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백자의 백미, 달항아리는 시공을 초월해 어느 장소에 가져다 놓아도 조화를 이루는, 평범한 듯 비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형태의 완벽성을 추구한 중국 도자기나 장식성을 강조한 일본 도자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어느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겸손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지닌 백자 달항아리. 한옥의 뒤뜰, 빈티지 가구로 꾸민 거실, 모던한 사무실 등 공간과 스타일을 달리해도 언제나 조화롭게 빛을 발하는 달항아리를, 현대 작가 7인의 작품으로 만나봅니다.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는 1935년 달항아리를 구입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했다지요. 책장을 넘기며 여러분도 정월 대보름달처럼 휘영청 밝은 달항아리가 전하는 행복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달항아리에 대한 감상과 평가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세련된 형태와 화려한 색채로 대변되는 중국과 일본 도자 미학에 익숙한 탓에 자연미를 존중한 달항아리가 주목받지 못한 것이다. 이렇듯 외면받았던 달항아리의 미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 힘쓴 이가 있으니 바로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다. 성북동 최순우 옛집 뒷뜰에 가면 그의 표현대로 “어리숭하고 순진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달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왼쪽) 달항아리는 예술가들에게 미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소재로 자리잡았다. 달항아리를 즐겨 그리며 달항아리를 수집하기도 했던 김환기 화백과 도상봉 화백뿐 아니라 사진가 구본창 씨, 서양화가 강익중 씨 등 수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의 미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목판에 새긴 달항아리 작품과 원색적인 하이글로시 가구, 독특한 디자인의 세라믹 오브제가 ‘의외성’을 드러내며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목판에 새긴 달항아리 그림은 김덕용 씨 작품. 문의 이화익 갤러리 02-730-7818.
가구와 세라믹 오브제, 거울은 모두 하이메 아욘 디자인으로 AA 디자인 뮤지엄에서 판매.
(오른쪽) 달항아리는 도예가 신경균 씨 작품으로 보는 방향에 따라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반달에서 초승달로 그 얼굴을 달리한다. 그 옛날 조선의 도공이 빚은 달항아리가 방향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풍부한 양감을 보여주었던 것에 착안, 이를 유약의 변화로 각색해 표현했다. 문의 장안요 051-727-8216
달항아리 이야기
원에 가까운 형태가 둥근 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닥에 닿는 굽이 입보다 작아 달이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달항아리. 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와 분원 가마에서 만들어낸 백자 달항아리는 세계 도자 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둥근 항아리로 손꼽히고 있다. 높이 33cm에 이르는 중호도 만들 수 없는 수동식 물레(젖은 태토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로 높이 40cm가 넘는 항아리를 빚어냈으니 말이다.
조선의 도공은 이러한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큰 사발 두 개를 포개어 크고 둥근 항아리를 빚어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꾸밈이 없어 더 아름다운 조선의 백자, 더 나아가 한국미의 극치로 손꼽히는
백자 달항아리의 미학은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조선 왕조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화 中華에 대한 회의와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기 시작한다.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향점이었던 명나라가 멸망하고 지금껏 오랑캐로 천시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이 되어버리자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이들이 찾아낸 답은 ‘중국은 우리다, 조선이 중국이다’였다. 중국이 우리라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
이에 점차 우리 것과 우리의 생활 미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우리 생활 주변 이야기나 자연의 풀벌레 같은 것들이 문학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춘향전>과 <흥부가> 같은 소설, 판소리, 민화 등도 이때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때는 공재 윤두서와 표암 강세황, 진경산수를 대성한 겸재 정선이 활동한 시대였다. 즉 18세기 영·정조가 재위하며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에 백자 달항아리가 등장한다. 당시 중국은 청화 백자 위에 삼채, 오채, 칠채로 화려한 채색 자기를 만들고 일본은 이를 따라 채색 자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오랑캐 짓이라 여긴 조선은 그 반대급부로 날렵한 성형이나 요란한 기교 없이 자연미로 가득 찬 순백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그 예술>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시대가 내려오면 기교가 복잡을 더하는데 그 예외를 찾을 수 있으니 바로 조선의 도자기 공예다.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단순으로의 복귀”라고 표현했다.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는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과 예술성을 바탕으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탄생한 조선 문화의 백미인 것이다.
둥근 항아리, 넘어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과장이 아니라 나로선 미의 개안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
둥근 항아리, 넘어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는 아직도 아직도 조형의 전위에 서 있지 않을까.
_ 수화 김환기 선생의‘항아리’ 중
서울의 한옥 사랑방, 뉴욕 초고층 빌딩의 사무실 장식장, 런던 교외 별장의 벽난로 옆 등 어느 시각, 세계 어느 장소에 놓여있는 달항아리를 상상해도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복잡한 업무와 서류가 몰려드는 사무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바라보면 욕심 없고 맑은 달항아리의 품성이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평온해진다. 책상 위의 달항아리는 도예가 박영숙 씨 작품으로 높이 60cm가 넘는 대작이다. 화가 이우환 씨가 “18세기 조선 백자가 옛 여인이라면 박영숙의 달항아리는 현대 여인”이라 비유한 것처럼 순백색의 단아한 자태가 18세기 조선 백자와는 또 다른 21세기 백자의 매력을 보여준다. 문의 아뜨리에 서울 02-730-7837
잘생긴 며느리 같은 달항아리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낸 백자 항아리의
흰 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 둥근 맛 (중략)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어리숭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하면
혹시 심미에 대한 건강한 태도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선 자기의
아름다움은 계산을 초월한 이러한 설명이 필요하리만큼 신기롭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에
틀림없다. (중략) 중국의 항아리처럼 거만스럽다거나 일본 항아리처럼 신경질적인 데가 없는
우리 조선의 항아리 (중략) 백자 항아리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흰 바탕색과 어우러져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중략) 욕심 없이 어질고 순종적이며 의젓해 잘생긴 며느리 같다.
_ 혜곡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
(왼쪽) 봄이면 개나리꽃 한 무더기, 가을이면 국화 한 다발 담아 화병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그저 무심하게 거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아도 더없이 멋스러운 달항아리. 질감이 살아있는 달항아리의 순박한 맛이 북유럽 빈티지 가구의 소박한 멋과 조화를 이룬다. 달항아리는 도예가 신경균 씨 작품으로 양구 백토(조선시대부터 백자 제작에 사용한 강원도 양구 지역의 백토)에서 철분 등 불순물을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거친 질감과 자연적인 색감을 살렸다. 문의 장안요 051-727-8216. 가구는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에서 판매.
(오른쪽) 흰 돌을 갈아 만든 백토를 사용하는 중국 등과 달리 조선은 산에서 채취한 백토에서 불순물을 거르고 정제해서 백자를 만들었다. 중국이나 일본 백자의 창백한 흰색과 달리 조선 백자가 온화하고 풍부한 백색을 품은 이유다. 특히 조선 중기 달항아리의 색은 조선 전기의 순백색이 아니며 조선 후기 분원에서 만들어진
청백색도 아니다. 완벽함을 지향한 흰색이 아닌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흰색인 것이다. 유백색을 기본으로 하지만 어느 때는 붉은색을 띤 산화된 흰색이고, 어느 때는 사람의 손을 타서 물들고 색이 스며 번진 것도 있다. 불완전 연소나 과잉 연소로 인한 백색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발색은 그야말로 천변만화한 흰색이다. 백자 달항아리와 청자 달항아리 모두 도예가 이은범 씨 작품.
문의 정소영의 식기장 02-541-6480
조선 백자의 백미, 백자대호 白磁大壺
조선 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 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은 둥글지 않고, 면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를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조선 백자에는 허식이 없고 /산수와 같은 자연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운 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 白衣의 민 民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 古今未有의 한국의 미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_삼불 김원용 선생 작 ‘백자대호’
(왼쪽) 미니멀한 현대식 공간에서 백자 달항아리의 담백하면서도 풍요로운 감성이 빛을 발한다. 조선의 백자와 현대의 미니멀리즘은 역사적·지역적 배경을 달리하지만 군더더기나 허세가 없는 것이 그 미학적 근본은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항아리는 조선 백자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를 제작하던 분원 가마에서 작업하고 있는 도예가 권대섭 씨 작품. 문의 갤러리 서미 02-511-7305. 벽에 걸린 작품은 서양화가 구자현 씨 작품으로 이엔에스 E&S에서 전시 중이다. 티크 원목 테이블은 이엔에스 제품.
(오른쪽) 조선 전기와 후기 항아리와 달리 중기의 달항아리는 상하 몸체의 크기나 모양이 미묘하게 어긋나 둘을 접합하는 단계에서 이미 균형이 깨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항아리 모양은 일그러지고 뒤틀려 배 부분이 둥글지 않다. 그러나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달라 하나의 항아리임에도 열 개의 항아리를 보는 듯하다.18세기 백자 달항아리의 부정형이 보여주는 풍부한 양감을 정밀 묘사로 표현한 그림은 고영훈 씨 작품.
문의 가나아트갤러리 02-720-1020, 장소는 AA 디자인 뮤지엄.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달항아리에 대한 감상과 평가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세련된 형태와 화려한 색채로 대변되는 중국과 일본 도자 미학에 익숙한 탓에 자연미를 존중한 달항아리가 주목받지 못한 것이다. 이렇듯 외면받았던 달항아리의 미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 힘쓴 이가 있으니 바로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다. 성북동 최순우 옛집 뒷뜰에 가면 그의 표현대로 “어리숭하고 순진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달항아리를 만날 수 있다.
(왼쪽) 달항아리는 예술가들에게 미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소재로 자리잡았다. 달항아리를 즐겨 그리며 달항아리를 수집하기도 했던 김환기 화백과 도상봉 화백뿐 아니라 사진가 구본창 씨, 서양화가 강익중 씨 등 수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의 미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목판에 새긴 달항아리 작품과 원색적인 하이글로시 가구, 독특한 디자인의 세라믹 오브제가 ‘의외성’을 드러내며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목판에 새긴 달항아리 그림은 김덕용 씨 작품. 문의 이화익 갤러리 02-730-7818.
가구와 세라믹 오브제, 거울은 모두 하이메 아욘 디자인으로 AA 디자인 뮤지엄에서 판매.
(오른쪽) 달항아리는 도예가 신경균 씨 작품으로 보는 방향에 따라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반달에서 초승달로 그 얼굴을 달리한다. 그 옛날 조선의 도공이 빚은 달항아리가 방향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풍부한 양감을 보여주었던 것에 착안, 이를 유약의 변화로 각색해 표현했다. 문의 장안요 051-727-8216
달항아리 이야기
원에 가까운 형태가 둥근 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닥에 닿는 굽이 입보다 작아 달이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달항아리. 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와 분원 가마에서 만들어낸 백자 달항아리는 세계 도자 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둥근 항아리로 손꼽히고 있다. 높이 33cm에 이르는 중호도 만들 수 없는 수동식 물레(젖은 태토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로 높이 40cm가 넘는 항아리를 빚어냈으니 말이다.
조선의 도공은 이러한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큰 사발 두 개를 포개어 크고 둥근 항아리를 빚어내는 지혜를 발휘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꾸밈이 없어 더 아름다운 조선의 백자, 더 나아가 한국미의 극치로 손꼽히는
백자 달항아리의 미학은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 조선 왕조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화 中華에 대한 회의와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기 시작한다.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향점이었던 명나라가 멸망하고 지금껏 오랑캐로 천시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이 되어버리자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이들이 찾아낸 답은 ‘중국은 우리다, 조선이 중국이다’였다. 중국이 우리라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
이에 점차 우리 것과 우리의 생활 미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우리 생활 주변 이야기나 자연의 풀벌레 같은 것들이 문학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춘향전>과 <흥부가> 같은 소설, 판소리, 민화 등도 이때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때는 공재 윤두서와 표암 강세황, 진경산수를 대성한 겸재 정선이 활동한 시대였다. 즉 18세기 영·정조가 재위하며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에 백자 달항아리가 등장한다. 당시 중국은 청화 백자 위에 삼채, 오채, 칠채로 화려한 채색 자기를 만들고 일본은 이를 따라 채색 자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오랑캐 짓이라 여긴 조선은 그 반대급부로 날렵한 성형이나 요란한 기교 없이 자연미로 가득 찬 순백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그 예술>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시대가 내려오면 기교가 복잡을 더하는데 그 예외를 찾을 수 있으니 바로 조선의 도자기 공예다.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단순으로의 복귀”라고 표현했다.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는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과 예술성을 바탕으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탄생한 조선 문화의 백미인 것이다.
둥근 항아리, 넘어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싸늘한 사기지만 그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과장이 아니라 나로선 미의 개안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한다.
둥근 항아리, 넘어 넘치는 희고 둥근 항아리는 아직도 아직도 조형의 전위에 서 있지 않을까.
_ 수화 김환기 선생의‘항아리’ 중
서울의 한옥 사랑방, 뉴욕 초고층 빌딩의 사무실 장식장, 런던 교외 별장의 벽난로 옆 등 어느 시각, 세계 어느 장소에 놓여있는 달항아리를 상상해도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복잡한 업무와 서류가 몰려드는 사무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바라보면 욕심 없고 맑은 달항아리의 품성이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평온해진다. 책상 위의 달항아리는 도예가 박영숙 씨 작품으로 높이 60cm가 넘는 대작이다. 화가 이우환 씨가 “18세기 조선 백자가 옛 여인이라면 박영숙의 달항아리는 현대 여인”이라 비유한 것처럼 순백색의 단아한 자태가 18세기 조선 백자와는 또 다른 21세기 백자의 매력을 보여준다. 문의 아뜨리에 서울 02-730-7837
잘생긴 며느리 같은 달항아리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낸 백자 항아리의
흰 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 둥근 맛 (중략)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어리숭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 하면
혹시 심미에 대한 건강한 태도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선 자기의
아름다움은 계산을 초월한 이러한 설명이 필요하리만큼 신기롭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에
틀림없다. (중략) 중국의 항아리처럼 거만스럽다거나 일본 항아리처럼 신경질적인 데가 없는
우리 조선의 항아리 (중략) 백자 항아리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흰 바탕색과 어우러져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중략) 욕심 없이 어질고 순종적이며 의젓해 잘생긴 며느리 같다.
_ 혜곡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
(왼쪽) 봄이면 개나리꽃 한 무더기, 가을이면 국화 한 다발 담아 화병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그저 무심하게 거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아도 더없이 멋스러운 달항아리. 질감이 살아있는 달항아리의 순박한 맛이 북유럽 빈티지 가구의 소박한 멋과 조화를 이룬다. 달항아리는 도예가 신경균 씨 작품으로 양구 백토(조선시대부터 백자 제작에 사용한 강원도 양구 지역의 백토)에서 철분 등 불순물을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거친 질감과 자연적인 색감을 살렸다. 문의 장안요 051-727-8216. 가구는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에서 판매.
(오른쪽) 흰 돌을 갈아 만든 백토를 사용하는 중국 등과 달리 조선은 산에서 채취한 백토에서 불순물을 거르고 정제해서 백자를 만들었다. 중국이나 일본 백자의 창백한 흰색과 달리 조선 백자가 온화하고 풍부한 백색을 품은 이유다. 특히 조선 중기 달항아리의 색은 조선 전기의 순백색이 아니며 조선 후기 분원에서 만들어진
청백색도 아니다. 완벽함을 지향한 흰색이 아닌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흰색인 것이다. 유백색을 기본으로 하지만 어느 때는 붉은색을 띤 산화된 흰색이고, 어느 때는 사람의 손을 타서 물들고 색이 스며 번진 것도 있다. 불완전 연소나 과잉 연소로 인한 백색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발색은 그야말로 천변만화한 흰색이다. 백자 달항아리와 청자 달항아리 모두 도예가 이은범 씨 작품.
문의 정소영의 식기장 02-541-6480
조선 백자의 백미, 백자대호 白磁大壺
조선 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 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은 둥글지 않고, 면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를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조선 백자에는 허식이 없고 /산수와 같은 자연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운 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 白衣의 민 民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 古今未有의 한국의 미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_삼불 김원용 선생 작 ‘백자대호’
(왼쪽) 미니멀한 현대식 공간에서 백자 달항아리의 담백하면서도 풍요로운 감성이 빛을 발한다. 조선의 백자와 현대의 미니멀리즘은 역사적·지역적 배경을 달리하지만 군더더기나 허세가 없는 것이 그 미학적 근본은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항아리는 조선 백자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를 제작하던 분원 가마에서 작업하고 있는 도예가 권대섭 씨 작품. 문의 갤러리 서미 02-511-7305. 벽에 걸린 작품은 서양화가 구자현 씨 작품으로 이엔에스 E&S에서 전시 중이다. 티크 원목 테이블은 이엔에스 제품.
(오른쪽) 조선 전기와 후기 항아리와 달리 중기의 달항아리는 상하 몸체의 크기나 모양이 미묘하게 어긋나 둘을 접합하는 단계에서 이미 균형이 깨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항아리 모양은 일그러지고 뒤틀려 배 부분이 둥글지 않다. 그러나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달라 하나의 항아리임에도 열 개의 항아리를 보는 듯하다.18세기 백자 달항아리의 부정형이 보여주는 풍부한 양감을 정밀 묘사로 표현한 그림은 고영훈 씨 작품.
문의 가나아트갤러리 02-720-1020, 장소는 AA 디자인 뮤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