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정에 올라 바라본 ‘평창제색도’의 야경. 북한산국립공원의 평창 매표소가 100m 거리도 안 되지만 인적과 출입과 시선이 완벽하게 차단된 요새 같은 집이다. 2007년 가을 설계를 시작해 2009년 4월 완공, 연면적은 294.36m2이다.
북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평창동. 이러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굽이진 능선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마치 북한산 자락의 커다란 바위가 굴러떨어져 자리를 잡은 것 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나온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처럼 산등성이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것이 콘셉트라는 이 건물은 기울어진 콘크리트 외벽과 번갯불 모양의 창문이 인상적이다. 건축주는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7~8년 전부터 부지를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같은 능선에서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대지는 남쪽으로는 북악산 자락이 내려다보이고, 뒤쪽으로는 북한산 골짜기의 바위 언덕과 계곡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집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뒤쪽의 북한산 골짜기를 개인 정원으로 품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1층에 위치한 주방 겸 거실. 싱크대의 기울어진 측면 디테일이 돋보인다.
트임과 열림 그리고 뒤틀림, 공간의 고정관념을 깨다 오랜 외국 생활과 여행을 좋아하는 건축주 덕분에 건축가에게는 ‘집 같지 않은 집’이라는 숙제가 던져졌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 마성호 씨는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털어내기 위해 남향인 도로 면으로는 가짜 창을 내고, 욕실에는 문을 달지 않았으며, 집 안 곳곳에 정확하게 각을 계산하여 설치한 유리와 거울로 자연을 품었다. 또 벽면 역시 ‘이래야 한다’는 틀을 깨고 벽이 가구로, 공간의 활력소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까지 생각했다. “외부에서 보면 건물은 위험스럽게 도로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하부 지하 쪽의 실내 공간은 좁고, 상층부 옥상 쪽의 평면이 넓게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지요. 고도 제한이 있는 규정을 감안할 때, 용적률 활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말 빵점짜리 설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신 반층으로 층간 구분을 해 공간 활용도를 높이고, 가구를 최소화하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입체적인 벽면으로 공간에 악센트를 주고자 했지요.” 마성호 씨가 이야기하는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상식을 벗어난 의외성이다. 남쪽을 바라보는 도로 면을 막고 후정을 오픈한 것은 건축주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 것.
2 내부 마감재는 주로 자작나무를 활용. 투박하고 자연스러운 나무, 따뜻한 금속 패널의 재료가 저마다 다른 무게감으로 배치되어 있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조명이 공간에 임팩트를 더해준다.
3 이 집의 벽은 온통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다소 공격적이고 차갑고 자극적인 공간을 연출해주는 요소이다.
4 건축주 던칸 킴 씨(왼쪽)와 건축가 마성호 씨.
5 2층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바라본 1층과 2층의 모습.
“집의 방향을 이토록 중시하는 문화는 극히 소수입니다. 역할이나 효과에 따라서 서향이나 북향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축주 던칸 킴 씨는 도로 쪽 창을 최소화하여 프라이버시를 보호받고 싶었고, 집 앞을 오가는 이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었단다. 옥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면 사실상 남향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의 대부분은 얻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이 집은 북한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았을때 작은 드레스룸을 제외하고 주방, 침실은 물론 화장실까지 모든 공간이 오픈되어 있다. 침실, 서재 등 각 공간은 벽으로 둘러싸인 방이 아닌 층으로 분리되어 있다. 1층과 2층 사이에 중층을 만들어 층의 구분을 모호하게 했고, 모든 공간이 서로 맞물리며 오픈되어 있는 구조다. 외부 콘크리트 벽체의 한쪽 모서리 부분을 날카롭게 재단하여 외부 계단을 설치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확 트인 주방과 거실을 만나게 된다. 주방 옆 데크로 나가면 산등성이의 커다란 바위들이 바로 코앞에 펼쳐진다. 반층을 올라간 중층은 거실 개념의 공간으로 간소한 가구를 배치했다. 거실에서 반층을 더 올라간 2층에는 침실이, 침실에서 또 한 번 계단을 오르면 사방으로 열려 있는 옥상 데크가 있다. 이처럼 반층으로 공간을 나눈 것은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어느 위치에서든 건축주가 후정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또 이 집은 온통 기울어져 있다. 외부에서 시작된 기울어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영향을 주면서 내부 공간을 비틀어놓았다. 단순히 한 면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기울어지고 또 틀어진다. 천창으로 빛이 들어오면 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어 한층 다이내믹한 공간을 완성한다.
1 암석 바위를 품은 이 집의 누드 화장실.
2 옥상 층에서 2층 침실을 내려다본 전경.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 튠 플래닝의 김석 소장은
계단이 최대한 가볍게 떠 있는 느낌을 주려 했다. 계단 아래 화강암은 다양한 컬렉션의 공간.
내부 디자인을 맡은 튠 플래닝의 김석 소장은 외벽 노출 콘크리트는 정으로 일일이 다듬어 표면에 텍스처를 부여했다. 건축주가 마감재 선택에서 특별히 무게를 둔 것은 기능보다 미적 효과와 내구성. 사실 휴대폰이 없었을 때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기능의 대부분은 문명의 발달로 인한 습관인 경우가 많다. 평생 함께할 집이기에 내구성이 중요했으며, 이에 튼튼한 콘크리트로 마감하고 블랙 콘크리트를 기둥처럼 사용해 디자인적 가치를 더했다. 가구 역시 모두 맞춤 제작한 것. 직접 아이디어를 내어 만드는 가구는 비용이 네다섯배는 더 들고 기능은 오히려 떨어지기도 하지만 재미와 의미, 멋을 부여하고 싶었으니 결과는 어느 정도 만족한다. 이처럼 특이한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것은 바로 건축가와 건축주, 디자이너까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건축가 마성호 씨와 건축주 던칸 킴 씨는 30년 지기 죽마고우. 그러나 어쨌든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기에 마성호 씨는 기능적인 부분까지 면밀히 체크했다. “자연을 들이기 위해 북쪽으로 창을 내고, 이면 도로와 맞닿은 남쪽 벽체는 프라이버시를 위해 회색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놓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효율적인 난방이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전기 난방입니다.” 가스 난방에비해 초기 설치비는 좀 비싸지만, 계산을 해보니 한 2년이면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경제적이라 판단되어 전기보일러를설치했다. 또 콘크리트 외벽 두께를 5cm 정도 더 두껍게 하고, 문과 문 사이의 틈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부분 통창이나 쪽창을 이용했다. 모두 175mm 두께의 특수 제작 유리를 사용했다.
3 모든 것이 오픈된 이 집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 2층 침실 모습. 침대 윗면에 달린 거울을 통해 천장 쪽창 너머로 북한산 형제봉을 바라볼 수 있다. 침실은 인피니티 자동차 광고, 신한금융 등 각종 TV CF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자연이 선사하는 가장 위대한 감동 “침대에 누워 있으면 꺾여 있는 천장 거울을 통해 북한산의 형제봉을 바라볼 수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만나는 가장 큰 감동이지요.”
지난겨울을 나면서 비로소 이 집의 사계절을 모두 경험했다는 건축주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4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는 특히 야생화가 예쁜데, 그때가 되면 사실 주변 경관이 그림 같아 건축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후정은 꿩, 청솔모, 다람쥐, 도롱뇽, 오소리가 봄부터 가을까지 뛰놀아 마치 자연 동물원 같다. 겨울에는 우두둑내려앉는 눈송이에, 거목이 부러지는 소리에 잠을 깨곤 한다. 이 집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네 가지라고 건축주는 말한다. 빛, 바람, 소리, 향기. 여기에 그림자와 촉감, 반사광까지 들이면 집은 사람이나 물건이 많지 않아도 그 안에 풍성한 스토리를 품을 수 있다고. 건축주는 집은 잠자는 곳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 또한 강조한다. “주택 안에 레저 기능이 포함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라이프스타일을 감안하여 주거 공간에 휴식과 취미 기능을 더했지요.” 옥상 데크에는 저쿠지와 사우나 시설을 들이고 아직 미완성인 지하 공간은 미술품 컬렉션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 손님 초대를 많이 하는 건축주는 곧 게스트하우스도 지을 계획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인공의 그 무엇도 다 채울 수 없는 큰 감동을 준다. 가구가 많지 않아도,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아도 집이 풍성해 보이는 것은 바로 자연을 집 안에 들였기 때문이리라. ‘평창제색도’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무뎌지지 않는 주택으로 계속 남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건축가 마성호 씨가 붙인 이름이다. 색이 빠진 담채화 기법의 ‘인왕제색도’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 사계절 한결같이 담담한 빛깔을 띠는 바위들과 하나처럼 어우러지는 집을 보니 그 이름이 왜 ‘평창제색도’인지 알 것 같다.
건축가 마성호 씨는 (주)엠파건축사사무소 대표. 성균관대학교 건축학사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건축학부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서울 창포원 비지터 센터, 성모자애복지관, 압구정 노인복지관, 양평 개인 주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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