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 상수동 스프링 컴 레인 폴 야외 덱에 가족이 모두 모였다. 여덟 살 율이와 문구 디자이너 조수정ㆍ권재혁 씨, 고양이 두루와 도람이까지 모두 다섯 가족.

1 조수정 씨가 디자인한 목기류는 스프링 컴 레인 폴 쇼룸(02-3210-1555)에서 만날 수 있다.
2 카페의 한 코너 공간. 어린 시절 아날로그 향수를 자극하는 ‘공책’의 테마가 잘 전시되어있다.
지금, 세 번째 시즌을 준비하며 ‘공책’은 이미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문구 브랜드다. 무지 표지에 까슬까슬한 갱지를 사용한 아날로그 감성의 노트가 대표 아이템. ‘스프링 컴 레인 폴’은 ‘공책’을 비롯해 그릇, 패브릭, 소품 등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까지 아우르는 회사명이다. 권재혁ㆍ조수정 씨 부부가 운영하는 이 디자인 회사는MMMG와 같은 해에 론칭한 1세대 디자이너 문구 브랜드로 그 역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지금은 이렇게 카페에서 회의를 하지만, 피 끓는 20대 때는 카페에 앉아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젊은 시절을가장 헛되이 보내는 일이라 생각한 두 사람. 연애 시절부터 만나면 늘 무언가를 만드는 데 열중한 그들은 의기투합해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해 우승을 한다. 그때 ‘노트’로 거머쥔 상금으로 과감히 문구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웨딩마치와 함께!). 당시 조수정 씨는 패션 브랜드 오즈세컨 디자인실을 거쳐 쌈지의 머천다이저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권재혁 씨는 패션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중이었다. 직원이라고는 단둘뿐인 회사를 차리고는 두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내일 당장 납품해야 할 소품을 만들기 위해 바지런히 움직였다.

1 2층 오피스의 모습.
2 1층 쇼룸은 차를 마시러 오는 이들이 전시를 관람하는 문화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바쁘게 사는 것과 여유 없이 사는 것은 다르다. 처음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바쁘게 살았을 때에는 그래도 마음만은 여유로웠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오로지 바쁘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생활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남편도, 나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여행 계획 짜기에 한창 열을 올리던 우리 가족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평소 같은 디자이너로 큰 도움을 주던 엣코너의 이수영 실장이 자기들이 살던 한옥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한번 와서 보겠냐는 것이었다. 예전 그대로의 소박한 모습을 간직한 작고 낡은 한옥. 가슴이 두근거렸다. -<율이네 집> 서문 중 부부는 삶이 허허롭던 어느 날, 종로구 효자동의 작은 한옥을 만났다. <율이네 집>(앨리스)이라는 책을 통해 한옥 예찬과 소박한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한 조수정 씨. 여섯 살 된 아들 율이랑 한옥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일어나는 일련의 에피소드를 엮은 이 에세이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며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2년여의 한옥살이 즐거움도 잠시, 올 초 전세로 살던 집이 팔렸다. 당장 이사를 하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책을 통해 이야기한 신념들이 무너지는것 같아 더 힘들었다. 하지만 부부는 낙담하지 않고 ‘언젠가는 쇼룸과 카페 등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을 만들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조금 앞당겼다. 어차피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과정일 뿐이므로…. 차를 마시러 오는 이들이 자유롭게 제품도 보고 전시도 관람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구성한 상수동 쇼룸은 조금 급박하게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지난 4월 말, 상수동에 오픈한 스프링 컴 레인 폴의 1층은 권재혁 대표가 개발한 간단한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카페와 공책의 쇼룸, 2층은 스프링 컴 레인 폴의 헤드 오피스와 ‘율이네 집’이 있다. 원래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라 카페, 쇼룸, 오피스, 주거 공간 등 공간을 크게 구분짓기 좋은 구조였다. 책장과 가벽을 이용해 공간을 분할하고 카페와 오피스는 인더스트리얼 빈티지 스타일로, 주거 공간은 화이트 도장과 나무 짜맞춤 가구로 내추럴하게 꾸몄다. 잠시지만, 한옥에 살며 비움의 미학을 실천한 덕분인지 지금 원룸 형태의 자그마한 주거 공간도 제법 넉넉하게 사용된다.
3 까슬까슬한 종이, 연필 등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문구류는 조수정 씨가 디자인적 영감을 받는 것들이다.

파벽돌과 노출 콘크리트로 오래된 건물의 빈티지한 느낌을 살린 오피스 공간. 디자인팀, 상품개발팀, 수출팀 등 스프링 컴 레인 폴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미학 영문 ‘O-check’으로 더 잘 알려진 공책은 사실 우리나라보다 일본 등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브랜드다. “우리도 미처 몰랐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우리 제품을 좋은 편집숍에 입점시켜주고 있어요. 미국의 모마 숍을 비롯해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각국의 편집 숍에 공책 제품이 전시되어 있지요.” 이렇다 보니 여행 갔다 외국에서 공책 제품을 먼저 본 사람들은 공책이 외국 브랜드인 줄 아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책을 만나면 “아! ‘오-체크’가 아니라 ‘공책’이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일본에서는 이미 카피 제품도 무수히 나왔다. 무엇이 이들 디자인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걸까? 유럽인은 공책을 두고 유럽 제품보다 더 유럽스러운 브랜드라 말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적 정서인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이어서 좋다고 평한다. “저희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아이들 취향의 어른 문구, 즉 키덜트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에 가깝지요.” 회사 규모가 커지자 젊은 디자이너를 영입한 후 일선에서 물러나 운영을 맡은 권재혁 대표. 사업과 육아 등 남편이 큰일을 맡아줘서 자신은 좋아하는 디자인만 계속할 수 있다며 고마움을 말하는 조수정 씨는 누구나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한다.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어렵다는 것, 절제하는 것이 더 좋은 디자인이라는것도 차곡차곡 알게 되었다. 또 지금은 문구류와 생활용품이 주를 이루지만 의상, 집, 라이프스타일에 관련한 전반적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다. 나무 그릇은 그릇 욕심이 많은 조수정 씨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으로, 쇼룸을 통해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컵과 볼, 접시 등을만날 수 있다.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나무와 흙의 모습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품고 있어요. 따라서 밥과 나물, 반찬의 온도까지 제대로 품어줘요.” 마치 하나의 캠페인처럼 실생활에서, 책에서 디자인으로 나무 그릇과 질그릇 예찬론을 진득하게 펼친다.

1 2층 주거 공간의 주방은 패브릭 작업실로 꾸몄다. 내추럴한 감성을 자아내는 선반장은 모두 직접 디자인한 것.
2 하나로 트인 공간은 낮은 책장을 파티션 삼아 부부 공간과 율이의 공간으로 나눴다.

사실 생활 주변 곳곳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하나 멋스럽지 않은 것이 없단다. 실제 임시로 거처를 마련한 같은 건물 안 율이네 집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아이템으로만 꾸몄다. 자작나무 합판으로 맞춘 전면 붙박이장 위에는 재래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 채반과 소쿠리를 조르르 올려두었는데, 얼마나 소박한 멋이 나는지모른다. 앉은뱅이책상, 파티션처럼 낮은 목재 책상도 눈에 띈다. “아이 눈높이의 물건이 많은 공간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조수정씨는 도심 속이지만 집만은 편안한 감성을 담고자 나무 가구와 채광을 은은하게 투영해주는 하얀 리넨 패브릭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 칸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볼 것이 생겨나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이 집은 우리가 잊고 지낸 평범한 것들이 조금은 특별해 보이는 기술을 잘 담고 있다. 아이는 나고 자란 주변 환경을 평생 기억속에 간직하며 자랄 것이다. 아들 율이는 엄마 아빠감수성을 쏙 빼닮은 탓인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요즘, 가장 재미를 붙인 장난감이 헌종이 상자로 만든 집이다. 모아둔 재활용 상자로 이것저것 만들더니집 다섯 채를 붙여 완성한 거대한 종이 왕국을 앞마당에 펼쳐놓고 신나게 노는 아이. 리사이클링이 무엇인지, 그게 왜 좋은지도 모를 텐데 아이는 그저 온몸으로 즐기며 받아들이고 있다. 대나무밭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부부의 유전자 합작품이자 감성 디자인의 실체는 바로 아들 ‘율’인 셈이다.
3 정갈한 멋을 내는 도자기.

1 역시 가족은 함께할 때 가장 환한 표정을 짓는다.
2 빈티지 카메라와 라디오는 선반, 테이블 등을 꾸미기 좋은 소품.

3 한옥에 살며 가구를 모두 작은 것으로 바꿨다. 심플한 목가구는 목공사 때 쉽게 맞춤 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