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티이 성의 오말 도서관. <딕 베리 기도서>를 비롯한 3만여 권의 희귀 고서가 소장되어 있는 이 도서관은 곳곳에 오말 공작의 손때가 묻어 있다. 개인 도서관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으로도 꼽힌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라파엘로 Raffaello에 관한 책을 보다가 문득 라파엘로가 그린 ‘미의 세 여신 Les Trois gráces’이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라파엘로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바티칸 미술관일까? 작품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프랑스 땅에, 그것도 파리에서 멀지 않은 샹티이 성(Cháteau de Chantilly)에 소장되어 있었다. 이 정도 작품이라면 전시실 한가운데 방탄유리로 만든 유리관에 넣어 전시하고 포스터와 엽서를 제작해 크게 홍보해야 할 텐데 그림은 컬렉터의 사적인 소장품처럼 비밀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컬렉터의 작은 방에 초대받아 와인을 마시며 그의 작품을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샹티이가 어떤 박물관과도 다른 장소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길 가는 곳마다 라파엘로에 버금가는 화가들의 그림이 겹겹이, 층층이 걸려 있어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보티첼리, 푸생, 들라크루와, 앵그르, 필리포 리피, 피에로 디 코시모….
그런데 샹티이 성에는 이 작품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딕 베리의 기도서 (Les Tré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다. 15세기 랭부르 형제가 제작한 206쪽짜리 양피지 책으로 중세의 보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희귀본인데, 샹티이 성의 극장식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실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이 극장식 도서관은 웅대한 크기와 장대한 소장품 목록만으로도 전문가들의 기를 죽인다.미켈란젤로와 다빈치, 뒤러 등의 데생 2천5백 점과, 단 한 권만으로도 아파트 한 채는 너끈히 장만할 수 있는 희귀 고서가 3만 권 이상 책장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오말 공작의 유언에 따라 19세기 이후 한 번도 전시 형태가 변하지 않은 오말 공작의 그림 갤러리. 시대나 작가에 상관없이 사이즈에 따라 그림을 걸었던 19세기 전시 형태뿐 아니라 푸생, 라파엘로 같은 대가들의 그림이 한자리에 걸려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유럽 최고 귀족의 상속자, 오말
이런 곳이 어떻게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고서와 미술 작품, 가구, 보석을 비롯한 성 내부의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컬렉션이기 때문이다. 대체 한 사람이 이 모든 것들을 수집하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방대한 컬렉션을 남긴 사람은 오말 공작(Duc d’Aumale). 프랑스 역사에 도통한 사람조차도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잊혀진 대단한 컬렉터다. 그는 사후에 후세들이 작은 작품 하나도 자리를 옮겨 걸 수 없도록 철두철미한 유언을 남겼다.
오말 공작은 1830년부터 1848년 7월까지 프랑스 왕정 시대를 이끈 루이 필리프 오를레앙 공작(Louis Philippe, Duc d’Orléans)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를레앙 공작가는 루이 14세나 루이 15세의 부르봉 가문과는 삼촌 관계에 해당한다. 권력과 명예를 가진 데다 드넓은 사유지와 재산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문의 아들이니 부모를 잘 만나도 이보다 잘 만나기는 어렵다 싶을 정도다. 여기에 한술 더 떠 그는 콩데 Condé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콩데는 중세 시대부터 내려오는 프랑스의 대표적 대귀족 가문의 하나로 마지막 후손인 부르봉 공작은 오말의 대부이기도 한데, 자손이 없었기에 콩데라는 이름과 가문의 모든 재산을 대자인 오말에게 남겼다. 이로써 오말은 4세 때 이미 4백 개가 넘는 성, 프랑스 곳곳에 흩어진 60여 개의 영지, 6천6백만 금화 프랑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 시대 최고의 부자라는 빌 게이츠의 재산쯤은 가뿐히 넘어서는 규모다.
1 샹티이 성의 자랑은 단연코 극장식 도서관이다. 양쪽 날개를 펼친 듯 넓은 도서관이라 하여 ‘극장식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도서관에는 라파엘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데생과 고서가 보관되어 있다.
2 오말 공작은 콩데 가문이 가장 화려한 위세를 자랑하던 18세기의 성을 고스란히 복원하고자 애썼다. 장 바티스트 우드리의 벽화가 그려진 이 방 역시 18세기 콩데 가문의 살롱을 고스란히 복원한 것이다.
사실 이 정도 명예와 재산을 물려받은 후손이라면 언뜻 가정교사의 훈육 아래 곱상하게만 자란 까탈스러운 도련님이 연상되기 마련인데, 오말은 이런 이미지와는 사뭇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콜레주 드 앙리에서 공부를 마친 오말은 당시 일반 귀족 자녀들이 그러했듯이 군대에 지원했다. 오말은 며칠 동안 군복을 갈아입지 못하고도 태연할 정도로 수더분한 젊은이였다. 프랑스의 안온한 생활에 익숙한 다른 군인들은 유형지로 유명했던 알제리를 종종 지옥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그는 뜨거운 아프리카의 태양, 원색적인 색감, 소란스러운 연병장을 사랑했다. 전쟁은 그에게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어깨에 지워진 짐, 남들은 행운이라고 부르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억누를 정도로 무거운 의무이기도 한 콩데와 오를레앙이라는 가문의 이름에서 벗어나 오말이라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싸울 수 있는 자유를 선물했다.
유배 생활이 만든 장서광의 우아한 나날
그렇다면 케케묵은 양피지가 가득 찬 도서관이나 낡은 고서와 명화가 즐비한 박물관과는 어울리지 않을 성싶은 이 젊은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어떻게 하여 장서광으로 자처할 만큼 열광적인 고서 수집가이자 그림 컬렉터가 된 것일까? 그의 생을 통째로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오말이 26세가 되던 1848년이었다. 그해에 일어난 쿠데타로 아버지 루이 필리프가 실각하면서 오를레앙 가문은 프랑스 땅을 떠나라는 추방령을 받았다.
하루 사이에 파리에 5백 개의 바리케이드가 들어서는 격변의 와중에 오말을 비롯한 오를레앙가의 식솔들은 평소 가까웠던 영국 왕실의 도움을 받아 영국 트위컨햄 Twickenham에 자리를 잡았다. 추방이라고는 하지만 다행히 오말의 재산 대부분이 왕실 재산이 아닌 콩데 가문의 재산이었던 덕에 추방된 처지임에도 수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추방령은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를 지키는 장군으로 자신만만한 인생을 펼쳐나가던 26세의 청춘을 뿌리째 뽑아놓았다. 콩데와 오를레앙이라는 이름은 그를 정치적인 재물로 만들었고,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배를 거듭하는 위험인물이 됐다.
날개가 꺾인 젊은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입소문에 오를까 두려워 대외 활동을 줄이고 무엇을 하든 중개인을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다. 외부 출입을 삼가던 터라 콩데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에서 내려오던 고서들이 트위컨햄의 저택에 도착하면 상자를 열어 정리하면서 보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하루에 서너 권을 읽을 만큼 책에 매달린 오말이 장서 수집가가 되는 건 당연했다. 특히 그는 정치적인 격변으로 인해 미술 시장에 나오는 대귀족과 왕족들의 장서 수집품을 한꺼번에 사들였다. 그들은 대부분 그와 가깝게든 멀게든 인척 관계이다 보니 좋은 서적이나 예술 작품을 구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루이 14세의 재상인 콜베르와 마자랭이 남긴 서적 컬렉션, 버킹엄 공작의 서적 컬렉션, <딕 베리 기도서>가 그의 컬렉션이 된 데는 인척 관계인 이들이 쟁쟁한 컬렉터였기 때문이다.
3 젊은 오말 공작의 초상화. 오말은 군인으로서 알제리 전쟁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였다.
1 오말 공작이 거처했던 지하의 작은 살롱에는 초상화를 모아둔 방이 있다. 곱게 걸려 있는 작은 초상화들이 뿌리에 대한 그의 집착을 보여준다.
2 오말 공작의 그림 갤러리에는 그림뿐 아니라 도자기, 조각, 그리스 시대의 고고학 유물 등 다양한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 역시 오말 공작의 사후에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3 라파엘로 ‘오를레앙가의 성모와 미의 세 여신’, 필리포 리피의 작품이 전시된 방. 육면체 구조의 전시 공간이 신비스러움을 더한다.
4 보티첼리와 앵그르의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어 놀라움을 더하는 트리뷴은 육면체 모양의 전시 공간이다.그림들이 쏟아질 듯이 높이 걸려 있다.
뿌리 찾기의 시작, 그림 컬렉션
오말 공작을 그림에 대한 특유의 취향을 가진 컬렉터로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컬렉션은 그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의 유배 생활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서적과 고문서를 정리하면서 점차 역사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장장 일곱 권에 달하는 역사서 <콩데 가문의 역사>를 집필하면서 그는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초상화를 컬렉션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클루에 François Clouet가 그린 프랑스 왕실 인물들의 초상화 대부분이 샹티이 성에 보관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모두 비슷해 보여서 역사가들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초상화와 초상화가 붙어 있는 장식품을 모으는 데 집착한 그의 컬렉션을 보노라면 비감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뿌리를 부정당한 한 남자가 그 뿌리의 건재함을 확인하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오말의 서적과 그림 컬렉션은 곧 사교계를 비롯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 귀족들과 사교계 인사들, 학자들을 초대해 컬렉션에 대한 대화를 즐겨 나눈 오말은 보물을 혼자만 보는 비밀스러운 컬렉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인 활동을 박탈당한 그에게 컬렉션은 새로운 정체성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컬렉션으로 인해 그는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고, 정치라는 영역 바깥에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라파엘로, 보티첼리, 들라크루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림 컬렉션은 방대해졌고 대가의 그림이 골고루 들어간 종합 선물 세트처럼 되어갔다.
5 겨울을 맞은 샹티이 성 전경. 하단부를 제외하고 프랑스 혁명 이후 모조리 붕괴되었다. 오말 공작은 이 성을 18세기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면서 인생의 말년을 보냈다.
회한만 덩그러니 성을 지키고
1870년 오말은 영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모은 서적과 그림을 전시할 도서관과 갤러리를 만들고 18세기 샹티이 성을 그대로 재건한다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와 그의 부인은 선조의 영예와 자신의 명예를 상징하는 1층을 일부러 비워두고 반지하층이나 다름없는 공간에서 거주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실내 장식에서 조용하지만 우아한 그들의 생활이 느껴진다.
길이 남을 컬렉션을 남긴 오말의 마지막 생애가 행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말의 말년은 죽음과 상실의 연속이었다. 그의 두 아들은 21세와 1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 변화와 격동의 시기에 곁을 지켜준 부인 역시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떴다. 그의 나이 64세 때에는 두 번째 추방령을 받기도 했다. 샹티이 성을 재건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바쳤건만 추방령 앞에서 또다시 모든 걸 버려야만 했다.
자신의 컬렉션이 샹티이 성을 벗어날 수 없도록 한 오말의 유언은 그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콩데와 오를레앙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정치적 이유로 흩어지고 사라지게 될까 노심초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귀족과 왕족들의 컬렉션이 경매로 처분되는 걸 수없이 보아온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이 유언은 명예와 재산을 누렸지만, 또 그 명예와 재산 때문에 그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회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머물고 싶을 때 샹티이 성에 머물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죽어서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샹티이 성은 파리에서 기차로 27분, 시외선으로는 45분이 소요된다.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화요일은 휴무다. 자세한 정보는 03 44 27 31 80에 문의하거나 www.domainedechantilly.com을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