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의 거실에는 푹신한 가죽 소파 대신 가죽나무로 만든 전통 의자가 놓여 있다. ‘달마도’가 그려진 병풍과 승천하는 용이 그려진 액자까지 더해져 한국적 멋을 제대로 완성했다.
분당 정자동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 12층, 채형언 씨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대하지 않았던 진한 나무 향기가 난다. 들고 나는 숨이 편안하고 상쾌해진다. 현관 전실 양쪽으로 길게 놓인 돌확 위에 초록 화초가 자라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동그란 맷돌이 징검다리처럼 보폭 너비로 놓여 있다. 입구에 들어서 신발을 벗으려고 하면 이번엔 어느 고즈넉한 산사에서 보았음 직한 소박한 석등이 손님을 반긴다. ‘뎅… 뎅’ 하고 어디선가 풍경 소리라도 들린다면 이 공간이 더욱 완벽해질 것 같다.
“국악과 다도를 좋아하고 전통 가구의 멋을 알고 사랑하는 분들이 이 집에 살지요. 듣고 보고 먹는 것 모두 한국의 전통적인 것을 추구해온 주인 부부의 스토리를 담아 인테리어했습니다.” 이 집의 인테리어를 담당한 김하나 씨의 설명이다. 그는 이 집 안주인 채형언 씨와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채형언 씨 가족은 작년 11월 이 집으로 이사했는데, 그동안 내내 꿈으로만 간직해온 자연 친화적이고 한국적인 전통이 담겨 있는 집을 김하나 씨의 손을 빌려 꾸미게 되었다.
(왼쪽) 기존에 있던 현대적 전등은 한옥을 연상시키는 이 집의 정갈한 인테리어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인테리어를 담당한 김하나 씨는 천장 마감재와 같은 편백나무로 조명등을 위한 틀을 짜고 천연 염색 천을 그 안에 덧대어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오른쪽) 채형언 씨가 친정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뒤주. 위에는 그가 사진작가로 활동할 때 썼던 카메라가 진열되어 있다.
그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 중 하나는 마감재.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은은한 나무 향은 집 전체의 천장을 마감한 편백나무에서 나는 것이다. 이 편백나무는 장흥 천관산에서 가져온 것인데, 편백나무는 자연이 선물한 천연 항생제인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뿜어내는 나무라고 한다. 사람이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 기능이 강화되며 살균 작용도 이루어진다. 편백나무는 ‘히노키 욕조’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히노키 나무와 같은 수종이기도 하다.
황토로 벽을, 편백나무로 천장을 마감한 집
편안한 느낌을 주는 벽면의 주황빛은 황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토를 직접 발라 마감하기는 어려우니, 김하나 씨가 지혜를 발휘했다. “황토로 천연 염색한 광목에 풀을 발라 벽을 마감했어요. 안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천이 광목이기도 하지요.” 황토가 사람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것은 물론 은은한 흙 빛깔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실크 벽지보다 오래가고, 두고 볼수록 더 멋스럽고, 자연에서 온 색이기에 싫증 날 일도 없다는 것이 채형언 씨의 남편 조명옥 씨의 설명이다.
거실 전면 창을 전통 한식 문살로 장식했다. 한국 전통 스타일로 꾸민 평화로운 거실에서 차를 즐기는 채형언 씨.
이런 자연의 빛깔을 담은 벽이라면 인공적인 새시가 어울릴 리 없다. 그래서 채형언 씨가 평소 그 매력을 흠모해 꼭 한번 내 집 창으로 갖고 싶어 한 전통 문살을 과감히 아파트 안으로 들였다. 거실 창과 안방 창 그리고 또 곳곳에 장식적 요소로 전통 문살을 달았다. 여닫을 수 없이 고정된 기존 창 위에 전통 문살을 덧대는 방식을 이용했다. 필요에 따라 문살을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창이라기보다는 커튼같은 역할을 한다. 편백나무, 황토 등 자연 마감재에 전통 문살까지 더하니 한옥처럼 정갈한 여백이 느껴지는 공간이 탄생했다. “아침에 해가 뜰 때면 거실 창살 사이로 빛이 들어오지요. 창살 문양이 도드라지면서 그 사이로 환하고 맑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모릅니다. 밤에는 밖에서 보면 저희 집만 창문 빛이 달라 보여요. 다른 집처럼 밝고 차가운 창이 아니라, 문살에 퍼진 은은한 빛이 따뜻해 보이는 창이지요.”
(왼쪽) 거실에 자리 잡은 그릇장은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큰맘 먹고 장만한 것.
때마다 수시로 문살에 동백기름을 바르는 수고를 감수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는 조명옥 씨의 소감이다. 집 안에 놓인 가구도 전통 가구가 대부분이다. 어디 가구뿐일까. 침구와 커튼, 방석, 쿠션 등 패브릭 제품도 천연 염색 천으로 만든 것들이다. 아파트 거실이라면 공식처럼 자리 잡게 마련인 가죽 소파와 평면 TV 대신 이 집에는 가죽나무로 만든 전통 의자와 ‘달마도’가 그려진 병풍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쏟아지는 조명도 눈여겨봐야 한다. 편백나무로 프레임을 짜고 그안에 천연 염색 천을 덧대어 은은한 빛이 통과해 쏟아지도록 했다. 조명은 물론 조명등 스위치까지 고즈넉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현대적인 디테일은 가리거나 바꾸었다.
(왼쪽) 30년간 모은 다기는 채형언 씨의 보물 1호다. 왼쪽은 문경요 천황봉 선생의 작품이고, 오른쪽은 현암요 오순택 작가의 작품.
(오른쪽) 좌식으로 꾸민 다실에는 채형언 씨가 모은 수많은 다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친정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이층장, 30년간 모은 다기 이 집에는 자랑할 만한 컬렉션이 두 가지 있다. 전통 한국 가구와 다기가 그것이다. 채형언 씨가 친정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이층장과 뒤주는 세월이 만들어준 멋이 더해져 이제는 둘도 없는 보물이 되었다. 또한 내로라하는 장인을 찾아 새롭게 만든 거실 장식장도 이 집의 자랑거리. 그리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다기 컬렉션도 눈여겨봐야 한다. 채형언 씨는 명원문화재단에서 다도를 공부하고 사범 과정까지 마친 30년 차 다도인. 그렇게 오랜 시간 차를 공부하고 음미하면서 조금씩 모은 다기가 이제 꽤 많은 양이 되었다.
“항상 사람 북적이는 것 좋아하고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는 아내인데, 다기만큼은 쉽게 누구에게 선물하지 않더라고요.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하나가 귀하고 값진 것이더군요.” 이렇게 채형언 씨가 차를 사랑하다 보니 집 안의 한 공간을 다실로 꾸민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다실에는 잘 정리된 다기와 함께 장구와 북이 놓여 있다. 알고 보니 이 집의 큰딸 세리가 판소리를 공부한다고. 일주일에 몇 번 선생님이 오셔서 판소리를 가르쳐주시는데 흥이 날 때면 저도 모르게 북소리며 목소리가 높아져 이웃 주민에게 들릴 정도가되기도 한단다. ‘구성진 목소리’라고 선생님에게 칭찬받는 세리는 작년에 <내일의 소리, 내일의 명창> 오디션에서 입상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재능이 그냥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니다. 부부 모두 판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세리 외할아버지가 보성 서편제의 고수 鼓手였다고 한다.
(왼쪽) 아이들을 위한 책이 사방으로 빼곡한 서재.
(오른쪽) 천연 염색 천으로 맞춘 침구가 멋스러운 안방.
딸만 아니라 아들 또한 재주꾼이다. 씩씩한 아들 우태는 ‘박지성 축구단’에서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다고. 여느 집처럼 부부의 자랑인 두 아이는 집에 온 손님에게 “식사하고 가세요”라며 스스럼없이 권하는 넉넉한 인심을 자연스레 익혔다. 이들 부부가 어릴 적 사람들로 북적이던 집 안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남과 소통하고 나누며 사는 삶을 부모에게 배우는 중이다.
(왼쪽) 맷돌과 석등을 장식한 현관 전실.
(오른쪽) 현관에 놓인 화분 아래에는 이 집에 잘 어울리는 글귀가 적혀 있다.
“‘우리 집’이라는 말에선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고마움 가득한 송진 향기가 난다.” 이 집에 들어설 때 현관 입구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장이다. 옹기를 화분 삼아 자라는 키 큰 나무 아래 이런 문장이 쓰인 액자가 놓여 있다. 이 집에 참으로 어울리는 말로, 일부러 골라서 놓아둔 게 분명하다. 물론 그 향기는 송진 향기가 아니라 편백나무 향기 그리고 사람의 향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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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인테리어를 담당한 김하나 씨는 플로리스트 출신으로 천연 염색, 인테리어에도 능한 재주꾼입니다. 현재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아래 그가 직접 꾸민 정갈한 한옥에 살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함평나비 축제’에서 꽃 조형물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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