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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문구 디자이너 권재혁·조수정 씨 '율이네 집' 세 번째 이야기
효자동 자그마한 한옥에서의 일상을 에세이로 담아냈던 문구 디자이너 권재혁ㆍ조수정 씨. 작고 소소한 것에서 느끼는 감동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들 부부는 지난봄 찬란했던 한옥 생활을 마치고, 홍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주택을 개조해 집과 사무실, 카페, 쇼룸까지 모두 한곳에 모은 이 공간에서 ‘율이네 집’, 그 세 번째 시즌을 시작합니다.
젊음, 열정, 디자인의 거리라는 수식어가 습관처럼 따라붙는 홍대앞. 어느덧 카페가 속속들이 들어서고 있는 상수동 골목길의 주택들사이에 ‘스프링 컴 레인 폴 spring come rain fall’이 의연하게 자리 잡았다. 오전 10시, 1층 카페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문구 브랜드 ‘공책’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주로 말하는 이는 공책의 권재혁 대표고, 그 옆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는 그의 아내이자 디자인 실장 조수정 씨다. 부드러운 템포의 시부야케이 음악이 울려 퍼지는 카페에서 디자인 체어에 앉아 우아하게 카푸치노를 마시며 하는 회의라니, 참 여유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 광경은 ‘공책’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는 평화로운 일상. 사실 이들 부부를 인터뷰하기로 한 날, 내심 불안했다. 북상하는 태풍도 그 이유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인터뷰이가 취재를 썩 내켜하지 않는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성품이 조심스러운 조수정 씨는 생활의 부분을 담은 사진과 미사여구의 글로 그들의 삶이 포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완곡히 고사했고, 남편 권재혁 대표는 그런 부인을 설득하겠노라며 기자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인터뷰 당일, 촬영팀은 아내에겐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이었다. “어차피 설득이 안 될 것이고, 미리 얘기해서 혼날 일, 그냥 저지르고 혼나는 게 낫지요.” 허허 웃는 남편, 이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가. 이내 아내는 또 당했다는 듯 체념한 표정이다. “집 정리할 시간은 주시지요?”

(왼쪽) 상수동 스프링 컴 레인 폴 야외 덱에 가족이 모두 모였다. 여덟 살 율이와 문구 디자이너 조수정ㆍ권재혁 씨, 고양이 두루와 도람이까지 모두 다섯 가족.


1 조수정 씨가 디자인한 목기류는 스프링 컴 레인 폴 쇼룸(02-3210-1555)에서 만날 수 있다.
2 카페의 한 코너 공간. 어린 시절 아날로그 향수를 자극하는 ‘공책’의 테마가 잘 전시되어있다.


지금, 세 번째 시즌을 준비하며 ‘공책’은 이미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문구 브랜드다. 무지 표지에 까슬까슬한 갱지를 사용한 아날로그 감성의 노트가 대표 아이템. ‘스프링 컴 레인 폴’은 ‘공책’을 비롯해 그릇, 패브릭, 소품 등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까지 아우르는 회사명이다. 권재혁ㆍ조수정 씨 부부가 운영하는 이 디자인 회사는MMMG와 같은 해에 론칭한 1세대 디자이너 문구 브랜드로 그 역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지금은 이렇게 카페에서 회의를 하지만, 피 끓는 20대 때는 카페에 앉아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젊은 시절을가장 헛되이 보내는 일이라 생각한 두 사람. 연애 시절부터 만나면 늘 무언가를 만드는 데 열중한 그들은 의기투합해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해 우승을 한다. 그때 ‘노트’로 거머쥔 상금으로 과감히 문구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웨딩마치와 함께!). 당시 조수정 씨는 패션 브랜드 오즈세컨 디자인실을 거쳐 쌈지의 머천다이저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권재혁 씨는 패션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중이었다. 직원이라고는 단둘뿐인 회사를 차리고는 두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내일 당장 납품해야 할 소품을 만들기 위해 바지런히 움직였다.


1 2층 오피스의 모습.
2 1층 쇼룸은 차를 마시러 오는 이들이 전시를 관람하는 문화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2005년 ‘스프링 컴 레인 폴’이라는 라이프스타일 캐릭터 숍을열었어요. 공책의 문구 제품뿐 아니라 리빙 소품, 패브릭 아이템, 또 해외에서 셀렉팅한 아이템까지 선보였죠. 하지만 워낙 젊은 층이 많은 지역이다 보니 상품 회전율이 높고, 끊임없이 신상품을 개발해야 했어요.” 대량 생산을 하다 보니 손으로 일일이 만들어 판매하던 처음처럼 손맛과 정성을 많이 담을 수는 없었다. 그즈음 왠지 일을 시작한 초심과는 다르게 떠밀려가는 느낌을 받았단다. 술이 너무 빨리 익기를 바라는것은 아닌가 싶어 조금 천천히 호흡을 고르자 마음먹었다.
‘바쁘게 사는 것과 여유 없이 사는 것은 다르다. 처음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바쁘게 살았을 때에는 그래도 마음만은 여유로웠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오로지 바쁘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생활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남편도, 나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여행 계획 짜기에 한창 열을 올리던 우리 가족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평소 같은 디자이너로 큰 도움을 주던 엣코너의 이수영 실장이 자기들이 살던 한옥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한번 와서 보겠냐는 것이었다. 예전 그대로의 소박한 모습을 간직한 작고 낡은 한옥. 가슴이 두근거렸다. -<율이네 집> 서문 중 부부는 삶이 허허롭던 어느 날, 종로구 효자동의 작은 한옥을 만났다. <율이네 집>(앨리스)이라는 책을 통해 한옥 예찬과 소박한 라이프스타일을 이야기한 조수정 씨. 여섯 살 된 아들 율이랑 한옥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일어나는 일련의 에피소드를 엮은 이 에세이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며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2년여의 한옥살이 즐거움도 잠시, 올 초 전세로 살던 집이 팔렸다. 당장 이사를 하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책을 통해 이야기한 신념들이 무너지는것 같아 더 힘들었다. 하지만 부부는 낙담하지 않고 ‘언젠가는 쇼룸과 카페 등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을 만들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조금 앞당겼다. 어차피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과정일 뿐이므로…. 차를 마시러 오는 이들이 자유롭게 제품도 보고 전시도 관람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구성한 상수동 쇼룸은 조금 급박하게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지난 4월 말, 상수동에 오픈한 스프링 컴 레인 폴의 1층은 권재혁 대표가 개발한 간단한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카페와 공책의 쇼룸, 2층은 스프링 컴 레인 폴의 헤드 오피스와 ‘율이네 집’이 있다. 원래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라 카페, 쇼룸, 오피스, 주거 공간 등 공간을 크게 구분짓기 좋은 구조였다. 책장과 가벽을 이용해 공간을 분할하고 카페와 오피스는 인더스트리얼 빈티지 스타일로, 주거 공간은 화이트 도장과 나무 짜맞춤 가구로 내추럴하게 꾸몄다. 잠시지만, 한옥에 살며 비움의 미학을 실천한 덕분인지 지금 원룸 형태의 자그마한 주거 공간도 제법 넉넉하게 사용된다.

3 까슬까슬한 종이, 연필 등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문구류는 조수정 씨가 디자인적 영감을 받는 것들이다.


파벽돌과 노출 콘크리트로 오래된 건물의 빈티지한 느낌을 살린 오피스 공간. 디자인팀, 상품개발팀, 수출팀 등 스프링 컴 레인 폴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미학 영문 ‘O-check’으로 더 잘 알려진 공책은 사실 우리나라보다 일본 등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브랜드다. “우리도 미처 몰랐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우리 제품을 좋은 편집숍에 입점시켜주고 있어요. 미국의 모마 숍을 비롯해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각국의 편집 숍에 공책 제품이 전시되어 있지요.” 이렇다 보니 여행 갔다 외국에서 공책 제품을 먼저 본 사람들은 공책이 외국 브랜드인 줄 아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책을 만나면 “아! ‘오-체크’가 아니라 ‘공책’이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일본에서는 이미 카피 제품도 무수히 나왔다. 무엇이 이들 디자인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걸까? 유럽인은 공책을 두고 유럽 제품보다 더 유럽스러운 브랜드라 말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적 정서인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이어서 좋다고 평한다. “저희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아이들 취향의 어른 문구, 즉 키덜트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에 가깝지요.” 회사 규모가 커지자 젊은 디자이너를 영입한 후 일선에서 물러나 운영을 맡은 권재혁 대표. 사업과 육아 등 남편이 큰일을 맡아줘서 자신은 좋아하는 디자인만 계속할 수 있다며 고마움을 말하는 조수정 씨는 누구나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한다.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어렵다는 것, 절제하는 것이 더 좋은 디자인이라는것도 차곡차곡 알게 되었다. 또 지금은 문구류와 생활용품이 주를 이루지만 의상, 집, 라이프스타일에 관련한 전반적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다. 나무 그릇은 그릇 욕심이 많은 조수정 씨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으로, 쇼룸을 통해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컵과 볼, 접시 등을만날 수 있다.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나무와 흙의 모습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품고 있어요. 따라서 밥과 나물, 반찬의 온도까지 제대로 품어줘요.” 마치 하나의 캠페인처럼 실생활에서, 책에서 디자인으로 나무 그릇과 질그릇 예찬론을 진득하게 펼친다.


1 2층 주거 공간의 주방은 패브릭 작업실로 꾸몄다. 내추럴한 감성을 자아내는 선반장은 모두 직접 디자인한 것.
2 하나로 트인 공간은 낮은 책장을 파티션 삼아 부부 공간과 율이의 공간으로 나눴다.


나는 듯 마는 듯한 향기, 율이네 집 “저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오히려 종이로 만드는 태그나 쇼핑백 등 옷 이외의 부수적인 것을 디자인하거나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누구도 곁을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제 눈에는 예쁘게 보였거든요.” 어린 시절 호호 불어 먹던 따뜻한 군고구마의 향을 그리워하고, 오래되고 낡은 것, 수수한 것의 아름다움에 일찍이 눈뜬 그녀는 효자동 시절 길에서 주워오는 물건들로 컬렉션을 만들 정도였다. 버려진 창틀을 잘 닦아서 테이블 상판으로 활용하거나, 침대 위 벽면에 걸어 장식하면 멋진 나만의 소품이 된다. “요즘은 인테리어든 삶의 방식이든 내추럴함을 많이 강조하지만, 유행이라는 틀 속에서 그 본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막상 구입하려고 상품들을 찾아보면 내추럴하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비싸거나 꾸며진 느낌이 강하죠.”
사실 생활 주변 곳곳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하나 멋스럽지 않은 것이 없단다. 실제 임시로 거처를 마련한 같은 건물 안 율이네 집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아이템으로만 꾸몄다. 자작나무 합판으로 맞춘 전면 붙박이장 위에는 재래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 채반과 소쿠리를 조르르 올려두었는데, 얼마나 소박한 멋이 나는지모른다. 앉은뱅이책상, 파티션처럼 낮은 목재 책상도 눈에 띈다. “아이 눈높이의 물건이 많은 공간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조수정씨는 도심 속이지만 집만은 편안한 감성을 담고자 나무 가구와 채광을 은은하게 투영해주는 하얀 리넨 패브릭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 칸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볼 것이 생겨나고 이야깃거리가 많은 이 집은 우리가 잊고 지낸 평범한 것들이 조금은 특별해 보이는 기술을 잘 담고 있다. 아이는 나고 자란 주변 환경을 평생 기억속에 간직하며 자랄 것이다. 아들 율이는 엄마 아빠감수성을 쏙 빼닮은 탓인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요즘, 가장 재미를 붙인 장난감이 헌종이 상자로 만든 집이다. 모아둔 재활용 상자로 이것저것 만들더니집 다섯 채를 붙여 완성한 거대한 종이 왕국을 앞마당에 펼쳐놓고 신나게 노는 아이. 리사이클링이 무엇인지, 그게 왜 좋은지도 모를 텐데 아이는 그저 온몸으로 즐기며 받아들이고 있다. 대나무밭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부부의 유전자 합작품이자 감성 디자인의 실체는 바로 아들 ‘율’인 셈이다.

3 정갈한 멋을 내는 도자기.


1 역시 가족은 함께할 때 가장 환한 표정을 짓는다.
2 빈티지 카메라와 라디오는 선반, 테이블 등을 꾸미기 좋은 소품.


그래, 조금씩 천천히 집과 일터가 함께 있는 것은 장점도, 단점도종이 한 장 차이다. 효율적인 시간 배분만 생각하면 좋겠다 싶지만, 심정적으로는 24시간 일의 연장선상이다. 마음먹고 사무실에서 집으로 ‘퇴근한다’ 해도 한 공간에 있으니 사무실이, 카페가 궁금해 결국 다시 내려가기 일쑤인 탓이다. 그래도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아빠가 있기에 이 가족은 행복하다. 아빠는 요리가 예술의 종착지라 믿는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재료, 먹을 사람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만드는 요리,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마음.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어우러진 가장 아름다운 종합예술 아닌가. 작은 공책부터 목기, 음식까지 모두 감성을 담아야 행복하다는 진리. 바로 이것이 스프링 컴 페인 폴이 품고 있는 매력이 아닐까. 마치 어린 시절 쓰던 공책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문구디자인을 선보이는 부부는 무엇보다 사람과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결국 디자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감정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 분주하게 지내온 지난 세월을 찬찬히 돌아보며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이 부부. 겉멋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내실과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들에게, 지금 세 번째 시즌이 펼쳐졌다.

3 한옥에 살며 가구를 모두 작은 것으로 바꿨다. 심플한 목가구는 목공사 때 쉽게 맞춤 제작할 수 있다.

이지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