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도, 보부상도 밥 한술 뜨고 가던 ‘노랑대문집’
어머니는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대갓집으로 시집을 왔다. 화순 연동마을 ‘노랑대문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지나가는 거지도 길을 알려줄 정도로 유명한 집이었다. 그 시절 보부상 사이에는 “하룻밤 묵어 갈 곳이 없으면 노랑대문집을 찾아가라”는 말도 있었다.
마을 군수이던 할아버지는 성품이 인자하고 덕이 높은 분이셨다. 할아버지가 출타하셨다 돌아올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싸리비에다 불을 붙여 절을 할 정도로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두터웠다. 그러니 노랑대문집이 거지도, 보부상도 밥 한술 뜨고 가던 ‘밥집’ 혹은 마을 사람들의 대소사를 해결하던 ‘민원실’ 역할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한평생 허리 펼 날 없이 일만 한 건 어머니다. 그럼에도 “인품 좋은 집안으로 시집와서 배운 것이 더 많다”고 우리를 가르치셨다. 짐작하건대 어머니 또한 양반집의 귀한 외동딸이었음에 틀림없다. 평소 예의가 바르고 아무에게도 말을 낮추는 법이 없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몸종에게는 유일하게 “이것 좀 하소”라고 심부름을 시킨 것을 보면 말이다.
(왼쪽) 올해로 여든넷을 맞이한 어머니와 그의 여섯째 딸 정희남 대표. “이러코롬 사진을 찍으면 돈을 줘야 허는 것 아닌가”라는 깜찍 발언으로 어머니는 스태프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셨다.
부모님이 정희남 대표에게 물려준 한옥.
아버지는 연동마을의 유명한 한량이자 애처가였다. 인물이 훤해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데다, 글도 읽을 줄 알고 붓글씨도 잘 쓰셔서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젊은 시절엔 잠깐 교사로 일하시다가 중년이 되어서는 한약상을 차리셨다. 하지만 역시 돈 버는 일보다는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일을 더 좋아하셨다. 마을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편지를 쓰거나 지방 紙榜 쓰는 일을 모두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으니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마을 이장을 지낸 것도 당연한 결과다. 안팎으로 후한 인심을 얻었던 부모님은 금실도 좋아 어머니가 시집온 이듬해부터 줄줄이 구 남매를 낳으셨다. 마을 어른들은 “집터가 좋아 노랑대문집에는 복이 넘친다”고 덕담을 하곤 했다. 그렇게 복이 넘치던 노랑대문집에는 이제 어머니만 홀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뿔뿔이
도시로 나가 제 살길을 찾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신주 神主를 모시고 마을 독거노인의 끼니를 챙기신다.
1 구 남매가 어머니께 선물한 한옥 ‘연후당’. 도편수 영산 박영권씨가 지었다.
2 누마루에 걸터앉아 ‘포즈’를 취하고 계신 어머니.
3 아버지가 살아생전 가장 아끼시던 북과 벼루.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희남 관장이 물려받아 잘 보존하고 있다.
4 텃밭에서 기른 콩을 잘 말려 소품으로 활용했다.
연꽃 같은 당신이 사는 집, ‘연후당’
어머니가 노랑대문집에 혼자 남게 된 건 아버지가 생을 마감하신 후 부터다. 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본인은 미동도 안 하셨다. 눈에 넣기도 아까운 자식들에게 죽는 날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하해와 같은 마음에 보답할 길 없던 형제들은 어머니를 위해 한옥을 한 채 짓기로 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노랑대문집 터에 어머니가 생활하시기 편하도록 사랑채를 짓고, 행랑채와 안채, 신주를 모시는 사당은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기에 최고의 도편수 영산 박영권 선생에게 청을 했다. 박영권 선생은 한옥에 대한 외사랑으로 한평생을 사신 분이다. 대패질을 하도 많이 해서 손마디가 두 개가 되었고,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벌어져 그 형상이 마치 물갈퀴처럼 변했다고 해서 ‘마디 닳아 물갈퀴 된 손’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박영권 선생이 집을 지을 때 가장 고심한 것은 ‘기둥 높이’다. 기둥이 너무 높으면 자연을 해치고 너무 낮으면 살기가 불편하다. 고심 끝에 지은 집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낮은 듯 보이지만 높은 집’이다. 행랑채에서 사랑채를 올려다보면 낮은 지붕 아래 단층 한옥을 지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그 안에는 ‘온전한 2층’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는 ‘넓고 안락한 다락방’이 숨어 있다. 또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누마루와 다실이, 오른쪽에는 침실로 사용하는 사랑방과 신식으로 고친 주방이 붙어 있다. 1층과 2층을 합하면 35평 대지 위에 70평
이 넘는 집을 지은 셈이다. 아홉 형제와 그 식구가 모두 모여도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왼쪽) 어머니가 젊었을 때부터 쓰시던 자개장. 자식들이 오면 꺼내줄 색색의 이불을 개어 넣어두었다.
(오른쪽) 아랫목 따뜻한 어머니의 방.
다락방은 특히 명절 때 빛을 발한다. 십수 명이나 되는 조카 녀석들은 고향 집에 오면 제일 먼저 다락방으로 올라가 잘도 어울려 논다. 다락방은 아늑하기도 하거니와 하늘로 난 천창이 있어 낮에는 대숲이 보이고 밤에는 별이 빛난다. 아이들에겐 천국이 따로 없다.
남자 형제들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다실이 딸린 누마루(문을 닫으면 방이 되고 열면 정자가 되는)다. 바둑판을 놓아두어 ‘말 없는 남자들’이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내기에 그만이다. 바둑을 두다가 졸리면 마루와 연결된 다실에서 낮잠을 청할 수도 있다. 박영권 선생이 만든 이 다실은 누마루보다 계단 하나 높이 정도 낮게 지은 방이다. 마루 쪽 아궁이에서 땐 불의 온기가 이 방까지 덥혀주기 때문에 어머니는 고추를 말리거나 메주를 띄울 때 이 방을 사용하신다.
마을 사람 100명이 몰려와도 모두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만큼 넓고 안락한 한옥. 노랑대문집 터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 사랑채를 우리는 ‘연후당’이라 부르기로 했다. ‘연꽃과 황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인데, 집이 완성되던 날 어머니가 꾼 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연꽃이 가득 핀 연못가에서 누군가 “마마님, 황후마마님” 하고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어머니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 또한 연동이고, 앞산이 모후산이니 거기서 한 글자씩을 따도 ‘연후당’이 된다.
어머니가 행랑채에 머무시는 이유
최고의 도편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성스럽게 지은 집이건만, 정작 집주인인 어머니는 넓은 사랑채를 두고도 행랑채에 머무신다. 행랑채에는 군불 지펴 뜨끈하게 등을 지질 수 있는 황토방도 있고, 곡식 그득한 곳간과 살림하는 부엌도 딸려 있다. ‘운동장처럼 넓은 사랑채에서 덩그러니 혼자 지내는 것보다 생활 동선이 익숙한 행랑채에서 생활하는 게 더 편하다’는 어머니. 하지만 형제들은 어머니가 행랑채에 머무시려는 진짜 이유를 안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왔다 갔다 하다가 혹시라도 넘어지면 자식들 고생할까 봐 애초에 그 근처에는 가지도 않으려는 심산이라는 것을.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텃밭을 가꿔 자식들 먹일 음식을 만드는 일로 채워진다. “어머니, 올겨울엔 생강차 좀 만들어 먹으면 좋겄소” 그러면, 여름부터 생강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얄포롬하게 저며 설탕에 재웠다가 뜨끈한 생강차를 먹여주신다. 지나가는 말로 “백일홍 꽃이 피면 동네가 훤허겄소” 그러면, 이듬해 봄에는 어김없이 담장 따라 백일홍이 발그레하게 피어 있다. 뭐니뭐니 해도 어머니가 베푸는 최고의 자식 사랑은 가으내 키운 배추와 무로 담근 김장 김치다. 어머니는 매년 구 남매 집에 각각 스무 포기씩 김장을 해주시는데, 그 많은 일을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당신 혼자 뚝딱 해치우시고는 “김치 맹그러놨다, 가져가그라” 그러신다. 어릴 때도 그랬다.
공부하는 애들 시간 뺏는다고 그 힘든 밭일도, 손 많이 가는 부엌일도 혼자 하셨다. 아무튼 자식에게 폐 끼치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는 양반이다. 혼자 지내시면 적적해서라도 전화를 자주 거실 법한데, 애들 일하는 데 방해된다고 전화도 자주 안 하신다. 전화를 거실 때는 반드시 뭔가 만들어놨으니 가져가라는 말씀뿐이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 말이 ‘보고 싶으니 한번 다녀가라’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다.
(왼쪽) 누마루와 다실이 연결된 공간. 형제들이 바둑을 두고 낮잠을 즐기는 공간이다.
(왼쪽) 정희남 대표의 화순 본가를 구석구석 둘러보다 발견한 명장면! 구 남매의 대학 졸업 사진이 순서대로 걸려 있다. 아래 두 줄은 석사와 박사를 마친 형제들이다. 구 남매를 모두 학자나 예술가로 훌륭히 키워내신 어머님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오른쪽) “대한민국에 우리 어머니 밥 안 먹어본 사람 없을 거예요”라는 정관장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취재팀에게도 자연식으로 만든 ‘어머니 밥상’을 차려주셨으니 말이다.
부모님이 여섯째 딸에게 물려준 유산
어머니가 하도 퍼주기만 하니까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대한민국에 저 양반 밥 못 얻어먹은 사람은 없을 거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한다. 자식이 하나 부족한 열인 데다 사위에, 며느리에, 손자와 손녀까지, 그도 모자라 마을 독거노인들까지 집에 들여 밥을 먹이니 그리 과장된 말도 아니다. 어머니는 “혼자 먹으면 뭐허냐. 같이 나눠 먹고 그런 거제”라는 말로 자식들을 가르치셨다. 하다못해 거지가 와서 밥을 달라고 해도 “손님 왔다, 상 차려라” 그러시면서 ‘손님상’을 먼저 차리고 식구들 밥은 나중에 주셨다. 그 배려와 나눔의 정신은 가훈으로 쓰여 대청 한가운데에 걸어두었을 정도로 우리 집안에선 중요한 문제다. ‘세상의 도리와 인내와 배려를 배우고 익히던 이 집에 머무는 모든 이들이 평온과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금실 좋기로 유명하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거짓말이 아니라 평생 부부 싸움을 한 번도 안 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셨고, 어머니 역시 아버지 말이라면 군소리 없이 따르셨다. 딱 한 번 아버지가 어머니의 ‘뺨을 때린’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원인은 바로 나였다. 줄줄이 딸만 넷을 낳은 어머니는 시댁 어른들 눈치가 보여 아들을 소원했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남녀를 차별하지 말자”고 당부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기저귀를 손수 갈아주실 정도로 네 딸을 애지중지 키우셨다. 그러던 와중에 천운으로 다섯 번째에 아들을 얻은 것이다. 한번 아들을 낳고 나니 또 아들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어머니는 또다시 임신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또 딸을 낳자 엉엉 울음을 터뜨리신 것이다. 그걸 본 아버지는 어머니의 뺨을 때리면서 “초상났다고 우는가”라고 크게 호통을 치셨다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뺨을 때린 건 아마도 갓 태어난 여섯째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 옛날 어머니의 ‘작은 실수’ 때문일까. 아버지의 마지막 재산이던 한옥 한 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 차지가 되었다. ‘연후당’ 뒤뜰을 지나 오래 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한옥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가족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공간이니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셈이다.
1 가족 모임이나 부부 여행을 떠나기에 더없이 훌륭한 ‘아트센터 대담’의 게스트하우스.
2 편하게 걸터앉아 졸졸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카페 내부.
3 2층 게스트하우수 화장실. 고가구로 정갈하게 꾸몄다.
4 전시와 관련해 야외 공연을 펼치기도 하는 2층 테라스. 공연이 없을 땐 야외 카페로 활용한다.
부모님의 정신이 깃든 배려의 공간, ‘아트센터 대담’
지금 나는 화순에서 40분 거리인 광주에 살고 있지만, 어머니를 찾아뵙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다. 오십이 넘도록 어머니 그늘 아래 살고 있으면서 그 1000만분의 1도 되돌려드리지 못한다. 몇 해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해 올해 초에 문을 연 담양의 ‘아트센터 대담’은 ‘내 어머니가 만든 갤러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몸소 가르쳐준 묵묵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 내 울타리, 내 가족
이 아니라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며 사는 삶의 방식. ‘어머니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머니가 ‘뜨끈한 밥’으로 사람을 품었다면 나는 ‘예술’로 사람을 품을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도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아무런 부담없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곳, 남의 집처럼 불편하지 않고 내 집처럼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는 곳, 힘들 때나 외로울 때나 고향 집처럼 막 달려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 내가 짓고자 한 미술관은 바로 그런 곳이다. 나는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갤러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
그러다 지치면 넓은 계단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관람객들도 이제는 나처럼 계단에 앉아 그림을 보거나 책을 읽는다. ‘이 공간의 주인인 나처럼 당신들 또한 이곳에서 편하게 즐겨라’라는 내 퍼포먼스를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림을 보기 싫은 날엔 카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커피를 마시다 가도 좋다고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밤 12시까지 문을 열어두는 곳이 바로 여기 있다”고 말이다.
(왼쪽) 정희남 대표는 가끔 이 계단에 누워 생각에 잠긴다. 손님들에게도 그것을 권한다.
(오른쪽) 정희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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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정희남(‘아트센터 대담’ 대표,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