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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가 지은 집]건축가 김승회 씨가 설계한 판교 주택 집터를 닮은 큐브 하우스
집을 지을 땐 사계절을 모두 지내야 한다며 2월까지 기다려 첫 삽을 떴다. 누워서 바라본 별이 좋아 지붕을 세모로 세웠고, 언젠가 이사 올 이웃을 위해 뒤태도 신경 썼다. 마음씨 고운 건축주와 이성적인 건축가가 만나 풍경을 채우고, 새로운 마을에 이름을 새긴다. 집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우리가 함께 살 마을을 헤아린 집에서 위로를 받는다.


(왼쪽) 서판교 11단지에 길게 뻗은 230㎡(70평) 부지에 지은 집. 외관은 스틸과 나무 그리고 콘크리트까지 재료 그대로의 모습이 살아나도록 디자인했다.
(오른쪽) 애견 벨라와 집 앞 마당에 산책 나온 윤구영・이금순 씨 부부.


“엄마, 저 여름 건축 학교에 가고 싶어요. 집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준비를 한창해야 할 여름방학 때 이금순 씨의 둘째 딸이 선전포고를 했다. 건축 학교라니, 뜬금없는 아이의 부탁에 엄마는 당황했지만 잠시 망설인 후 허락했다. 건축가라는 꿈을 품은 건 아니면서도 건축에 호기심을 갖는 딸 아이가 신기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래의 집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가 건축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그해 여름, 아파트에 살던 가족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계획했다. 당시 무엇을 배우고 왔을지 묻지 않았지만 차츰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났다.

추첨으로 맺어진 건축가와의 인연
1천3백 세대가 저마다의 집을 짓고 사는 서판교. 공동 주거 주택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LH 주택공사가 계획한 서판교 단독주택지에 60~80평대 택지를 분양 했다. 답답한 도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자 서울・경기 일대에서 모인 사람들은 연령대도 사연도 다양했다. 열의에 가득 찬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호회를 만들고, 블로그를 개설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이러한 소통의 결과는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에게 ‘집을 지어주세요’란 공모를 낸 것. 획일화된 주거 단지에 과연 건축가들이 응모할 것인가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예상 밖으로 유명 건축가들이 하나둘 출사표를 던졌다. 경영위치의 대표이자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인 김승회 씨 역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추첨을 통해 구획별로 건축가를 뽑았고, 윤구영・이금순 씨 부부는 김승회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됐다.

제비뽑기로 건축가와 건축주가 짝지어진다는 발상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텐데, 부부는 김 교수와의 만남이 운명이라 말한다. “딸이 참여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주최로 열린 여름 건축 학교 선생님이 바로 김승회 교수였어요. 건축 학교를 다녀와 선생님 덕에 건축에 눈을 떴다고 했는데, 우리 집을 지을 거라니 매우 기뻐하더군요. 만약 아이가 건축 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교수님에 대해 아는 건 포털 사이트의 인물 검색 정보가 전부였겠죠.(웃음)”

학부모와 선생님에서 건축주와 건축가로 대면한 이들은 서로의 요구 사항에 우선순위를 정했다. 건축주는 딸이 유학을 떠나기 전 집을 완성할 것, 수집해온 미술품의 제자리를 찾아줄 것, 마지막으로 길쭉한 필지에 어울리는 마당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세 가지 요구를 했다. 이금순 씨는 <행복>에 나온 강익중 씨, 임만혁 씨 등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다니며 미술 컬렉팅을 시작했는데, 하나둘씩 모인 작품이 새로 지은 집을 채워줄 모습을 상상하며 긴 시간을 달랬다.


통창으로 집 안에 숲을 그대로 들인 거실. 풍경 그 자체가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왼쪽 작품이 걸린 벽이 트래버틴으로 세운 것. 벽에 걸린 작품은 곽훈 작가의 ‘기’. 오른쪽 정면 ‘한마음 주인공이 요술 암호다‘ 라고 벽에 붙인 도예 작품은 강익중 씨가 이 집을 위해 만든 작품. 바닥에 놓인 와이어 사과 조각품은 김병진 작가의 작품이다.

거실 끝으로 곧장 연결되는 부엌은 모던한 주방 가구와 식탁만 두어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다.


길고 좁은 땅, 내・외부를 소통하다
판교에 1천 개가 넘는 필지가 있지만 이곳처럼 기다란 필지를 가진 집은 흔치 않다. 김승회 씨는 우선 땅이 지닌 유니크함과 앞이 탁 트인 전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1층에서 누리는 전망과 2층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1층에선 거실에서 이어지는 통창으로 자연스럽게 풍경을 느끼도록, 2층에선 액자를 걸어 놓은 듯한 자연이 보이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도록 구상했다. 또 침실, 자녀 방은 바닥이 살짝 올라가 큰 액자 안에서 풍경이 보이는 장면을 계획하며 ‘풍경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란 물음을 되뇌었다. 가로로 길게 뻗은 이 집에서 공간감을 살리는 요소로는 계단을 이용했다. 보통 정사각형 주택에선 어쩔 수 없이 계단에 곡선을 주는데, 이곳에선 원 없이 쭉 뻗은 계단을 배치해 시원한 공간을 완성했다. 직사각형으로 긴 땅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고자 담을 낮춰 더욱 좁고 길게 마당을 냈다.

외부에서 보이던 세모난 박공지붕이 2층 침실에 오르자 그 실체를 드러낸다. 2층의 작은 거실을 지나 부부 침실로 들어가면 높게 솟은 세모난 천장이 나온다. 마주한 두 면은 나무와 흰 벽으로 대비를 이루며 담백한 공간에 긴장감을 더한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낸 동그랗고 작은 창은 이웃 집과 면해 큰 창을 낼 수 없는 주변 관계에 대응하는 포즈다. “건축은 서로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김승회 교수는 값비싼 이페 Ipe 나무로 뒷면 외관을 마감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집 앞마당에만 신경 쓰는 데 반해 김 교수는 그 집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이웃을 배려해 집의 뒤태까지 살뜰히 살폈다.

풍경에 대한 고민을 했다면 그 다음은 재료에 대한 고민이다. 김승회 씨의 외부 재료 사용엔 원칙이 있다. 혼자서만 땅을 누리는 전원주택이 아니라 마을 단위의 주택이므로 이웃과 맞닿은 집이 주변을 제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우리 집만 도드라지기보다 함께 어우러지면서 멋진 모습을 구현하는 주택을 짓고 싶었다. 그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는 단순히 집 한 채 잘 지어보겠단 생각 이상의 마음가짐이었다. 건물을 하나의 덩어리로 짓기보다 분절 分節하고, 분절된 곳에서 서로 다른 재료로 차이를 줬다.

“외부에는 노출 콘크리트와 좁고 길게 켠 이페 나무를 사용했어요. 세월이 지나면서 나무의 색은 탈색되어 콘크리트와 비슷한 회색빛을 띨 것이고, 시간에 따라 재료들이 서로 닮아가겠지요. 이들처럼 판교의 모든 집이 화목하게 어우러지길 기대합니다.” 이금순 씨가 수집한 미술품을 내부에 담으려면 벽이 필요했는데, 흰벽을 바탕으로 거실엔 트래버틴 벽을 세웠다. 일종의 타일인 트래버틴은 수백 년 전 돌이 닦이고, 쓸려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그 벽을 바라보는 것 자체로도 풍경이 된다.


1 세모난 박공 지붕의 침실. 한 쪽엔 책상과 책장을 두고, 반대편엔 침대를 둔 오롯이 부부를 위한 공간이다.
2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엔 동그란 창이 연달아 뚫려 있다. 계단 아래 걸린 작품은 임만혁 작가의 ‘점핑’.

3 2층 부부 침실에서 보이는 욕실. 개방형으로 욕실에 창을 내자는 남편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공간이다.
4 두 딸의 방엔 가구 디자이너 이양선 씨가 원목으로 만든 침대와 화장대를 두었다.


주택에서 한 단계 나아간 집
김승회 교수는 서판교의 몇몇 주택 설계에 참여하며 느낀 자신의 견해를 얘기했다. “6ㆍ25전쟁 이후 난민 사회 같았던 한국은 도심에서 머물러 사는데 가치를 두지 않고, 주거지를 이동하면서 재산을 불리는 데 집착해왔어요. 머물러 사는 삶을 다시 생각하고, 그 속에서 뿌리 내리고 살면서 풍요로운 삶을 가꾸는 주택 문화가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서판교에 주택을 10채 정도 설계하며 시행착오도 있었어요. 처음엔 필지 사이의 여유 공간 등을 생각하지 않고 땅을 쪼개는 것에만 연연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답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주거지와 맞닿은 길, 적절한 필지를 조합하는 것이 마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서판교가 집만 다닥다닥 붙은 마을이 될까 내심 걱정도 했고요. 하지만 점차 집들이 자리를 잡아가며 새로운 주택 문화를 이끌어 가리라 생각합니다.무엇보다 주어진 땅의 크기와 모양의 장점을 최대한 이끌어내 효율적인 주택을 설계하는 것이 건축가의 몫이겠지요.”

‘집은 머물러 사는 중심’ 이어야 한다는 김승회 씨는 집 한 채가 가족이 오롯이 뿌리내릴 수 있는 ‘터전’ 되길 바란다.

이페 나무로 마감한 주택의 뒷모습. 프라이버시를 존중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건축가 김승회 씨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시간대학교 건축학 석사를 마쳤다.
S.O.M 시카고 사무실과 서울 건축에서 실무를 익히고 1995년 경영위치를 설립한 그는 제 1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건축가협회상, 건축문화대상 본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영위치 (02-592-4128)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글 배효정 기자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