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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호숫가 한옥 찻집 옥정호에서의 하루
전남 임실, 호숫가에 작은 돌담을 끼고 단아하게 자리 잡은 한옥 찻집 ‘하루’. 이곳에서 자그마한 차 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살고 싶어 하던 주인장은 아름다운 풍광을 더 많은 이와 즐기고자 작은 다실을 만듭니다. 그의 이런 소박한 바람이 간결한 공간을 낳았고, 이 간결한 공간은 여러 사람에게 고요한 휴식을 주고 있습니다.


옥정호 너머로 먼 산이 바라다보이는 다실. 사계절 바뀌는 풍광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백가기행’은 100여 집을 기행한다는 의미지만,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집단인 ‘제자백가 諸子百家’를 기행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집과 사상은 겹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집을 구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 품고 있는 인생관을 살펴보는 셈이다. 따라서 집을 보면 집주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주인의 집은 복잡하고, 정리가 된 사람의 집은 간결하다. 복잡보다는 간결이 아무래도 한 수 위가 아닐까. 간결하고 심플한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면세계의 무수한 대패질 과정을 겪어야 한다. 대패질을 많이 할수록 간단해진다. 이 대패질은 무엇이냐? 필자가 보기에 고통과 고독이다. 고통스러우면 고독해지고, 고독해지면 성찰이 온다. 성찰이오면 내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털어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세워진다.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인생관이 단순해지고, 그 단순해진 인생관이 그 사람이 사는 집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기 마련이다.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종리 옥정호 玉井湖가 바라다보이는 한옥 찻집 ‘하루’는 그 첫인상이 무척 간결했다. 그 간결함이 방문객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집이다. 왜 이 집이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면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일까?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적인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세 가지 이유를 찾았다. 첫째는 옥정호라는 호수의 존재였고, 둘째는 지붕에 기와를 얹은 한옥, 셋째는 정갈하게 다듬은 녹색 잔디였다.


카페 하루가 특별한 것은 바로 한옥과 잘 정돈된 잔디, 호숫가 풍경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산과 물 그리고 석양이 함께하는 침잠의 시간 첫째, 왜 호수인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은 물이 필요하다. 물은 휴식을 의미한다. 바다를 보든지 강을 보든지 호수를 볼 수 있는 지점은 집 짓기에 최상의 조건이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아래로 가라앉혀준다. 세상살이는 불타는 일이다. 머리에 열이 가득해지면 마음이 위로 뜨고, 마음이 위로 뜨면 열기도 위로 올라가게 마련이고, 열기가 올라가면 곧 병이 온다. 이 열과 마음을 아래로 내리기 위해서는 물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모두 다 먹고살기 위해서 ‘열’받고 있다. 그래서 21세기는 ‘수 水의 시대’라고 진단한 도학자도 있다. 19세기가 철기 문명의 정점을 이루는 쇠(金)의 시대였고, 20세기가 불(火)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물의 시대라는 것이다. 불이 에너지의 원동력이고 외향적이며 공격적이라면, 물은 내면에 침잠하면서 수용적 에너지를 지녔다. 물은 또한 ‘블루 골드’라고도 한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푸른 물이야말로 황금에 비견된다는 것이다.

바닷물이나 강물에 비해 호숫물이 지닌 장점은 무엇인가? 물이 잔잔하기 때문에 하늘의 해와 달이 비친다는 점이다. 또 한낮에는 햇볕이 물결에 반사되어 마치 보석이 반짝이는 것 같다. 밤에는 달이 비친다. 밤에 달이 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일컬어 동양의 현자들은 ‘수월 水月’ 이라고 불렀다. 불교의 관음 觀音 중에서 가장 유명한 관음이 바로 ‘수월관음 水月觀音’ 아닌가.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집은 밤에 비치는 달, 즉 수월관음을 방 안에서 감상할 수 있다. 수월을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한다. 달은 하나지만 물에 비치면 수천 개 또는 수만 개의 달로 확대된다. 본체는 하나인데 현상은 수천 개일 수 있고, 그러면서도 양자는 같다. ‘월인천강 月印千江’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화엄華嚴 철학에서 말하는 ‘일즉다다즉일 一卽多多卽一’의 철학적 이치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수월을 보면서 하나와 여럿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도그마 dogma를 깨라는 말이다. 수월이 주는 또 하나의 가르침은 ‘헛것’에 현혹되지 말라는 이치다. 물에 비치는 달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가. 실체가 없다.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 삶도 이 그림자를 잡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사실 이 그림자는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가짜지만, 이 정도 되는 가짜라면 한번 잡아볼 만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태백은 물에 비치는 달을 잡으려고 물속에 뛰어든 것일까? 우리 삶이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한순간의 환영이라면, 과연 그 환영 너머의 진짜는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진짜는 이 환영보다 진정코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 삶에서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집이 주는 철학적 성찰이라면 바로 이것이다.


(왼쪽) 차탁과 다기장으로 정갈하게 꾸민 행랑채에는 3칸의 다실이 마련되어 있다.
(오른쪽) 안채에서는 해인사 도방의 다기와 수작업으로 만든 다포, 매트 등의 소품도 판매한다.


호수가 있으면 석양이 좋다. 이 찻집 ‘하루’는 서향 西向이다. 저녁 무렵에 노을이 붉게 호숫가를 물들인다. 호수와 석양은 최상의 궁합이 아닐 수 없다.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이라는 경전에 보면 극락을 보기 위해서는 평소 명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그 명상 습관은 16가지가 있다고 소개한다. 이를 16관 觀이라고 한다. 16관 중에서 제일 첫 번째 관이 바로 저녁에 석양을 보는 것이다. 석양을 보면 분노가 삭아버린다. 인생 헛살았다는 자책감과 무상감도 어느 정도 보상받는 것 같다. 이런 노을을 보고 있는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 반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됐지 얼마나 더 바랄 것인가. 그러면서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옛날 사람들도 석양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16관 가운데 석양관을 제일 첫머리에 배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년들은 시간만 나면 석양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도시에서 일몰 보기가 그리 쉬운가. 필자는 저녁 일몰이 아름답게 보이는 장소를 찾아 전국을 누빈 적도 있다. 해남 미황사 명부전 석축에 올라 조망하는 일몰도 아름답고, 영광 법성포의 해안 도로에서 칠산 앞바다로 넘어 가는 장엄한 일몰을 기억하고 있으며, 거제도 외포리에서 보던 석양도 잊을 수 없다. 특히 이 석양이 물빛에 비칠 때 더욱 효과 만점이다.

‘하루’의 한옥 본채는 편액이 송하정 松霞亭이다. 소나무와 노을이라는 뜻이다. 고창의 해리에 있던 송계정 건물을 이쪽으로 옮겨오면서 송하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송하정의 가운데 방은 원래 마루로 된 대청이었는데, 전기 코일을 깔아서 겨울에도 바닥이 따뜻하다. 이 대청마루에 앉아서 옥정호로 저녁노을이 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삶도 그리 나빴던 것만은 아니라는 위로가 밀려온다. 노을은 선비들도 광적으로 좋아했다. ‘연하벽 煙霞癖’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안개 연 煙 자, 노을 하 霞 자다. 안개와 노을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뜻이 바로 ‘연하벽’이다. 이 ‘연하벽’이라는 병에 걸리면 세속을 떠나야 한다. 산이 좋아진다. 문명과 백화점과 쇼핑과 돈과 멀어지면 연하벽이 가까워진다. ‘단하실丹霞室’이라는 표현도 있다.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의 책을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을 단하실이라고 한다. 옥황상제의 도서관 주위를 붉은 노을( 霞)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붉은 노을이 둘러싸고 있어야 마귀나 잡귀들이 감히 책을 훔쳐가지 못한다. 마귀를 쫓아내는 장치가 바로 단하인 것이다. 필자의 서재에는 경주의 지인으로부터 뺏어온(?) 단하실 丹霞室 편액이 걸려 있다. 이처럼 저녁노을은 동양의 정신사에서 그 용도가 다양하다.

이러한 위로감은 한옥이기에 더욱 배가된다. 콘크리트 건물에 앉아서 바라보는 석양과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광경이 분명 다를 터. 미국 사람이면 몰라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한옥은 우리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이고, 그 윗대 조상들도 이곳에 살았다. 천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우리 유전자 속에는 한옥이 가진 이미지가 들어 있다. 조상도 살았고 나도 산다. 이 감정에는 편안함이 깔려 있는데 이는 오래된 것이 주는 장점이다. 새로운 것은 긴장을 주지만, 오래된 것은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우리 삶은 너무 빨리 바뀌고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이 지닌 미학이라고나 할까. 제발 좀 안 바뀌는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도 오래된 친구가 편안하지 않던가! 초등학교 동창생이 주는 편안함이 바로 한국인에게는 한옥이 주는 편안함이다. 한 가지 더. 새로 지은 집보다는 옛날에 살았던 집이 더 정감이 간다. 목재에 세월의 때가 묻어 있으면 좋다. 대개 호수를 바라보는 집은 서구적 건축 또는 펜션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한옥이 이처럼 단아하게 호수를 마주하니 그 느낌이 특별한 것이다.


(왼쪽) 고창 해리 송계정의 정자를 옮겨오고 이름을 송하정으로 바꾸었다.
(오른쪽) 한옥 곳곳에는 돌확과 장독대 등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물건이 많다.


풍수는 어떠한가? 임실군 운암면 운종리의 찻집 ‘하루’는 그 터가 재물이 모이는 터다. 풍수에서 재물은 무엇으로 보느냐? 우선 물이다. 집 앞에 물이 감아 돌거나 호수가 보이면 일단 돈으로 본다. 그런데 집에 비해 호수가 너무 크면 부작용이 있다. 물의 크기가 적당해야 한다. 이 옥정호는 섬진강의 물이 내려와서 생긴 호수로, 운암댐과 연결된다. 그래서 상당히 큰 호수에 해당한다. 그런데 호수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 찻집은 넓은 호수가 통째로 바라다보이는 것이 아니고, 바둑판의 귀퉁이처럼 호수의 귀퉁이만 보이는 지점이다. 호수가 손바닥보다 좀 크게 보인다. 바로 이 점이 묘미다. 그다음에는 찻집 앞에 보이는 산의 모습이다. 앞쪽이 뻥 뚫려 있으면 풍수에서는 기가 빠져나간다고 본다. 앞에 가려주는 산이 있어야 한다. 도선국사는 이 앞산의 존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앞산이 없는 곳은 터로 잡지 않았다. 사람 얼굴에 비유하면 마치 턱과 같다. 앞산이 없으면 사람의 턱이 없는 셈이다. “어림 택도 없다”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택’은 ‘턱’의 사투리다. 이 앞산을 안산 案山이라고 부른다. 책상과 같이 적당한 높이의 산이어야 제구실을 한다. 앞산이 너무 높으면 집을 짓누르고, 너무 낮으면 힘이 없다. 집의 마루에 주인이 섰을때 배꼽에서 눈높이 사이의 높이가 가장 좋은 안산의 높이다. ‘하루’의 안산은 이 높이에 해당한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다. 앞산에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근무한 초등학교 마암분교가 자리 잡고 있다. 집터 뒤쪽에서 내려오는 산의 맥도 기운이 있어 보인다. 뒷맥도 짱짱해야만 집터가 힘을 받는다. 이 집이 주는 간결함의 세 번째 요인은 잔디다. 잔디는 서양 건축의 단골인데, 한옥에 잔디를 깔아놓으면 동도서기 東道西器가 된다. 녹색 잔디는 모던한 느낌을 주는데, 이 모던함이 오래된 한옥과 만나면 궁합이 맞다. 세련되면서도 심플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것이다.


한옥 찻집에서 인생 기행 이 찻집의 본채는 고창군의 송계정이라는 유서 깊은 정자를 옮겨온 것이다. 정자는 살림 공간이 아니고 선비들이 모여 놀던 휴식 공간이다. 가운데가 대청마루고 양쪽으로 방이 하나씩 있는 구조다. 실내 높이도 적당하게 높다. 이 높이가 또한 시원한 분위기를 준다. 이 집 주인은 차를 좋아해서 찻집의 마당 아래쪽 텃밭 500평에 녹차를 심었다. 차를 직접 조달하기 위해서다. 호수의 안개도 이 찻잎의 영양분이 될 것이다. 차는 이슬과 안개를 먹고 성장하는 식물이다. 10월부터 11월 초까지는 하얀 차꽃이 핀다. 차꽃의 향은 치자꽃 향과 같은데, 치자꽃 향보다는 훨씬 은은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어찌 다른 나무의 잎은 다 떨어졌는데 차나무는 이 늦가을에 꽃을 피운단 말인가. 국화와 차 茶는 동무란 말인가.

(왼쪽)
호숫가 바로 옆에는 작은 차 밭이 있다. 특히 안개 낀 새벽과 석양이 질 무렵 그 풍경이 아름다워 산책을 즐기기 좋다.


전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20~30분 거리의 시골에 있는 이 찻집은 주말이 되면 도시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온다. 오후 6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주말 낮 시간에는 자리가 없을 때가 많다. 한국은 이제 시골이 없다. 길이 잘 뚫려 있고,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니까 좋다고만 하면 어디든지 간다. 4~5시간이면 어지간한 거리는 찾아갈 수 있다. 경치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오고, 대구와 부산에서도 찾아온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끌벅적한 유원지보다는 이처럼 전망이 좋고 석양이 비치는 한옥 찻집에 와서 자기 인생을 차분하게 되새겨보는 찻집 기행이 더 실속 있는 일 아닌가. 차 한잔하고 앉아 있자니 더 나이 들어 이런 찻집 하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정성스럽게 달인 차를 내주면서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좋은 삶이니.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 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 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 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행복>에 연재되었던 백가기행 칼럼을 엮어 출간 한 <조용헌의 백가기행 白家紀行> 등이 있습니다.
글 조용헌 사진 이우경 기자 담당 이지현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