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단장을 마친 영빈관 내정. 중앙에 있던 분수를 없애고 공간을 확보해 내정에서도 야외 연회를 진행할 수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찾는다면? 요즘 같으면 대사관이나 청와대 영빈관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1967년부터 1973년 사이에는 현재의 서울 신라 호텔 영빈관에서 국빈을 맞이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건립된 영빈관은 쟁쟁한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1973년부터 호텔 신라에 매각되어 일반인을 위한 연회장으로 개방되었다. 뿐만 아니라 스티븐 호킹 박사나 엘빈 토플러 박사 등 세계적 석학이 내한했을 당시에는 영빈관에서 인터뷰를 했고, 유럽의 왕족이나 세계적인 CEO 등은 영빈관에서 만찬을 열어 기자단의 눈과 입을 통해 한국 호텔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전했다.
이렇듯 영빈관은 지난 43년 동안 국내외 귀빈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역사적 공간이자 ‘문화재급 건축물’로 손꼽히면서, 앞으로 100년을 내다볼 준비를 시작했다. 전통의 향취는 살리면서 현대적 미니멀리즘을 가미한 디자인으로 리뉴얼을 추진한 것이다. 서울 신라 호텔 기획팀은 2006년 로비와 레스토랑 리뉴얼을 담당한 피터 리미디우스를 초청해 영빈관 리뉴얼을 논의했다. 피터 리미디우스는 그랜드 하얏트 도쿄, 뉴욕 포시즌스 호텔, 홍콩의 랜드마크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등을 작업한 세계적 호텔 전문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도무지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결과물의 스타일이 저마다 달라, ‘호텔의 정체성을 가장 잘 살리는 디자이너’로 손꼽히고 있다. “발자국을 찍어놓는 듯한 ‘디자이너의 시그너처 스타일’에는 관심이 없다”라는 피터 리미디우스는 이번에도 영빈관을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사실 영빈관 리뉴얼은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제 철학 중 하나가 건축물의 외형과 내부 디자인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인데, 화려한 오방색 단청, 곡선이 유려한 처마 등 멋진 외관이 내부와 어떤 통일성으로 연결될 것인가가 관건이었지요.” 가령 카펫에는 전통 문양을 응용한 패턴을 담았고, 한옥 창살의 격자무늬를 응용해 창과 벽면의 무늬를 디자인했다. 전통적 공간이지만 전통을 재해석해 컨템퍼러리한 디자인, 다른 세대가 오래도록 공존할 수 있는 느낌을 담았다.
1 피터 리미디우스가 가장 애착을 갖는다는 계단. “어느 디자이너에게나 계단 디자인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라는 그는 영빈관의 계단에 ‘재미와 자연’ 요소를 더하기 위해 물 위에 떠 있는 ‘플로팅’ 콘셉트로 만들었다. 2 영빈관 루비홀 전경. 3 전통 창살을 응용한 심플하고도 모던한 덧문을 달아 자연광을 내부에 끌어들였다. 4 세계적 호텔 디자인을 맡아온 피터 리미디우스. 최소 한 달 정도 그 나라의 건축과 문화를 체험하는 게 창의력의 비결이다.
이렇듯 피터 리미디우스는 한국 건축에 대한 이해가 상당했는데, 이는 그가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현지 전통 건축물을 꼼꼼히 답사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호텔 측의 집념과 열정 또한 한국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계기입니다.” 2006년 서울 신라 호텔 리뉴얼을 맡은 당시 호텔의 배려로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와 함께 창경궁, 비원 등 우리나라의 대표 건축물을 돌아봤다. 한국・중국・일본 건축 양식의 각기 다른 특색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그는 한국 건축물의 여유로운 곡선과 따뜻한 질감을 사랑한다고. “영빈관은 요즘 건축가들이 고민하는 이슈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건물입니다. 전통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식 있는 사회단체들의 강력한 요구에 맞춰 건축가들도 오래된 건물이 더욱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거든요. 그 방법은 다양한데, 호텔 측과 제가 영빈관 내부를 리뉴얼할 때 염두에 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연과의 조우, 둘째는 단순함입니다.” 그는 자연의 요소가 공간에 많을수록 사람이 평온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영빈관 에메랄드홀로 올라가는 계단을 물에 떠 있는 듯한 ‘플로팅’ 콘셉트로 디자인해서, 잔잔한 물이 지니는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한 영빈관 건물 전체에 한옥 창문의 격자무늬를 응용한 모던한 접이식 문을 설치해 은은한 자연광을 내부에 끌어들였다. 또 다른 키워드인 ‘단순함’은 피터 리미디우스 디자인의 가장 기본 철학이기도 하다. “심플함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단순하기 때문에 순진무구하고, 그래서 외부의 모든 자극에 생동감 있게 반응합니다. 어른이 되면 생각이 번다해져서 행복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공간 디자인은 절제할수록 좋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자기 내부에 침잠한 고유한 감수성과 철학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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