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 3천 리를 굽이굽이 내려온 산자락이 남쪽에 와서 그 장정을 마친 지점이 지리산이다. 그 지리산은 다시 다섯 자락으로 내려와 남쪽으로 가로지르는 섬진강과 조우한다.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그 여정을 멈추었다. 마치 왼손의 다섯 손가락 같은 형국으로 산자락이 내려왔는데, 엄지손가락에 해당하는 맥에 천은사가 자리 잡았고, 그다음에 화엄사, 문수사, 연곡사, 쌍계사가 자리하고 있다. 해주 오씨의 고택인 쌍산재는 화엄사와 문수사 자락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이 바로 사도리 沙圖里다. 동네 이름도 ‘모래로 그림을 그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리산 골짜기의 물길이 섬진강과 합해지면서 평평한 모래사장을 만들었고, 이 모래사장에서 천년 전에 한국 풍수지리의 원조인 도선국사 道詵國師가 풍수의 이치를 연마했다. 산과 냇물의 높고 낮음, 그리고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야 명당을 이루는지를 사도리에서 깨쳤던 것이다. 이 사도리에 유명한 샘물이 있다. 이름 하여 ‘당몰샘’이다. 천년 전부터 유명했던 샘물이다. 이 물을 먹으면 장수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건강식품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이 이 물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백 살 이쪽저쪽에 해당하는 장수 노인들이 사도리에 많았다. 장수의 이유는 당몰샘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현재 샘물 위에는 기와로 지붕이 덮여 있다. ‘천년고리 감로영천 千年古里 甘露靈泉’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다. ‘천년 된 오랜 동네에 있는 감로수와 같은 신비로운 샘물’은 쌍산재의 사랑채에 있던 우물이다. 이곳을 집터로 잡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우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좋은 물은 집터를 잡는 데에서 필수적인 항목이다. 일본에는 ‘품천가 品泉家’라는 직업도 있다고 한다. 샘물 맛을 품평하는 전문가를 지칭한다. 일종의 ‘소믈리에’다. 무색무미 無色無味가 좋은 물의 조건이다. 그래야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들도 이 샘물 맛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듣고 한국에 오면 이곳 당몰샘에 들러서 물을 몇 통씩 떠 간다고 집주인이 귀띔한다.
(위) 쌍산재는 밖에서 보면 그리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민가지만 대지 규모가 5천 평에 이르고 별채로 서당이 있는 큰 집이다.
서당채에서 입구를 바라본 풍경. 겹겹이 나무를 심어 공부하는 사람이 밖으로 주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했다.
백두대간 끝자락에 있으면서 앞으로는 섬진강을 바라보고 집 앞에는 천하의 명천 名泉을 두고 있는 쌍산재. 집 앞에 명천이 있는 집은 명택 名宅이 분명하다. 어떤 동네든 우물이 있으면 그 우물 바로 뒤나 위쪽으로 자리 잡은 집은 풍수적으로 명당에 해당한다. 이 우물이 기운을 뭉치게 해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는 터 앞에 있는 우물을 혈구 穴口라고 부른다. 혈의 입이다. 얼굴에 비유하자면 코 바로 밑에 터를 잡는데, 코밑에는 인중 人中이 있고 이 인중 밑으로 입이 있다. 우물은 입에 해당한다. 쌍산재는 대문 앞에서 바라보면 그 포용력을 알 수 없다. 이 집은 자신의 진면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문도 작다. 그러나 일단 집 안에 들어서면 달라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집이다. 전체 대지는 5천 평. 대문에 들어서면 대문 바로 옆에 남자들의 공간이었던 사랑채가 있고 그다음으로 안주인이 살림하던 살림채, 시집가기 전의 처녀들이 머물렀던 건너채가 있다. 대문 왼쪽으로 최근에 만든 응접실 겸 다실채가 하나 더 있다. 집의 규모도 소박하다. 위압감이 없다. 조선 평민의 집 규모이다. 다시 여기서 집 뒤로 넘어가는 돌계단 길이 있다. 대숲을 지나는 돌로 만든 계단을 20m쯤 통과하면 작은 동산이 나온다. 이 동산에는 고구마밭도 있고 목화밭 그리고 각종 채소밭도 있다. 대략 80m 정도를 통과하면 집 한 채가 다시 나타난다. 글을 읽는 서당채다. 서당채는 그 전면이 이중, 삼중의 나무로 둘러 싸여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수 있으나 그렇기에 방문객이 한눈에 이 서당채를 파악할 수 없다. 서당채 앞에 일부러 겹겹이 나무를 심어놓았다고 한다. 안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밖의 풍경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책을 읽으려면 정신 집중이 필요하고, 집중에는 바깥 풍경으로부터 일정한 차단이 필요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와 살림채, 건너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8백 석 농사를 지은 부농의 집이지만 소박하기 그지 없다. 식구들은 보리밥을 먹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일꾼들에게는 쌀밥을 먹였다고 한다.
1 쌍산재 대문 바로 옆에는 전국 10대 약수 중 하나인 당몰샘이 있다. 지리산의 약초 뿌리가 녹아 있는 물이라 전해진다.
2 서당채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영벽문이 나온다.이 문을 열면 바로 드넓은 저수지가 펼쳐진다.
나는 쌍산재의 구조적 특징은 이 서당채에 있다고 생각한다. <택리지> 에 보면 조선 선비들은 사는 집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별채나 별서 別墅를 갖는 것이 좋다고 나온다. 10리의 반절이 5리다.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30분 거리는 주거 공간과 떨어져 있음으로써 장점과 단점이 모두 발생한다. 장점은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격절감일 것이고 단점은 밥 먹기가 불편하다는 점이다. 별채에서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시설과 인원이 있다면 모를까, 이 시설이 없다면 하루 세끼 밥 먹는 문제는 생활에 큰 불편으로 다가올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밥’ 문제 해결이 쉬워야 한다. 내가 집과 승용차로 1시간 떨어진 곳에 휴휴산방을 지어놓고 생활하면서 피부로 실감한 것이다. 살림채와 100m 거리에 별채에 해당하는 서당이 있고, 그 중간을 통과하려면 작은 동산을 넘어야 한다. 이 정도 되면 서당은 본채와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공간이 달라야만 생각도 바뀐다. 생각이 바뀌어야만 업보 業報도 바뀐다. 역으로 업보가 바뀌지 않으면 공간을 바꿀 수 없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생각과 업보, 나아가서는 운명까지도 관계되는 부분이 바로 이 공간의 문제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공간을 전환해야 한다. 여행이 주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공간을 바꿔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불편함이 따른다. 원룸이 주는 매력은 모든 것이 방 하나에 다 있다는 점이다. 손만 뻗으면 닿는다. 쌍산재의 구조를 굳이 문자로 표현해본다면 ‘일이이 一而二’ 구조라고나 할까.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면서 둘이다. 둘이면서도 하나다. 공간의 격절과 생활의 편리를 모두 담아내기 위해 건축적으로 고려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더군다나 이 집은 밋밋한 평지에 있는 게 아니다.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에 있다는 점이 집의 내부 공간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작용을 한다.
1 대문 안에 해주 오씨 선조 4대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2 살림채에 붙박이 뒤주가 있다. 가난한 이웃의 보릿고개에 대비해 구휼미를 저장하던 곳이다.
이 집은 민가 民家다. 평민의 집이다. 조상이 높은 벼슬을 하거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의 집이 아니다. 평범하게 살았던 평민의 집. 7백~8백 석의 농사를 지었던 부농의 집이었다고 하면 정확하다. 그래서 집 자체는 장엄하지 않고 소박하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은 민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도리 일대는 해주 오씨의 집성촌이었다.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5백 년이 되었다고 한다. 오씨 조상들이 들이마시고 내쉰 호흡이 5백 년 동안 이 동네에 축적되어 있는 셈이다. 조상과 후손의 호흡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호흡이 서로 만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바로 안정감이다. 알 수 없는 편안함과 평화로움이 있다. 1천 년이 넘는 오래된 도시에 가면 느끼는 편안함이 시골의 오래된 집성촌에 가도 느껴진다. 그 안정감은 호흡에서 호흡으로 연결되는 연속성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데에서 오는 연속성이다.
쌍산재가 주는 안정감은 역대 이 집 주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적선과도 관련이 있다. 지역 사회에 대한 이 집의 배려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쌀뒤주’다. 안채의 왼쪽 옆구리에는 나무로 만든 뒤주가 고정되어 있다. 집을 지을 때부터 붙박이로 만들어놓았다. 이 뒤주는 쌀 20가마가 들어가는 크기다. 보릿고개가 되면 부잣집인 쌍산재로 인근 사람들이 곡식을 빌리러 왔다. 쌀과 보리 몇 되만 있어도 목숨을 연명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 집에서 그 구휼미를 저장해놓았던 곳이 바로 이 뒤주다. 이 뒤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후의 보루였다. 이 집에서 곡식을 빌려주면 가을 추수철에 갚았다. 단, 이자는 받지 않았다. 빌려간 양만큼만 갖다 놓으면 되었다. 이자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여기서 주변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다. 둘째는 일꾼들에 대한 대접이었다. 이 집은 20~30명이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상주하는 일꾼만 10명에 가까웠다. 일꾼들의 임금은 가을 추수철에 곡식으로 한 번에 주었는데, 지불하는 방법이 후했다. 머슴의 1년 새경 私耕이 쌀 20가마라고 하면 주인은 여기에다 10%를 더 얹어 22가마 분량을 덕석에 풀어놓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일꾼 자신이 쌀 됫박을 직접 되어서 가마니에 넣었다. 다른 집은 주인이 됫박을 잡고 쌀을 센다. 그러나 쌍산재는 머슴이 됫박을 잡도록 배려했다. 주인이 잡으면 인색해진다. 머슴이 됫박을 잡으면 자신의 새경이므로 아무래도 후하게 쌀 됫박을 세기 마련이다. 쌀 됫박 잡는 권한을 주인이 머슴에게 위임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인은 일부러 밖으로 나가 머슴이 쌀되를 세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러면 머슴은 20가마가 새경이지만 22가마 정도를 자신의 쌀가마니에 담았다. 두 가마를 더 담도록 주인이 묵인한 셈이다. 일꾼들에게 후하게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밥솥단지다. 수십 명분의 밥을 해야 하므로 무쇠솥에 밥을 한꺼번에 했다고 한다. 밑에는 보리를 깔고 위에다 쌀을 얹었다. 밥을 풀 때는 제일 먼저 집안의 최고 어른인 조부의 밥을 펐다. 그 다음에는 주인집 식구의 밥이 아니라 머슴들의 밥을 폈다. 일찍 밥을 풀수록 쌀이 밥그릇에 많이 들어간다. 머슴 밥그릇에 쌀밥이 담기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식구들의 밥을 펐다. 마지막에 푸면 보리가 많다. 집 식구들은 보리밥을 먹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머슴과 일꾼을 대접했다. 쌍산재의 후손인 오경영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3 정원에는 모과 향이 그윽하다.
4 살림채에서 100m에 이르는 대숲과 언덕을 지나야 서당채에 다다른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납득이 되었다. 동학운동과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6・25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이 부잣집이 불에 타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배경을 말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배려가 없었다면 이런 부잣집이 지리산 자락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용인하지 않는 산 아닌가!
쌍산재의 가훈은 내가 보기에 ‘본립도생 本立道生’이다. 서당의 편액에 쓰여 있는 글이다. ‘근본을 세우면 도가 저절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근본이 무엇인가. 자신의 타고난 성품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려면 등 따뜻하고 배부른 것에 만족해야 한다. 구들장에 등을 지지면 대부분의 피로는 풀어진다. 배만 차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필요 이상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벼슬을 해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도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이 집 어른들은 ‘밖에 나가서 취직하지 말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집에서 글 읽고 농사짓고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지리산과 섬진강의 풍광을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간다고 해서 뭔가 특별한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본립 本立의 정신 뒤에는 남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다. 그 덕택으로 이 집에는 여순반란사건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다. 오히려 쫓겨 오는 빨치산이나 경찰을 이 집 어른들은 병풍 뒤와 다락 안에 숨겨주었다. 추적자도 이곳에 숨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집 어른이 ‘없다’고 하면 차마 더 이상 집을 수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살렸다. 이 집은 이런 역사가 깃든 집이다.
3천 리를 달려온 백두대간의 종착 맥이 배산을 이루고, 그 앞으로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강인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그 사이에 넓은 들판이 자리 잡고 있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준다. 강에서는 은어를 비롯한 생선이 나오고 지리산에서는 산나물과 약초, 그리고 산짐승 고기도 나온다. 대문 앞으로는 섬진강 너머로 오산 鰲山이 안산을 이루고 있다. 쌍산재에서 보니 이 오산에는 문필봉도 있고, 창고사 倉庫沙도 들어 있다. 문장과 먹을 것을 주는 봉우리가 바로 안산인 오산이다. 다만 한 가지 약점은 오른쪽인 백호가 약하다는 점이다.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백호 자락이 약하다. 이 점을 보강하기 위해서 이 집 주인들은 백호 자락 부근에 저수지를 조성했을 것이다. 서당 오른쪽으로 나가면 영벽문 映碧門이 있고 이 영벽문을 열어젖히면 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는 농사용 물을 공급한다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약한 백호의 맥을 보강하는 비보적 裨補的 개념의 인공 호수로 보인다. 쌍산재는 필자가 풍수에서 시작하여 집의 일이이 一而二적 구조, 지리산을 배산으로 하고 섬진강을 임수로 하는 호쾌한 풍광, 공동체에 대한 배려, 그리고 명천 名泉까지를 모두 공부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위) 쌍산재는 밖에서 보면 그리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민가지만 대지 규모가 5천 평에 이르고 별채로 서당이 있는 큰 집이다.
서당채에서 입구를 바라본 풍경. 겹겹이 나무를 심어 공부하는 사람이 밖으로 주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했다.
백두대간 끝자락에 있으면서 앞으로는 섬진강을 바라보고 집 앞에는 천하의 명천 名泉을 두고 있는 쌍산재. 집 앞에 명천이 있는 집은 명택 名宅이 분명하다. 어떤 동네든 우물이 있으면 그 우물 바로 뒤나 위쪽으로 자리 잡은 집은 풍수적으로 명당에 해당한다. 이 우물이 기운을 뭉치게 해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풍수적으로는 터 앞에 있는 우물을 혈구 穴口라고 부른다. 혈의 입이다. 얼굴에 비유하자면 코 바로 밑에 터를 잡는데, 코밑에는 인중 人中이 있고 이 인중 밑으로 입이 있다. 우물은 입에 해당한다. 쌍산재는 대문 앞에서 바라보면 그 포용력을 알 수 없다. 이 집은 자신의 진면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문도 작다. 그러나 일단 집 안에 들어서면 달라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집이다. 전체 대지는 5천 평. 대문에 들어서면 대문 바로 옆에 남자들의 공간이었던 사랑채가 있고 그다음으로 안주인이 살림하던 살림채, 시집가기 전의 처녀들이 머물렀던 건너채가 있다. 대문 왼쪽으로 최근에 만든 응접실 겸 다실채가 하나 더 있다. 집의 규모도 소박하다. 위압감이 없다. 조선 평민의 집 규모이다. 다시 여기서 집 뒤로 넘어가는 돌계단 길이 있다. 대숲을 지나는 돌로 만든 계단을 20m쯤 통과하면 작은 동산이 나온다. 이 동산에는 고구마밭도 있고 목화밭 그리고 각종 채소밭도 있다. 대략 80m 정도를 통과하면 집 한 채가 다시 나타난다. 글을 읽는 서당채다. 서당채는 그 전면이 이중, 삼중의 나무로 둘러 싸여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할 수 있으나 그렇기에 방문객이 한눈에 이 서당채를 파악할 수 없다. 서당채 앞에 일부러 겹겹이 나무를 심어놓았다고 한다. 안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밖의 풍경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책을 읽으려면 정신 집중이 필요하고, 집중에는 바깥 풍경으로부터 일정한 차단이 필요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와 살림채, 건너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8백 석 농사를 지은 부농의 집이지만 소박하기 그지 없다. 식구들은 보리밥을 먹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일꾼들에게는 쌀밥을 먹였다고 한다.
1 쌍산재 대문 바로 옆에는 전국 10대 약수 중 하나인 당몰샘이 있다. 지리산의 약초 뿌리가 녹아 있는 물이라 전해진다.
2 서당채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영벽문이 나온다.이 문을 열면 바로 드넓은 저수지가 펼쳐진다.
나는 쌍산재의 구조적 특징은 이 서당채에 있다고 생각한다. <택리지> 에 보면 조선 선비들은 사는 집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별채나 별서 別墅를 갖는 것이 좋다고 나온다. 10리의 반절이 5리다.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30분 거리는 주거 공간과 떨어져 있음으로써 장점과 단점이 모두 발생한다. 장점은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격절감일 것이고 단점은 밥 먹기가 불편하다는 점이다. 별채에서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시설과 인원이 있다면 모를까, 이 시설이 없다면 하루 세끼 밥 먹는 문제는 생활에 큰 불편으로 다가올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밥’ 문제 해결이 쉬워야 한다. 내가 집과 승용차로 1시간 떨어진 곳에 휴휴산방을 지어놓고 생활하면서 피부로 실감한 것이다. 살림채와 100m 거리에 별채에 해당하는 서당이 있고, 그 중간을 통과하려면 작은 동산을 넘어야 한다. 이 정도 되면 서당은 본채와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공간이 달라야만 생각도 바뀐다. 생각이 바뀌어야만 업보 業報도 바뀐다. 역으로 업보가 바뀌지 않으면 공간을 바꿀 수 없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생각과 업보, 나아가서는 운명까지도 관계되는 부분이 바로 이 공간의 문제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공간을 전환해야 한다. 여행이 주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공간을 바꿔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불편함이 따른다. 원룸이 주는 매력은 모든 것이 방 하나에 다 있다는 점이다. 손만 뻗으면 닿는다. 쌍산재의 구조를 굳이 문자로 표현해본다면 ‘일이이 一而二’ 구조라고나 할까.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면서 둘이다. 둘이면서도 하나다. 공간의 격절과 생활의 편리를 모두 담아내기 위해 건축적으로 고려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더군다나 이 집은 밋밋한 평지에 있는 게 아니다.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에 있다는 점이 집의 내부 공간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작용을 한다.
1 대문 안에 해주 오씨 선조 4대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2 살림채에 붙박이 뒤주가 있다. 가난한 이웃의 보릿고개에 대비해 구휼미를 저장하던 곳이다.
이 집은 민가 民家다. 평민의 집이다. 조상이 높은 벼슬을 하거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의 집이 아니다. 평범하게 살았던 평민의 집. 7백~8백 석의 농사를 지었던 부농의 집이었다고 하면 정확하다. 그래서 집 자체는 장엄하지 않고 소박하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은 민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도리 일대는 해주 오씨의 집성촌이었다.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5백 년이 되었다고 한다. 오씨 조상들이 들이마시고 내쉰 호흡이 5백 년 동안 이 동네에 축적되어 있는 셈이다. 조상과 후손의 호흡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호흡이 서로 만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바로 안정감이다. 알 수 없는 편안함과 평화로움이 있다. 1천 년이 넘는 오래된 도시에 가면 느끼는 편안함이 시골의 오래된 집성촌에 가도 느껴진다. 그 안정감은 호흡에서 호흡으로 연결되는 연속성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데에서 오는 연속성이다.
쌍산재가 주는 안정감은 역대 이 집 주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적선과도 관련이 있다. 지역 사회에 대한 이 집의 배려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쌀뒤주’다. 안채의 왼쪽 옆구리에는 나무로 만든 뒤주가 고정되어 있다. 집을 지을 때부터 붙박이로 만들어놓았다. 이 뒤주는 쌀 20가마가 들어가는 크기다. 보릿고개가 되면 부잣집인 쌍산재로 인근 사람들이 곡식을 빌리러 왔다. 쌀과 보리 몇 되만 있어도 목숨을 연명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 집에서 그 구휼미를 저장해놓았던 곳이 바로 이 뒤주다. 이 뒤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후의 보루였다. 이 집에서 곡식을 빌려주면 가을 추수철에 갚았다. 단, 이자는 받지 않았다. 빌려간 양만큼만 갖다 놓으면 되었다. 이자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여기서 주변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다. 둘째는 일꾼들에 대한 대접이었다. 이 집은 20~30명이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상주하는 일꾼만 10명에 가까웠다. 일꾼들의 임금은 가을 추수철에 곡식으로 한 번에 주었는데, 지불하는 방법이 후했다. 머슴의 1년 새경 私耕이 쌀 20가마라고 하면 주인은 여기에다 10%를 더 얹어 22가마 분량을 덕석에 풀어놓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일꾼 자신이 쌀 됫박을 직접 되어서 가마니에 넣었다. 다른 집은 주인이 됫박을 잡고 쌀을 센다. 그러나 쌍산재는 머슴이 됫박을 잡도록 배려했다. 주인이 잡으면 인색해진다. 머슴이 됫박을 잡으면 자신의 새경이므로 아무래도 후하게 쌀 됫박을 세기 마련이다. 쌀 됫박 잡는 권한을 주인이 머슴에게 위임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인은 일부러 밖으로 나가 머슴이 쌀되를 세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러면 머슴은 20가마가 새경이지만 22가마 정도를 자신의 쌀가마니에 담았다. 두 가마를 더 담도록 주인이 묵인한 셈이다. 일꾼들에게 후하게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밥솥단지다. 수십 명분의 밥을 해야 하므로 무쇠솥에 밥을 한꺼번에 했다고 한다. 밑에는 보리를 깔고 위에다 쌀을 얹었다. 밥을 풀 때는 제일 먼저 집안의 최고 어른인 조부의 밥을 펐다. 그 다음에는 주인집 식구의 밥이 아니라 머슴들의 밥을 폈다. 일찍 밥을 풀수록 쌀이 밥그릇에 많이 들어간다. 머슴 밥그릇에 쌀밥이 담기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식구들의 밥을 펐다. 마지막에 푸면 보리가 많다. 집 식구들은 보리밥을 먹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머슴과 일꾼을 대접했다. 쌍산재의 후손인 오경영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3 정원에는 모과 향이 그윽하다.
4 살림채에서 100m에 이르는 대숲과 언덕을 지나야 서당채에 다다른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납득이 되었다. 동학운동과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6・25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이 부잣집이 불에 타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배경을 말이다.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배려가 없었다면 이런 부잣집이 지리산 자락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용인하지 않는 산 아닌가!
쌍산재의 가훈은 내가 보기에 ‘본립도생 本立道生’이다. 서당의 편액에 쓰여 있는 글이다. ‘근본을 세우면 도가 저절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근본이 무엇인가. 자신의 타고난 성품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려면 등 따뜻하고 배부른 것에 만족해야 한다. 구들장에 등을 지지면 대부분의 피로는 풀어진다. 배만 차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필요 이상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벼슬을 해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도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이 집 어른들은 ‘밖에 나가서 취직하지 말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집에서 글 읽고 농사짓고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지리산과 섬진강의 풍광을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간다고 해서 뭔가 특별한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본립 本立의 정신 뒤에는 남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다. 그 덕택으로 이 집에는 여순반란사건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다. 오히려 쫓겨 오는 빨치산이나 경찰을 이 집 어른들은 병풍 뒤와 다락 안에 숨겨주었다. 추적자도 이곳에 숨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집 어른이 ‘없다’고 하면 차마 더 이상 집을 수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살렸다. 이 집은 이런 역사가 깃든 집이다.
3천 리를 달려온 백두대간의 종착 맥이 배산을 이루고, 그 앞으로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강인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그 사이에 넓은 들판이 자리 잡고 있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준다. 강에서는 은어를 비롯한 생선이 나오고 지리산에서는 산나물과 약초, 그리고 산짐승 고기도 나온다. 대문 앞으로는 섬진강 너머로 오산 鰲山이 안산을 이루고 있다. 쌍산재에서 보니 이 오산에는 문필봉도 있고, 창고사 倉庫沙도 들어 있다. 문장과 먹을 것을 주는 봉우리가 바로 안산인 오산이다. 다만 한 가지 약점은 오른쪽인 백호가 약하다는 점이다.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백호 자락이 약하다. 이 점을 보강하기 위해서 이 집 주인들은 백호 자락 부근에 저수지를 조성했을 것이다. 서당 오른쪽으로 나가면 영벽문 映碧門이 있고 이 영벽문을 열어젖히면 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는 농사용 물을 공급한다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약한 백호의 맥을 보강하는 비보적 裨補的 개념의 인공 호수로 보인다. 쌍산재는 필자가 풍수에서 시작하여 집의 일이이 一而二적 구조, 지리산을 배산으로 하고 섬진강을 임수로 하는 호쾌한 풍광, 공동체에 대한 배려, 그리고 명천 名泉까지를 모두 공부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