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김선미 씨와 홍익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 김원방 씨 부부가 밝고 화사한 기운이 전해지는 아담한 거실에서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몸에 잘 맞고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사람이 태가 나듯 정성껏 마련한 음식도 그릇을 잘 선택해야 그 맛이 배가된다. 사람에게 옷이 날개라면 음식에는 그릇이 날개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 필요한 일상용품 ‘그릇’. 생각해보면 참으로 철학적인 물건이다. 우리는 생각을 담고 마음을 담는 그릇을, 사람을 그릇의 크고 작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가. 자신의 작업을 작품보다 ‘그릇’으로 불리기 원하는 도예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스쳤던 생각이다. 너도나도 명품이고 이도 저도 작품으로 불리기 원하는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갤러리를 통해 작가로 이름을 알렸건만 ‘작품이 아닌 그릇’을 말하는 이. 바로 도예가 김선미 씨다.
헤이리의 한적하고 평화로운 전원 마을. 늦여름의 녹음을 배경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한 원로 작가가 10여 년 전 작업실 겸 살림집으로 설계해 살던 곳으로, 김선미 씨 부부가 이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것은 4년 전이다. 밝고 화사한 기운이 전해지는 아담한 거실. 커다란 창을 통해 사방으로 들이치는 햇살 아래, 흰색 페인트로 마감한 단순한 공간에 창밖 초록 풍경이 더해진다. 손바닥만한 조형 작품에서부터 200호는 족히 넘어 보이는 디지털 이미지 합성 작품에 이르기까지 집 안 구석구석 자리를 틀고 있는 아트 컬렉션과 달리 살림살이는 소박하고 단출한 모습이다. 작품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그는 남편의 은사님, 남편 후배 작가 등이 등장하는 ‘함께 사는 사람’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간간이 들려준다. 그의 남편은 2008 부산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던 홍익대학교 예술대학원 김원방 교수다. 도예가 아내와 미술평론가 남편이라! 내친김에 그릇 이야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부부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1 남편 김원방 씨의 어린 시절 사진을 모아 침실 코너를 장식했다.
2 김원방 씨가 총감독을 맡았던 2008 부산비엔날레에 참가했던 중국 작가 미아오 샤오춘의 디지털 이미지 작품 ‘홍수’.
미술과 음악, 그리고 남편 “유학을 준비하면서 남편을 만났어요. 당시 남편은 프랑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조각가로 활동하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저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어릴 적부터 워낙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남편 김원방 씨는 미술 비평을, 김선미 씨는 조형 작업을 공부하기 위해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포트폴리오 작업 때문에 만났지만 사실 저희는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어요. 우리 둘 다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로 음악을 못하고 미대에 갔거든요.” 세상에 운명이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음악을 사랑했으나 미술가의 길로 들어서야만 했던 5남 1녀 중 막내아들 김원방 씨와 5녀 1남 중 막내딸 김선미 씨는 그렇게 만나 부부가 되었다.
작품보다 그릇 프랑스에서 돌아온 1990년대 말, 김선미 씨도 처음에는 조형 작업을 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시도한 생활 도자기 작업이 곧 새로운 길이 되었다. “인사동 가나아트숍에 그릇을 내주었는데, 모두 팔렸다며 20만 원 남짓한 돈을 건네주는 거예요. 당시만 해도 도예과를 졸업한 사람이 조형 작업이 아닌 그릇을 만드는 경우도 드물었고 더욱이 그릇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어요.”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 말한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그릇 려, 갤러리 서미 등을 통해 작품을 선보이면서 생활 도자기가 급부상해온 지난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작품보다 작가가 만든 그릇이라 부르는 것이 좋아요. 제가 만든 그릇은 장식장에 진열하기 위한 것이 아닌,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즐겁게 사용하기를 바라며 만든 것들이에요.” 그렇게 쓰임을 다하다 세월이 흘러서도 가치가 있으면 고려 청자나 조선 백자처럼 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가 말을 잇는다. 김선미 씨가 그릇을 만들기 시작한 지 올해로 11년째. “결혼을 하면 여자들이 요리에 재미를 들일 때가 있어요. 그 시기와 그릇 작업을 시작했던 때가 맞물려 한창 재미있게 일했어요. 요리를 하고 손님을 치르다 아이디어도 많이 생겼고요. 그때는 밤마다 내일은 이런 그릇을 만들어봐야지 하는 설레는 맘으로 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작품보다 작가가 만든 그릇이라 부르는 것이 좋아요. 제가 만든 그릇은 장식장에 진열하는 것이 아닌, 생활 속에서 즐겁게 사용하기를 바라며 만든 것들이에요.”
3 도예가 김선미 씨.
4 집안 곳곳이 크고 작은 미술 작품으로 가득하다. 벽에 걸린 그림은 서양화가 김홍주 선생의 초기 작품.
고칠 수 없는 매력 도예는 그야말로 도를 닦는 일이다. “도자기는 가마에 넣는 순간 내 손을 떠나요. 마음을 비워야 해요. 가마 문을 여는 순간까지 그 결과를 알 수가 없지요.” 온도와 기압, 유약 성분 등의 데이터를 철저히 관리해서 동일 조건을 맞추어도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게 되는 작업. 말 그대로 불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고 실패도 많지만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도를 닦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만날 이렇게 골탕 먹고 사나 싶어요. 한번 만들면 그림이나 조각처럼 고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것이 곧 도자기의 매력이기도 해요.” 생활 도자기를 만드는 만큼 언제나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들의 의견에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릇에는 기능이라는 본질적인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그릇 두 개를 사 갔는데 왜 다르냐며, 손으로 만든 도자기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그릇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아요. 도자기 컵을 보고 이거 깨지냐고 묻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는 이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저 활발하게 활동하는 생활 도자기 작가가 더 많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이 생활 속에서 폭넓게 사용되다 보면 도자기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더 넓어지지 않겠는가.
1, 2 성북동 카페 겸 숍 ‘리유’의 테라스와 지붕에 설치한 조형 작품은 김선미 작가의 남편 김원방 씨가 만들어준 것이다. 지붕 위에서 기타를 들고 있는 아이는 바로 김선미 씨.
작업실 안의 작가 “작가는 작업실에 있는 것이 가장 어울려요.” 몇 년 전 인사동 쌈지길에서 그가 직접 매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 생활 도자기를 만드는 만큼 그릇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 여겼고, 작업과 매장 운영을 동시에 하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어요. 작가는 작업실에 있어야 하고 비즈니스와 관계된 것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걸요.” 지난해 문을 연 도자기 숍 ‘리유’는 그런 의미에서 그를 작업실에 머무는 작가로만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성북동 주택가에 자리한 리유 1층은 동네 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카페, 지하는 김선미 작가의 도자기를 판매하는 숍이다. 리유 사장 백경원 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온 친자매 같은 사이로 김선미 씨를 위해 숍 운영을 자처했다. “가끔 리유에 들러 그릇을 감상하면서 머그잔 하나, 접시 하나, 한 번에 하나씩 사 가는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있어요. 그 아가씨를 보면 숍을 연 것을 참 잘했다 싶어요.” 옷은 하나에 3만 원이면 싸다 하면서도 손으로 만든 컵 하나는 3만 원이라면 비싸다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런 가운데 생활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즐기는 젊은 친구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그에게 희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3 김선미 작가의 생활 도자기.
4 ‘리유’ 지하에는 김선미 작가의 작품을 판매하는 숍이 있다. 찻잔과 접시 등 생활 도자기와 화병과 같은 오브제 등 김선미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5 그는 아침 9시면 어김없이 1층 작업실로 출근하고 저녁 6시면 2층 살림집으로 퇴근을 한다. 이러한 규칙적인 생활이 작업의 집중도를 높인다고.
작업실 밖에서 만나는 세상 집과 작업실이 붙어 있지만 김선미 씨는 오전 9시 출근과 오후 6시 퇴근을 철저하게 지킨다. 작업 시간만큼은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작업실을 나서면 바깥 세상을 부지런히 탐닉한다. “작가처럼 부지런해야 하는 직업도 없어요. 도를 닦는 도사님처럼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저 열심히만 해서 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그는 작업실을 떠나면 가능한 한 도자기와 관련된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패션쇼를 보고 영화를 보고 전시회와 공연장을 찾아 꿈틀거리는 세상의 감성을 만난다. “작업 말고 좀 더 좋고 행복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돈을 벌려고 공장을 돌리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매일 같은 것만을 반복해서는 행복한 정신 세계를 유지할 수 없어요. 우리 작업실의 남자 아이는 록 음악을 연주해요.”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 작업실 식구의 음악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음악을 하고 싶었으나 미대에 가야 했던’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제 인생에서 도자기가 9라면 음악은 9.8이에요.” 그는 관악기를 전공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음대에 진학할 수 없었다. 아프다는 거짓말로 학교도 빠져가며 온종일 방 안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곤 했던 학창 시절, 건강상의 문제로 음대 진학을 결사 반대했던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취미로 남겨둔 것은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직업으로 삼았다면 지금처럼 행복하게 음악을 즐길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어느 날 작업실 학생이 묻더란다. “선생님, 열심히 하면 되겠죠?” 그는 “아니, 즐겁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해”라고 대답해주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죠. 사람들은 저를 보고 도자기 하는 사람 같지 않대요. 성격이 너무 쾌활하다고. 독수공방하는 작업에 몰두하며 지난한 반복과 실패를 견뎌내야 하는 도자기 작업은 거의 도인의 삶을 요구하죠. 그러니 작업실을 떠나서는 즐겁고 쾌활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어른들 말씀에 부엌에서 음식을 만지는 사람이 안 좋은 마음을 품은 상태로 요리를 하면, 그 음식을 먹은 이에게 탈이 난다고 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는 사물에는 그 사람의 에너지가 담기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선미 씨의 그릇은 행복을 담은 그릇이다. 즐거운 에너지가 넘치는 손길로 빚은 그릇에 행복 말고 그 무엇이 담기겠는가. 그가 전시장의 작품이 아닌 식탁 위의 그릇을 빚는 이유,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6 김선미 작가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