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회벽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이 집은 흙부대로 지었다. 흙부대 집은 자재비가 적게 드는 대신 인건비가 많이 들어 약 30평 규모로 지으려면 1억 원 정도가 든다. 인건비를 거의 들이지 않아 고흔표 씨는 22평 흙부대 집을 짓는 데 3천만 원 정도의 비용을 들였다.
고흔표·지미숙 씨 부부의 봉화 흙부대 집
새는 둥지를 틀고 토끼는 굴을 파고 사람은 집을 짓는다
내비게이션을 믿다가는 강 건넛마을에 도착할 터이니, 소천 면사무소로 와서 다시 전화를 하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도 깊은 곳에 집을 지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산길을 돌아드니, 기암괴석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푸른 물길이 그 답이 되어준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물빛을 앞마당 삼은 자리에 고흔표·지미숙 씨 부부의 집이 있다. 부부가 단둘이서 8개월 동안 손수 지은 집이다.
“이곳은 원래 소나무 숲이었어요. 나무를 베는 데만 1년이 걸렸지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부부는 금요일 저녁마다 이곳으로 내려와 차 안에서 쪽잠을 자고 토요일 아침이면 숲으로 들어와 하루 반나절 동안 꼬박 나무를 베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놀이 중 최고의 놀이가 집 짓기예요. 세상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걸요.” 봄이 되면 뒤채를 하나 더 지을 거라며 집 짓던 이야기를 시작하는 고흔표 씨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죽기 전에 꼭 한번은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죠. 새는 부리로 둥지를 틀고 토끼도 굴을 파서 스스로 집을 지어요. 남이 지은 집에 사는 것은 사람밖에 없어요.” 언젠가 집을 지을 요량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집터를 알아보고 다녔지만 연이 되는 땅을 쉽게 구하지 못했다. 지금의 집이 자리한 경북 봉화읍 소천면 강가에 땅을 마련한 것은 2년여 전이다. 어느 일요일, 사무실에서 일을 보다가 인터넷에 올라온 매물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 길로 달려왔단다. 터를 보고 한눈에 반해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그렇게 1년 동안 주말이면 봉화로 내려와 정글 같은 숲을 지나 나무를 베고 집터를 닦아나갔다. 지난해 4월, 남편 고흔표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내려와 컨테이너 박스를 전초기지 삼아 집 짓기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 지미숙 씨는 또다시 금요일 밤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와 남편의 집 짓기를 도왔다.
1 고흔표·지미숙 씨 부부는 단둘이서 8개월간 22평 흙부대 집을 지었다.
고흔표 씨 부부가 지은 집은 흙부대 집이다. 흙부대 집이란 흙을 넣은 자루를 벽돌처럼 쌓아 짓는 집이다. 친환경 흙집의 장점을 모두 지니면서 보다 경제적이고 시공 방법이 단순해 일반인이 직접 집을 짓기에 좋다. 황토로 짓는 흙집과 달리 흙부대에 들어가는 흙은 황토, 마사토, 진흙, 자갈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고흔표 씨는 모래를 사용했는데, 인근 모래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거니와 물 빠짐이 좋아서 공사 중 비가 와도 별다른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모래 부대는 비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을뿐더러 밀착력이 더 좋아져 한층 튼튼한 집이 되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모래 부대가 4천여 개. 장비로 터를 고르는 일주일 동안 둘이서 만든 모래 부대가 2천 개에 육박한다. 이들이 집을 짓는 동안 남의 손을 빌린 경우는 손에 꼽는다. 벽체 위에 도리를 돌리거나 보와 서까래를 얹는 등 여럿이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전기 공사처럼 전문가가 필요한 일뿐이었다. 미장 작업이며 구들과 바닥을 놓는 일, 심지어 설비와 배관까지 모두 두 사람의 손으로 해냈다. “저렇게 다듬은 서까래를 사려면 개당 1만~2만 원은 줘야 해요. 그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또 미련하게 중간 야적장에 가서 개당 3천 원에 3백 개를 구해다가 열흘 동안 일일이 낫으로 나무껍질을 벗겼어요. 그 덕에 몇 달 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붓곤 했지요.”
2 안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집 앞에 마당처럼 펼쳐진 낙동강 상류의 절경을 볼 수 있다.
3 집터는 원래 소나무 밭이었다. 처음 1년간 부부는 주말마다 봉화로 내려와 길도 없는 숲을 헤치고 들어가 소나무를 베었다. 그때 베어놓은 나무를 지금 땔감으로 쓰고 있다. 청록빛 물길을 앞마당 삼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4 거친 회벽의 자연스러움과 나뭇조각으로 장식한 방문, 강가에서 주워 온 나무를 솟대로 장식한 벽걸이…. 모두 한때 미술학도를 꿈꾸던 고흔표 씨의 솜씨다.
5 집이 마무리돼갈 무렵 고흔표 씨는 먼저 완성한 이 화장실에서 두 달을 살면서 거실과 방의 흙바닥을 시공했다.
6 가을이 되면 고흔표 씨는 외벽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려볼 계획이다.
고흔표 씨는 집 안을 둘러보며 순간순간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울퉁불퉁 거친 회벽을 가리키며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부러 벽을 거칠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지중해풍이다 뭐다 해가면서요. 사실 매끈하게 하고 싶었지만 품이 너무 많이 들어 이 정도로 마무리한 거예요. 천장 쪽 벽에 통나무를 박은 것도 모래 부대를 쌓을 수 없는 곳은 황토로 마무리해야 하는데, 너무 힘이 들기에 일을 줄이려고 통나무를 넣은 거고요. 사람들은 저것도 일부러 디자인한 것이라 생각하죠.” 나뭇조각으로 문에 무늬를 넣은 것도, 타일 마감이 울퉁불퉁한 것도 모두 일을 쉽게 하려고 요령을 피운 것이라 너스레를 떨지만, 의도였든 요령이었든 그의 감각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고등학생 때까지 그림을 그렸어요.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그 시절만 해도 미대에 가면 밥 굶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가장 비슷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한 끝에 건축과를 갔어요.” 그의 직업은 건축사다. 평생을 현장에서 남에게 시키기만 하고 잘했네 못했네를 평가했건만, 막상 내 손으로 집을 지어보니 생각처럼 되지 않더란다. “일을 하다 보면요 아무 생각이 안 나요. 수직 수평요?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지요.” 집을 짓는 마지막 단계로 흙바닥을 놓을 때는 먼저 완성한 화장실에서 두 달을 살면서도 살맛이 났다. “둘이서 노래 불러가며 정말 즐겁게 재밌게 일했어요. 산골이라 전화도 잘 안 되지요. 밖에 나가봐야 달리 할 일도 없지요. 그저 놀이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일하다 보니 점차 형태를 갖춰가는 집의 모습이 보이고….” 처음 석 달 동안 몸무게가 8kg이나 줄었다며 집 짓는 것이 고생은 고생이라 한다. 인생사 고생 아닌 것이 어디 있겠나. 모든 것 ‘마음의 문제’란다. 길도 없는 숲 속에 터를 잡은 것부터 전기를 들이고 물길을 찾아 지하 암반을 뚫을 때도 매 순간이 드라마였다. 언제나 처음에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결국은 해결되었고 그때마다 스릴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 부부에게 말한다. 우리도 도시를 떠나 내 손으로 집을 짓고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고. 그러나 교육과 생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도시를 떠날 수 없다고.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에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배우자가 뜻을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이번에 집 지으면서 이 사람 힘센 걸 알았다”는 고흔표 씨의 말속에는 아내의 협조와 지지가 없었다면 이 집도 없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부부는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야 연이어 집을 한 채 더 짓고 싶었지만, 지난 공사 때 고흔표 씨가 손을 크게 다쳤단다. ‘무리하지 말고, 올해는 더 이상 집 지을 생각 말라’는 하늘의 충고에 따라 그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다. 돌이켜보면 연이어 집을 한 채 더 짓겠다는 욕심도 도시 생활에서 길들여진 성급함이 아니었을까? 꿈에 그리던 산촌살이가 늦추어지긴 했으나 어차피 ‘느리게 살기’ 위해 선택한 삶이다. 조금 더 늦어진들 무엇이 문제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