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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디자이너 김훈정 씨 오늘 잘 만든 물건이 내일의 빈티지고 앤티크다
“탐미는 죽어야 낫는 병”이라 말하는 김훈정 씨. 살림하는 아내로, 아이 키우는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온 그가 패션 디자이너이자 액세서리 공예가로 인생의 제2막을 시작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열어준 것은 평생을 함께해온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 천을 이어 옷을 짓고 철판을 오려 액세서리를 만들 듯 손으로 지은 공간 ‘H Works’에서 오늘도 그는 내일의 빈티지 드레스와 앤티크 주얼리를 만들고 있다.


김훈정 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액세서리 디자인에 빠져 있다. 평생을 멋쟁이로 살아온 안목과 감각을 밑천 삼아 그는 디자이너라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얼마 전 새로 집을 지으면서 다른 집이라면 거실이 위치할 자리에 그의 작업실을 두었다.

삼청동 총리공관 골목으로 들어서면 후안 미로를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모빌이 눈길을 끄는 집이 있다. 산등성이처럼 이어지는 담장과 대문, 조각보처럼 이어 붙인 외벽, 웅장한 세라믹 기둥…. 카페 안으로 들어서도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지. 구불구불 굽이치는 천장과 벽면, 바닥이고 벽이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에 익는 것이 없다. 오려서 붙이고 잘라서 이은 것 같은 희한한 마감재들. 카페 안쪽으로 진열된 의상과 액세서리로 눈을 돌려본다. 아방가르드한 벌룬 스커트, 이집트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황금빛 목걸이…. 카페를 장식하는 컬렉션은 또 어떤가. 아르데코 조명, 앤티크 클래식 가구,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조명, 앤티크 유리 램프, 빈티지 메탈 클러치 백…등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물건들이 곳곳에 빼곡하다. 들여다볼수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공간의 주인은 이제 막 데뷔한 신참 디자이너다. 그림을 배우거나 패션을 공부해본 적도 없다는 이 디자이너는 대학 졸업 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한동안 아이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평생 멋 부리며 살았고 그저 남들보다 조금 손재주가 있는 덕에 직접 옷을 지어 입고 액세서리를 만들곤 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천을 재단해 옷을 짓고 철판을 두드려 액세서리를 만들듯 집을 짓게 되었다는, 이팔청춘 부럽지 않은 ‘팔팔청춘’ 64세 김훈정 씨 이야기다.


1 여행길에 들렀던 벼룩시장과 앤티크 숍에서 사 모은 물건들로 장식한 카페 H Works 입구.
2 64세 나이로 데뷔한 늦깍이 디자이너 김훈정 씨. 그가 입고 있는 셔츠는 20년간의 리폼을 통해 원피스에서 롱 셔츠로 다시 짧은 셔츠로 변신한 것이다.


탐미는 죽어야 낫는 병이다 살림집 겸 작업실로 꾸민 2층으로 오르니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액세서리를 제작하고 의상을 디자인하는 작업실이 거실처럼 집 안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함석판을 엮어 만든 병풍처럼 드리운 패널은 붙박이장이다. 침실과 화장실은 어디가 벽이고 문인지 알 수 없는 벽 속에 숨어 있다. 통나무와 철제 구조물로 이루어진,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면서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짤주머니로 크림을 짜서 케이크를 장식하듯 시멘트 반죽을 짜서 텍스처를 표현한 벽, 나왕 각재를 겹겹이 붙여 벽과 문을 만들고 철판을 재단해 만든 손잡이와 경첩의 투박한 장식이 훈데르트 바서 Hundert Wasser 하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정말 멋 부리는 걸 좋아하고 손재주 조금 좋으면 이런 집을 짓고 스스로 옷을 지어 입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내가 한 거라고는 평생 예쁜 거 아름다운 거 좇아다닌 것밖에 없어요.”사람이 되었든 옷이 되었든, 장소가 되었든 자연이 되었든 간에 그는 언제나 아름다운 대상을 탐닉해왔다. “25년 전이에요. 남편에게 2년 동안 미국 연수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처음 가본 미국의 모든 것이 충격이었어요. 문화의 충격, 규모의 충격, 자연의 충격. 미국은 역사가 짧지만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부를 쌓은 사람이 많잖아요. 상당한 컬렉션을 보유한 개인 박물관이 넘쳐나는 것도 크라프트 쇼나 앤티크 쇼를 보는 것도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돌아온 이후 기회가 되면 여행을 열심히 다녔어요. 그리스, 이집트, 인도, 아프리카…. 내 여행의 목적은 낯선 문화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이었어요.” 여행을 가면 앤티크 시장을 찾아가는 것은 필수.“재밌어 죽겠는 거예요.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귀한 걸 몰라볼까 싶은 마음에 물건을 사고 나면 아차 싶은 거지. 이걸 또 어떻게 들고 다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탐미는 죽어야 낫는 병이에요.”


3 유럽 앤티크 가구와 아르데코 조명등, 빈티지 주얼리 등 카페 H Works에서는 김훈정 씨의 다양한 컬렉션을 볼 수 있다.
4, 5 카페 곳곳에 그가 디자인한 액세서리와 앤티크 주얼리가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설계도 없이 지은 집 “다른 건축가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설계도 하나 없이 지었어요. 벽이 새까맣게 될 정도로 계속 스케치하고, 머릿속으로 공간을 상상해가면서 지은 집이에요.” 손잡이 하나도 남들과 같은 것은 쓰고 싶지 않아 몇 채의 집을 짓는 것만큼 공을 들였고,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 싼 재료를 찾아다녔다. 스테인리스 스틸 대신 함석을 쓰고 원목 대신 합판이나 각재를 활용했다. 건축 재료를 구하면서 건축 자재 시장보다 방산시장에 더 자주 들락거리며 재료를 궁리했다. “원혜연이라고 집을 같이 지은 젊은 건축가가 있어요. 끼리끼리 알아본다고, 이 친구와 함께 작업하면 내가 원하는 집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잠재된 재능이 많은 젊은이라며 칭찬을 멈추지 않는다. “나랑 비슷한 친구예요. 개성이 강하고 창의적인 것에 있어서 자기 생각을 양보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우리 남편이 ‘똑같은 사람 둘’이 붙어서 또 무슨 짓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거냐고 말해요. 원혜연이나 나나 불편한 건 참아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못 참거든요.”
그는 건축가 원혜연 씨와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 김상옥 선생의 시 한 편을 들추어낸다. “우리 아버지 시 중에 ‘무연’이라는 것이 있어요. 인연이 없다는 소리지. 담장 옆에 아름답게 매화가 피어 있는데 집 안 사람들은 모두 관심이 없고 담장 밖을 지나던 어떤 이가 매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마음과 내 마음이 같다, 뭐 그런 내용이에요. 그런 인연을 또 언제 만날까 하는 이야기. 아마도 담장 안의 식구들과는 그런 마음의 소통이 없다고 무연이라 하셨던 건지. 어릴 때는 그 시가 그렇게 서운했는데, 내가 나이를 먹어보니 아버지 시를 이해하게 되더군요. 우리는 학연이나 지연 같은 눈에 보이는 끈을 인연으로 여기며 살아가지만,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고 나이를 초월해서 통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데, 우연히 어떤 패션쇼를 보면 너무나 흡사한 작품이 나와서 식구들끼리 저 사람이 네 것 베꼈다며 농담을 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매개로 시공을 초월한 인연이 있다는 거예요. 평생을 함께하는 부모 자식 간에도 가져볼 수 없는 인연이죠.”


1 카페 H Works의 외관. 2・3층 테라스를 덮고 있는 나무 패널은 하나씩 여닫을 수 있다.
2, 3 건축용 철근으로 모양을 낸 대문, 화분을 쌓아 만든 기둥, 화분을 다리로 이용한 테이블 등 이곳에는 독특한 디자인과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열정의 이름으로 8개월간 계속된 공사는 살림집인 2・3층을 먼저 마무리하고 1층으로 이어졌다. 이 집을 짓기 전까지 그는 언제나 “나는 이거 못해, 나는 기운 없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몸이 약한 탓에 이삼일만 무리해도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집을 짓는 8개월 동안 그는 몸살 한번 앓지 않았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자재 시장을 돌아다니고 공사장 일손을 돕고, 밤에는 작업실에 앉아 액세서리를 만들다 보면 새벽 한두 시 되기 일쑤. “행복한 일, 성취감을 느끼는 일을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누구나 제 안에 잠재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평생을 자신이 허약하고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더란다. “나는 못해”라고 입에 달고 살았던 그 말이, 그렇게 믿었던 생각이 스스로를 가두어둔 것 같다며 그는 60여 년 만에 발견한 ‘내 안의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로는 사치도 필요하다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내가 살림할 때 얼마나 아끼는지. 날마다 플러그 뽑고 다니고 일 보러 나갔다가도 혼자서 밥 사 먹느니 5천 원 아끼는 것이 낫다 여겨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다 어머니한테 배워서 그래요.” 동네 슈퍼마켓을 가더라도 스타킹을 챙겨 신고, 언제나 한껏 멋 부리고 다니니 사람들은 자신이 꽤나 사치하는 줄 알 거란다. “나는 쓸 것과 아낄 것을 구분하면서 살았어요.” 그렇게 허투루 나가는 걸 아껴서 여행도 다녔고, 여행 중에 하루는 꼭 최고의 호텔에서 ‘사치’도 부렸다. “좋은 호텔은 그 자체가 미술관이에요. 여행할 때 꼭 가보고 싶은 최고급 호텔이 있다면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며칠 좀 싼 데서 머물다가 정말 하루는 호사를 누리는 거예요. 문짝 하나 유리 하나 집기 하나, 컬렉션 하나하나가 모두 미술품인 호텔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거지요. 그 돈은 정말 안 아까워요.”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적당한 사치는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한다.


김훈정 씨는 건축비를 아끼기 위해 값싼 자재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1층에서 2층 살림집으로 오르는 계단 벽면을 값비싼 스테인리스 스틸을 대신해 함석판으로 마감했다.
벽면을 장식할 때는 탈부착이 쉬운 자석을 활용했다. 원색 접시들은 25년 전, 미국에 살 때 중고 가게에서 구입해 사용하던 범랑 냄비다.


당신, 평생을 준비한 거지 그의 옷 욕심은 유별나다. 예를 들면 소매 디자인이 맘에 드는데 맞는 사이즈가 없거나 입어서 불편해도 구입한다. 그러고는 궁리를 시작한다. 맘에 드는 디자인을 살려서 ‘입을 수 있게’ 고치는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리폼을 하다 보니 옷의 구조와 원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디자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완전 무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창작은 아니에요. 수없이 보아온 많은 것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결합해서 나오는 거지. 내게 앤티크 은팔찌가 하나 있어요. 언젠가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한 적도 있고 아르마니에서 리메이크한 것을 본 적도 있어요.” 강연을 다니는 한 지인은 요즘 김훈정 씨의 옷을 입고 다닌다. 그가 만든 옷과 액세서리로 멋을 부리고 강단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60대 중반에 겁도 없이 창업을 한 여자가 있다. 내가 입은 이 멋진 옷과 액세서리는 그가 디자인한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묻더란다. 언제부터 준비해온 것이냐며. “글쎄 내가 이걸 언제부터 준비해왔나 싶어 말문이 막혀 있는데, 옆에서 남편이 던지는 말 ‘당신, 평생을 준비한 거지.’ 하더라고요.” 사실 1년 전만 해도, 아니 집을 짓기 시작하던 8개월 전만 해도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옷과 액세서리를 판매하고 카페를 운영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설계도 하나 없이 공사를 시작하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집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그는 카페 H works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1 뉴욕에서 구입한 빈티지 소파.


2 함석판을 엮어 만든 패널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2층 전경. 이곳은 다름 아닌 붙박이 장이다. 왼쪽으로 벽걸이 장식이 걸린 함석판이 안방과 화장실로 통하는 문이다.

남편의 음악다방, 아내의 양장점 “솔직히 네가 잘나서 된 거냐? 다 네 남편 덕 아니냐.” 카페 H Works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김훈정 씨에게 친구들이 던지는 냉정한 한마디. 맞는 말이란다. “다른 남자들이었으면 못하게 했을 거예요. 우리 시대는 남자 중심의 사회였어요. 내가 고마운 게 남편은 여자도 동등하다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표현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주었어요.” 제 눈에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발견하면 손에 넣어야 하고 실용보다 미가 앞서는 불편과 불합리한 선택을 묵묵히 이해해준 남편. 그의 그늘 아래서 어린아이처럼 해보고 싶은 것 다 하며 살았단다. “친구들조차 도대체 그런 것을 어떻게 입고 다니냐며 핀잔을 주는 옷을 가지고 남편 앞에서 패션쇼를 하고, 여행길에 참지 못하고 구입한 짐이 되는 물건들을 다 참아주었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내게 중요한 것들이라는 걸 인정해주는 것이지요.”


3 아내 김훈정 씨와 남편 김성익씨가 1층 카페 H Works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 김훈정 씨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디자인한 옷과 액세서리를 선보이고, 남편 김성익씨는 자신이 선곡한 음악으로 공간을 채우며, 인생 제2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김훈정 씨가 눈이 트인 사람이라면 남편 김성익 씨는 귀가 열린 사람이다. “미국에 사는 2년 동안 참 재미있었어요. 차를 타고 가다가도 나는 앤티크에 미쳐서 간판에서 A자만 봐도 고개가 돌아가고, 남편은 레코드 R자만 보면 고개가 돌아가고…. 우리는 정말 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재밌게 다녔어요.” 남편은 친구들 사이에서 ‘명디제이’로 통한다. 무슨 재주인지 처음 보는 사람도 그 마음을 아는 듯 그 마음에 꼭 맞는 음악을 틀어주기 때문이다. 카페 H Works는 아내 김훈정 씨의 양장점이자 남편 김성익 씨의 음악다방이다. 부부는 아침이 되면 카페 테라스로 나와 커피 한 잔 곁들인 토스트로 하루를 시작한다. 식사를 마치면 남편은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에스프레소 머신과 오디오가 있는 카운터 테이블 안으로 들어가 진한 커피 향과 활기찬 음악으로 삼청동의 아침을 깨운다. 세련된 매무새로 단장한 아내는 오늘 새롭게 선보이는 원피스를 다른 소품과 함께 진열해본다.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지 아니한가. 64세 동갑내기 김훈정 씨 부부가 하루를 시작하는 H Works 풍경이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