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한 사랑채의 사랑방 창문 너머로 경복궁 영추문이 바라보인다.
공자는 자신의 공부 과정을 ‘하학이상달 下學而上達’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하학은 형이하학이다. 밑바닥 공부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고준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보편적인 과정이다. 이를 카를 막스 Karl Marx식으로 이야기하면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론이다. 하부구조가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상부구조가 결정된다는 이론이 막스의 생각이다. 일차적으로 하학이 상달보다 더 비중을 차지한다는 관점이다.
건축가 황두진 씨는 그 사람이 사는 집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사람의 성격과 팔자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통 집을 보면 집을 지은 사람을 알 수 있다. 집 구조가 복합적이면 대개 그 사람의 사고도 복합적이다. 공간이 다양하면 생각도 다양하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공간이 단순하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도 단순할 수 있다. 또한 공간이 화려하면 성격도 화려하다. 물론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사고방식이 다양하면 공간을 다양하게 만든다.
인간의 생각이 공간을 지배하는 셈이다. 그러나 건축가는 후자의 입장보다는 전자의 입장에 선다. 이는 건축 공간을 중시하는 노선 때문이다. 건축가의 역할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건축가는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게 건축가 황두진 씨의 지론이다. 필자와 황두진 씨는 2005년 뉴욕에서 출발하여 LA까지 오는 10일 동안 미국 횡단철도를 같이 타고 여행하면서 오만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이다. 기차에 누워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 는 이론이다.
(왼쪽) 가운데 중정이 있는 ㅁ자 구조의 목련원. 다리를 중심으로 왼쪽은 건축 사무실과 주거 공간이, 오른쪽은 서재와 사랑방이 자리한다.
(오른쪽) 집과 사랑채 서재를 연결하는 통로에 집주인 황두진 씨의 개인 사무 공간이 있다.
건축가의 공력이 느껴지는 ‘ㅁ’자 집
이렇게 과감하게 말하는 건축가의 집은 어떻게 생겼는가?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건축가로서 자신이 어떤 집에 사느냐는 직업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다. 대개 유명한 장인도 고객에게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면서 자기 집에는 볼품없는 작품만 갖다놓고 사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황두진 씨의 집은 서울 경복궁 서쪽 대문인 영추문 迎秋門 건너편에 있다. 통의동이다. 이방원이 자기 이복동생들을 죽이는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바로 이 영추문을 통해 대궐로 진입하였다고 한다. 서쪽 문은 오행으로 금 金이고, 금은 의 義에 해당한다. 자신의 거사가 의로운 일이라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 집터는 영추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관상감 觀象監의 대루원 待漏院이 있었던 자리다. 이 통의동 일대는 주로 궁궐에 근무하는 중인 계급이 거주하던 동네라고 전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왕조 5백 년의 스토리가 짙게 깔려 있는 터다.
(왼쪽)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지하 회의실. 황두진건축사무소에서 주관하는 영추문화제를 비롯한 각종 포럼이 열리는 장소다.
(왼쪽) 마당에서 지하 요새로 통하는 문. 설치물 아래 레일을 만들어 힘껏 밀면 스르르 문이 열리며 계단이 나타난다.
(오른쪽) 수심 2m가 넘는 깊은 수조에서 잉어들은 월동을 한다. 질기고도 영험한 생명력으로 이 집과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다.
황두진 씨의 집은 튼 ‘ㅁ’자 집이다. ㅁ자 집이기는 한데 한쪽이 약간 트여 있다. 대지는 377m2(114평), 건평은 462m2(140평). 본관은 2층이고 신관은 3층인데 이 두 건물은 다리로 연결된다. 본관 1층에는 안내실이 있고, 그 옆방에는 직원들 7~8명이 근무하는 설계 사무실과 회의실이 자리 잡고 있다. 2층은 살림하는 주거 공간이다. 신관 1층에는 약 20m2(6~7평) 규모의 카페가 있다. 직원들이 수시로 차 한잔하면서 쉬는 공간이기도 하다. 옆에는 아주 아담한 공간의 별도 사무실이 하나 있다. 동업자 1인이 근무하는 독립된 사무실이다. 13m2(4평) 정도 규모로 집중력이 배가되는 공간이다. 사실 필자처럼 아이디어와 글쓰기로 밥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이처럼 작은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신관 2층에는 서재가 있고, 신관과 본관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에 해당하는 지점에 바로 황두진 씨의 집무실이 자리한다. 3층에는 아담한 침실이 하나 있다. 화장실과 샤워실 그리고 붙박이장 안에 작은 주방을 갖춘 깔끔한 공간이다. 접빈객을 위한 곳으로 외부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면 호텔이나 여관보다 내 집에서 주무시도록 하는 것이 훨씬 편하게 손님을 대접할 수 있어 신경 써서 만든 공간이다. 손님이 없을 때는 선실 禪室로 이용한다. 명상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지하실이 있다. 약 33m2(10평) 규모의 지하는 다 목적 공간이다. 이 집의 대강 구조는 이렇다. 살림하는 주거 공간과 사무실이 붙어 있고, 구관과 신관이 연결되면서 그 중간에 자연스럽게 마당이 놓여 있다. 어느 공간이든지 그 시선이 마당을 향하도록 되어 있는 셈이다.
“튼 ㅁ자 구조는 어떤 의도로 지었는가?” “집 자체가 조그만 마을과 같은 다양한 공간이 나오도록 의도하였다. 이쪽 구석에서 길 건너 저쪽 구석을 쳐다보는 구조다. 이쪽 사무실에서 길 건너의 방을 쳐다보면서 일할 수 있다. 이게 묘한 기분을 준다.” “묘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선은 바라볼 수 있는데서 오는 감정이다. 같이 있는 듯하면서도 떨어져 있고,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붙어 있는 느낌이다. 이게 어떤 공부 효과를 주는 듯하다. 또는 마당이 중간에 있으므로 중정 中庭 역할을 한다. 중정이 있는 집은 아무래도 거주하는 사람의 시선이 바깥보다는 내부를 향하도록 한다. 내부를 향한다는 것은 의식 세계가 내면으로 향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사색적이 된다고할까. 그러면서 안정감도 있다. 밖이 변화라고 한다면 안은 침잠이다. 현대인은 너무 바깥의 변화를 좇다 보니 내면이 공허할 수밖에 없다. 중정이 있는 집은 이러한 허함을 보완해준다고 믿는다.”
“동양 풍수에서는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터가 도읍지에 적당하다고 여겼다. 신라 시대의 경주가 네 방향에 산이 있는 지형이었다. 조선의 한양도, 후 백제의 전주도 그러한 입지 조건이었다. 동양의 우주관에 따르면 동서남북 네 방향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사신수 四神獸로 인격 화한다. 네 방향을 네 마리의 신수 神獸가 지키고 보호한다고 생각하였다. 중정이 있는 ㅁ자 집은 풍수적 ‘사신수’를 축소한 셈이다.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렇다면 서울은 거대한 중정 中庭 도시다. 중정이 있는 집은 방향마다 시선이 바뀐다. 예를 들면 일출과 일몰의 각도가 계절마다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햇볕이 들어오는 각도가 모두 다르다. 이를 바라본다는 것이 사는 사람의 감정에 변화를 일으킨다. 중정이 없는 집과 있는 집의 차이가 이것이기도 하다.”
“건축가로서 남의 집만 짓다가 자기가 살 집을 지어보니 심정이 어떤가? 과부 사정을 알겠는가?” “역시 자기 집을 직접 지어본다는 것은 건축가로서 중요한 일이다. 체험에서 내공이 나온다. 고객의 애로 사항과 고통을 실감 나게 체험하는 계기였다. 특히 건축가 자신은 아파트에 살면서 아름다운 집을 지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정, 다리, 사랑방의
낭만과 예술혼이 펄떡인다
이 집에서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은 황두진 씨의 집무실이 놓인 위치다. 양쪽 건물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에 자신의 책상과 컴퓨터를 배치한 점이다. 2층 높이로 앞에는 경복궁 영추문이, 뒤에는 인왕 산이 자리한다. 동서남북 교차로에 책상이 있다. 어떻게 보면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함장이 운전대를 잡는 조타실 같은 위치이기도 하다. 다리(bridge)라는 것이 무엇인가? 연결 고리 아닌가. 이를 <주역>에서는 ‘이섭대천 利涉大川’이라고 표현한다. 큰 냇물을 건너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문제는 건너야 한다는 것인데, 건너려면 다리가 있어야 한다. 다리가 있어야 불은 물이 되고, 물은 불이 된다. 상단전 上丹田은 하단전 下丹田이 되고 하단전은 상단전이 된다. 부자가 되었다가 빈민이 되어보기도 하고, 빈민이 부자가 되어보기도 한다. 건너야만 역지사지 易地思之가 된다.
(왼쪽) 사랑채 3 층 옥상에 오르면 정면으로 인왕산이, 오른편으로 북악산이 펼쳐진다.
다리야말로 창조적 사고의 장치가 아닌가. 중정이 있는 집이 반대편을 시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구조이듯이, 양쪽 건물을 연결하는 다리에다 사무실을 배치하였다는 것은 기제 旣濟와 미제 未濟 그리고 선천 先天과 후천 後天을 자유롭게 오가겠다는 무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이 집에서 또 하나 시선을 사로잡는 공간은 신관 3층에 있는 사랑 채다. 대부분 아파트에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밖에서 만나 밖에서 밥 먹고, 밖에서 잔다. 모든 것을 밖에서 처리한다는 것은 상대를 사무적으로만 만 나고, 깊게는 만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사회가 너무 많은 인간관계를 맺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피곤을 줄이기 위한 자기방어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충 밖에서 처리해야 편한 것이다. 그러나 안에서 처리해야 할 상황도 있다. 이를 위해 사랑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파트는 편리하기는 한데 접빈 接賓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깊이가 없는 구조다. 조선시대 상류층인 양반의 2대 업무가 바로 접빈객 接賓客, 봉제사 奉祭祀였다. 봉제사가 수직적ㆍ종교적 업무라면 접빈객은 수평적 인간계의 업무였다. 접빈객을 통하여 삶의 보람을 느끼고, 교류의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 집의 3층 방은 손님이 묵어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설계했다. 우선 독립된 공간이 눈에 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완비되어 있고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인왕산, 청와대 뒤의 백악봉 그리고 경복궁의 담벼락이 바라다보인다. 특히 녹음이 우거진 6~7월이면 나무 이파리가 우거져서 밖을 바라다보면 깊은 숲 속 터널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녹색 샤워를 하게 해준다. 서울이 지닌 명산의 풍경과 경복궁이라는 궁궐이 주는 역사성 그리고 집주인의 배려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이런 방에서 2~3일 묵어가면 그 손님은 충분히 대접받았다는 생각을 분명히 할 것이다. 황두진 씨는 손님이 없을 때는 소나무 분재를 한쪽에 배치하고 돗자리를 깔아놓고 명상을 한다. 집주인이 별도 공간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 집의 마당 입구에 팔뚝만 한 잉어 열댓 마리가 사는 유리 수족관이 설치되어 있어 이 선실과 조화를 이룬다.
(왼쪽) 신관 2층 서재 맞은편은 바닥이 투명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2층에서도 중정이 바라보이는 구조. 그동안 진행한 건축물의 모형과 컬렉션한 의자가 전시되었다.
(오른쪽) 공간 곳곳에 그동안 설계한 주택 모형을 진열해놓았다. 가장 왼쪽에 있는 모형이 신관을 짓기 전 목련원의 형태다.
집주인은 미국 예일대에서 현대건축을 공부하였으면서도 한국에 돌아와 서울 북촌에 멋진 한옥을 여러 채 지은 사람이다. 한옥을 지으면서 많은 공부를 하였다고 고백한다. 양ㆍ한방 합종이다. 그가 한옥을 지으며 얻은 결론은 ‘건물이 제2의 자연이다’라는 명제다. 이 집의 중정, 다리, 사랑방은 건축가 집주인이 터득한 그러한 명제가 반영된 곳이다. 건축가는 자신이 사는 집으로서 자신의 공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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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협조 황두진건축사무소(02-795-9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