 메우고 있는 책들은 대개 디자인과 예술 관련 서적이다. 그중에서도 디자인은 그의 최대 관심사다. 아래칸은 현재 보고 있는 책들과 요즘의 관심사를 주제로 한 책들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정한 분위기의 서재를 만들어놓고 그곳에서만 책을 읽으면 외골수 성향이 생긴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우선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게 목적이다 보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디자인한 공간은 이처럼 거실 한 신scene으로도 스토리가 풍부하다. 아내가 늘 앉아서 음악을 듣는 자리, 훌쩍 자란 성제와 꼬맹이 을이가 앉아서 체스를 두는 안락의자 그리고 숨죽이고 이를 지켜보는 공간 곳곳의 작품들이 ‘우린 행복한 가족이에요’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에게 소박한 바람이 있다. “아이고, 이놈의 집구석, 책 읽기밖에 할 게 없네!” 하는 아이들의 즐거운 푸념 소리를 듣는 것. 라이브러리는 이런 흐뭇한 풍경을 상상하며 완성한 공간이다.
책 읽는 디자이너, 밭 가꾸는 건축가
최시영 씨는 호기심이 많은 디자이너다. 그리고 수다쟁이다. 톡 건드리기만 하면 봇물 터지듯 이야기보따리가 쏟아져 나온다. “어릴 때부터 예술을 누리고 즐기면 감각이 발달해요. 어떤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창의적이죠. 독서도 예술 감상과 같아요.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죠. 저는 요리책을 보고 컬러를 익히고 그래픽을 공부했어요. 큰애가 한동안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해 같이 요리를 배웠는데, 요리는 기본이고 꽃꽂이까지 즐겼으면 좋겠어요. 창의력은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 분야에 총제적인 관심을 두고 만들어내야 하지요.”
최시영 씨는 예술을 알고 즐기는 사람은 얼굴에서 행복한 표정이 묻어난다고 단언한다. 어린 시절 유난히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미술가의 꿈을 펼치지 못했다. 디자인 분야에서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그림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일까? 이미 30여 년 전, 공간을 디자인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여기엔 그림이, 저기엔 조각품이 놓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초안을 잡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림에 관심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생각들이 현실에 자연스럽게 흡수될 리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판화. 값비싼 페인팅 말고 좀 더 대중적 판화를 선택하면 더 많은 사람이 작품을 소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내 조윤진 씨와 함께 아예 판화 전문 갤러리를 열었다.
1 데커레이션 전문가로 활동한 아내는 뭐든 쌓고 걸기를 좋아한다. 침대 위에 베개를 4단으로 쌓아 연출해 재미를 주었다.
2 거실에서 바라본 주방의 모습. 거실과 주방을 가로막던 벽을 허물고 유리 폴딩 도어를 달아 개방감을 강조했다.
3, 4 둘째 을이 방은 성제가 쓰던 회전 책장과 디자인 체어로 포인트를 주었다. 삼각 구조물은 여름방학 건축 학교에 다녀온 을이의 작품. 올리브 그린 컬러를 좋아하는 큰아이 성제 방은 올리브 그린 컬러 벽지를 발랐다.
5 최시영 씨가 가장 아끼는 책 오브제, 독일 작가 쿠바흐&빌름젤의 작품이다.
6 방짜 유기 소반을 사이드 테이블로 활용하는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일본에 가서 작은 집들을 구경하기 시작했어요. 서민주택에도 엄연히 문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하지만 서민에게 그림 얘기가 통하나, 그래서 판화라는 장르를 알리고 싶었어요. 포스터는 크잖아요? 왜 걸려고만 하냐, 바닥에도 두어라. 그림도 낮게 봐라. 그러면 넓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했죠.” 박영하, 이강소, 장욱진 작가의 초기작부터 강석현, 김민 씨 등 이른바 잘나가는 신진 작가의 작품까지, 그의 집은 갤러리를 방불케 한다. 작품을 컬렉션하는 데 기준이 있다면 역시 창의력과 호기심이다. 그래서 아트 페어에 가도 유명 작가보다 신예 작가의 작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처럼 일상의 소소한 것까지 관심 많은 디자이너 최시영씨가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은 바로 ‘가든’이다. 영국 첼시의 정원만큼 우리도 텃밭 문화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밭’도 충분히 예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단다. 성제, 을이와 함께 텃밭을 가꾸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땅도 사두었다. “땅이 온통 돌멩이투성이예요. 밭으로 가꾸려면 우물도 파야 하는데 더 이상 차일피일 미룰 수 없어 아이들에게 제안했어요. 사무실에 가면 돌을 찍은 작품이 있는데 보여줬지요. ‘이렇게 돌을 활용해서 뭔가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더니 요즘은 돌 주우러 안 가느냐고 물어요. 바로 행동을 유발하는 디자인인 셈이죠. 참, 얼마 전에 탄광 디자인을 맡았어요. 정선의 폐광을 갤러리와 체험 문화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인데,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에게 공간 곳곳은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액자 하나하나, 책 한 권 한 권 추억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내 아파트, 주거 단지, 빌라, 타운하우스, 주택의 디자인을 진행한 그이기에 특히 주거 공간의 경우 매번 새로운 디자인 체험을 하며 드라마틱한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신의 주거 공간을 디자인한 이번 프로젝트는 재미를 넘어 의미가 남다르다. “30~40대까지는 제 전공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했어요. 디자인만 하기도 바빴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야 했으니까요. 어느 정도 제 분야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니 불현듯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죠. 바로 ‘가족’이었죠. 가족과의 대화 시간이 없어진 건 물론 밥을 먹더라도 혼자 후딱 해치우고 말지요. 속도전을 하며 살아오는 동안 잃은 것들을 하나둘씩 채워가고 있는 중이에요.”
야외 덱에는 키친 가든을 계획하고 있다. 주방과 덱 사이에 임시로 조리할 수 있는 간이 주방까지 만든 그는 곧 꽃과 채소를 심을 컨테이너 박스와 파고라도 설치할 예정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최시영’을 입력하면 가장 먼저 트레이드마크인 검정 뿔테 안경을 쓴 그의 사진과 함께 ‘행동을 유발하는 디자인’이라는 키워드가 뜬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탄광 디자이너’ ‘밭 가꾸는 건축가’로 키워드가 바뀌지 않을까?
(오른쪽) 최시영 씨와 가족들이 집에서 가장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바로 한강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라운지다. 다양한 표정이 살아 있는 거실은 여러 부류의 지인들이 한꺼번에 방문해도 즐겁게 놀다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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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데커레이션 팁 동선, 꼭 짧을 필요 없다 공간의 동선이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편안하지만, 반면 숨은 공간의 재미를 잃는다. 동선 안에서 다이내믹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고려하는 것이 좋다. 이 집은 현관 앞 전실을 책장으로 막아 복도 라인을 만들었다. 라이브러리는 돌아가야 하지만, 침실에서 바라보면 중첩된 벽면에서 공간감이 느껴진다. 의자, 많을수록 좋다 작품 같은 가구들이 늘어서 있는, 그저 바라만 보는 방 말고 뭔가 행동을 유발하는 공간으로 꾸미기에는 의자가 제격이다. 최시영 씨는 유난히 의자, 특히 푹신한 소파와 벤치를 좋아한다. 부엌에도 소파를 두어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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