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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내시경'으로 본 김영택 화백의 작업실
디자이너에서 펜화가로, 쉰 살이 되어 세계 곳곳으로 펜 끝 기행을 펼치고 있는 김영택 화백. 그의 펜화에는 수십만 번의 손길이 가야 하는 정교함과 실물을 재해석해내는 디자인적 감각이 필요하다. 이러한 감각을 키우고 미감을 재해석해내는 그의 내공은 바로 작은 소품에서 나온다. 작업에 필요한 아이디어는 물론, 지칠 때 위안까지 얻는다는 그의 컬렉션을 ‘내시경’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았다.

‘경 鏡’에는 두 가지만 있는 줄 알았다. 현미경과 망원경. 미세한 것을 보거나, 아니면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거울이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이 두가지 거울보다 훨씬 센 거울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바로 내시경이다. 중년이 되니까 더러 병원에 가서 검진받을 일이 생기고, 대장이나 위장상태의 검진에는 응당 내시경이 동원됐다. 자기 몸속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현미경이나 망원경보다 더 중요하다. 중년에 알게 된 거울이 내시경인 것이다. 집을 보러 다니는 일도 그렇다. 그 집의 터를 보는 풍수는 망원경 작업이다. 집의 어떤 부분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은 현미경으로 보는 작업에 해당한다. 그러나 집 밖이 아니라 집 안 내부, 내부 중에서도 어떤 부위만 집중해서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을 때 꺼내는 것이 바로 내시경 작업이다. 김영택 화백은 펜화로 유명하다. 펜으로 아주 세밀하게 그린 여러 문화재 그림은 사진과 그림을 합해놓은 장르다. 사진이 주는 사실감과 그림이 주는 조망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는 펜화 한 장을 그릴 때마다 약 50만 번에서 70만 번의 선을 긋는다. 1mm 안에 5번의 선을 그을 만큼 아주 세밀한 그림이다. 그래서 짝퉁이 나오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세밀하고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작업실은 어떠할까? 내시경과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 작업실을 들여다보았다. 작업실 이곳저곳에 가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소품과 물건, 장난감, 골동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여러 특이한 사람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이렇게 조그만 물건을 지극히 좋아하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남자가 이러한 여러 가지 물건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내면이 그만큼 재미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물건을 소장하느냐는 그 사람의 내면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물건을 보면 그 사람 내면이 드러나고,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는지를 알 수 있고, 미의식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한발 더 나아가면 팔자 八字까지 나타난다고 본다. 말하자면 격물치지 格物致知인 것이다.

(왼쪽) 오피스텔 안의 작은방 다래헌. 펜화가 김영택 씨는 이곳에서 차를 대접하고 손님에게 작품 영인본에 덕담과 사인을 해준다.


금강산 보덕암’, 1 종이에 먹펜, 43×6cm, 2009

영성을 맑게 해주는 작은 집, 작은 물건 먼저 그의 작업실 앞에 붙은 다래헌 茶來軒이라는 현판이다. 20년 전에 그저 내용이 좋아서 구한 현판이라고 한다. 펜화를 좋아하는 팬과함께 차를 마시면서 미니 펜화 엽서에 사인을 해주면 그렇게 좋아한다고. 불상은 북위시대 오석 烏石에 조각한 불상으로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 좋아서 구한 것이다. 부처와 법상을 인간이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고, 상단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두 명과 술병을 들고 춤을 추는 사람이 별나 보이는 점이 인상적이다. 필통은 펜화를 그리다 보니 여러 가지 펜을 사용하는 일이 직업이고, 이 펜들을 보관하려다 보니 필통이 필요했을 뿐인데 결국엔 필통 수집으로 이어졌다. 김영택 화백은 현재 약 1백여 개의 필통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백자 호랑이 문양 투각 필통’, 청나라의 ‘매화문 목제 필통’, 고암 顧菴 이응로 李應魯 선생이 만든 ‘용 조각 청동 필통’ 등이 대표적이다. 골동품과 현대작을 구분하지 않고 모았으며 차통과 도자기도 많다. 대개 차통은 그 재료가 귀목인데, 느티나무를 말한다. 구스목 차통도 있는데, 구스목은 동남아시아 밀림에서 벌채하는 나무로 색깔이 불그스름하면서 아주 단단해 매우 고급 재료에 속한다. 보통 이 구스목을 ‘화류목 樺榴木’이라고 부르는데, 화류장을 만들 때 쓰던 목재가 바로 화류목이다. 문갑 위에는 백자 술병은 도암 陶菴 지순탁 池順鐸 선생이 만든 백자 술병이 놓였고, 고려 분청사기 사발이 그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반닫이도 겹겹이 쌓여 있다. 반닫이 3개 중 가운데 소나무 반닫이는 김영택 화백이 직접 만든 것인데, 홍대에서 목칠 공예를 전공한 덕이다. 김화백은 그저 반닫이가 좋아서 이 작은 오피스텔에 8개나 소장하고 있다. 반닫이는 습기가 차지 않아서 카메라 등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인 데다 외양이 아름답고 물건이 많이 들어가는 장점이 있다. 숭숭이 반닫이 위에는 높이 46cm인 조선 청화백자 ‘용충항아리’가 놓여 있는데, 형태가 완벽하고 그림 솜씨가 뛰어난 분원 자기다. 방 한쪽 낮은 반닫이 위에 자리한 달항아리는 높이 41cm, 지름39cm인데 그 색감이 서민적이다. 백자 연잎형 향꽂이는 설봉 스님이 만든 작품이다. 그는 펜화를 그리기에 앞서 향을 먼저 피운다.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 때문에 주로 침향을 좋아한다. 지통은 나무의 썩은 속을 파내고 만든 자연산 작품으로, 이곳을 다녀간 많은이가 탐내는 것이다.

(오른쪽) 그가 정신을 집중하고 싶을 때 쓰는 죽장도.


1 실제 사진을 보고 확대해서 세밀화 작업을 한다.
2 펜화를 그리는데 사용하는 펜촉은 굵기별로 10가지 이상. 펜대, 연필 등 갖가지 도구를 꽂아두는 필통도 수집한다.


3 그가 컬렉션한 캐논 카메라.
4 현관 입구에 있는 2층장과 작품 ‘금강산 보덕암’.


개다리소반 위에는 거북 받침에 연잎 광배를 갖춘 등잔대와 해주 소반이 놓였고, 구스목을 파내 만든 함지박도 있는데, 이는 각종 차를 보관하는 데 유용하다. 목검과 죽장도 竹杖刀도 있다. 화류목으로 만든 목검은 손잡이 부분의 용 조각이 매우 미려한데, 펜화 작업을 하다 정신이 산만해지면 목검을 들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칼끝에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고 나면 잡념이 없어지고 기가 충만해진다고. 죽장도는 한국 최고의 환도장 環刀匠 홍석현 선생이 만든 휴대용 호신도로, 혜문 스님의 사업을 돕는 바자회에서 3백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는데, 정신을 집중하는 데는 목검보다 효과가 더 좋다. 기실은 늙으면 지팡이 겸 호신용으로 쓸 의도다.
반닫이 위에는 소형 범종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 향을 피우고, 향을 피운 다음에는 타종한 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타종을 하면 맑고 강한 쇳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고. 작업 도중 정신이 산만해질 때에도 타종을 하면 머리를 일깨우는 효과가 있다. 세밀한 작업은 무엇보다 정신 집중이 중요한 법이라, 강한 쇳소리가 정신을 일깨우면서 집중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금붕어도 키운다. 그것도 작은 돌확에….
자연석인 강돌의 3분의 1을 자르고 그 속을 파내 수초를 띄워 작은 물고기를 거뒀다. 외출도 못 하고, 장시간 실내에서 작업만 할 때는 이 물고기를 보는 일이 작으나마 위안을 준다.


5 20여 년 전 내용이 좋아 구입한 현필 ‘다래헌’.

카메라, 고가구, 조각… 컬렉션은 치유와 위안 펜화를 그릴 때는 일단 현장에 가서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작업실에 돌아와 디카에 담아온 사진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보면서 그린다. 모니터의 확대 기능을 이용하면서 더욱 섬세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펜대 10개를 꽂을 수 있도록 스스로 고안한 펜 꽂이는 그 장점 때문에 문구 회사에서도관심을 보이고 있다. 펜화를 그리는 데 사용하는 펜촉은 굵기별로 10여 가지를 사용한다. 가장 가는 펜촉은 ‘타치가이’사의 크로킬 펜으로 0.1~0.3mm의 선이 나온다. 이보다 더 가는 선이 나오게 하기 위해 펜촉을 사포에 갈면 약 0.04~0.05mm의 선을 그을 수 있다. 이 미세한 펜촉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는 20배율의 돋보기를 대고 사포에 간다. 잉크의 농도를 측정하기 위해 100배율의 광학 돋보기를 사용하는 것도 독특하다. 아주 세밀한 펜화를 그릴 때에는 형광등이 옆에 붙은 3배율 대형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서 그림을 그린다. 잉크 중에서도 먹 잉크는 건조가 빠른 편이다. 펜화를 그리는 데 사용하는 보조 수단이 카메라이다 보니 카메라에, 특히 캐논에 관심이 많다.
김 화백은 그림에 앞서 디자인 전문가였다. 그는 과거에 삼성 SF-250 카메라를 디자인했다. 그때부터 카메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현재 2백여 대를 보유하고 있다. 전통 주석장을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이층장을 카메라 보관하는 수납장으로 사용한다. 캐논 카메라는 수집하는 이가 별로 없어 원하는 제품을 좋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며 컬렉션의 소소한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작업실 입구의 왼쪽에는 2층 책장, 오른쪽에는 백동 장식의 오동나무 2층 농이 자리하고 있다. 2층 농은 디자인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품위가 있다. 농 위에 놓인 조각상은 캄보디아의 어느 사원 문틀 위에 있던 상인방 조각으로, 3마리의 코끼리를 타고 있는 비슈누 Vishnu인데 디자인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조각상이다. 책장 옆에는 모자가 걸려 있는데 현장 취재를 다니다 보니 햇볕에 노출되면 얼굴이 타고, 검버섯이 생기기 십상이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꼭 챙긴단다. 현재 겨울용 모자까지 포함해 10여 종의 모자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펜화라는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한 김영택 화백. 그의 펜화에는 수십만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하는 정교함과 실물을 재해석해내는 디자인적 감각, 그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찍어내는 사진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감각을 키우고 미감을 재해석해내는 그의 내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해답 중 하나는 여러 가지 소품이었다. 카메라, 필통, 차통, 죽장도 등 그가 컬렉션하는 소품에서 아이디어를얻고, 작업에 필요한 도움도 받고, 지치면 휴식을 얻고, 손으로 만지고 애완하며 즐거움도 느낀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의 작업실 소품들을 찬찬히 둘러본 것이다. 망원경이 아니라 내시경을 들이대고 김 화백을 들여다본 셈이다. 때로는 내시경으로 사물과 사람을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작업실을 살피는 데는 이러한 내시경이 더욱 효과를 발휘한다는 생각이 든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행복>에 연재되었던 백가기행 칼럼을 엮어 지난달 출간한 <조용헌의 백가기행 白家紀行> 등이 있습니다.

이지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