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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부산 달맞이고개의 다실, 이기정 차는 풍류가 아닌 혁명이다
해운대 바다를 한눈에 품을 수 있는 부산 달맞이고개에는 특별한 다실이 하나 있다. 차를 마시면 의식주가 바뀌고, 의식주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니 ‘차는 풍류가 아닌 혁명’이라 말하는 고명 古茗 선생의 다실 이기정을 찾았다.


1 부산 달맞이고개에 자리한 다실 이기정에서는 해운대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광을 통해 바다의 기운을 품은 이곳에서 부산 숙우회 회원들이 차회를 갖는다.

한국의 상류층은 너무 바쁘다. 저녁 시간에도 약속을 2~3개씩 잡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바쁘면 깊이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삶이 얕아지는 것이다. 얕아진다는 것은 결국 품질이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가 있는가? 나는 세 가지를 꼽는다. 집 안에 세 가지를 갖추고 싶다. 첫째는 다실 茶室이고, 둘째는 중정 中庭이요, 셋째는 구들장이다. 실내에다 정원 또는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놓으면 중정이 된다. 중정이 있으면 바깥에 나가지 않고도, 집 안에서 풍경을 관망할 수 있다. 바깥 경치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풍경을 본다는 것이 중정의 장점이다. 그다음에는 구들장이다. 피로는 등 쪽의 신경과 근육이 굳는 것이다. 이 등짝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한 장치가 바로 절절 끓는 구들장이다. 끓는 구들장에서 잠을 자고 나면 피로가 풀린다. 그다음에는 다실이다. 다실은 왜 필요한가?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받기 위해서다. 집 밖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집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해주는 장치가 다실이다. 21세기는 과학적 진리에 의해서 종교적 신념이 해체된 시대다. 다실은 현대인이 집 안에서 신성 神聖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부산의 달맞이고개에 있는 이기정 二旗亭은 한국적인 다실의 한 예를 보여준다.
달맞이고개는 특이한 곳이다. 해운대 바로 옆이다. 도심에서 툭 터진 바다를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멀리 가지 않고 도심에서 바다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그리고 고개를 따라 한 시간 넘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해풍 海風을 쐬면서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약초는 소금기가 스며 있는 해풍을 받아야 약성이 증가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신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해풍이 약이다. 머리의 열을 내려준다. 이기정은 달맞이고개라는 지리적 이점을 먹고 들어간다. 달맞이고개에 자리한 6층 건물에서 4층은 다실 주인인 고명 古茗 선생의 거주 공간이고, 차회는 5층과 6층에서 진행된다. 5층은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바다를 볼 수 있다. 유리가 주는 공능 功能은 방 안에 편안히 앉아서 바다를 관조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바다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먼저 한량없이 광활하다.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는 공간을 접해보아야 인간은 상상력이 생긴다. 바다는 수평선이 보인다. 그래서 ‘한없는 넓음’이라는 개념을 인간에게 이해시켜줄 수 있다. 각종 구조물로 둘러싸인 대도시에 살다 보면 생각이 막혀버린다. 넓히기가 어렵다. 바다를 보면서 우리 마음도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바다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상하게 한다.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해인삼매 海印三昧이다. 바다는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친다. 출렁거린다. 폭풍 속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출렁거리는 노도 怒濤를 바라보는 것도 독특한 경험이다. 잔잔한 바다가 이처럼 거친 노도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의 변환이 이렇지 아니한가! 그런데 그 파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같다. 잔잔한 바다와 파도치는 바다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불행과 행복의 본질이 같은 것이다. 단지 현상이 다를 뿐이다. 그 현상에 현혹되면 안 된다. 그런가 하면 바다는 햇볕을 받으면 반짝인다. 바닷물이 수증기로 변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지상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다. 범상한 존재에서 거룩한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달맞이고개의 이기정에서 차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면 이러한 명상을 할 수 있다.

2 이기정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부산 숙우회 회원들이 달맞이고개의 다실 이기정에서 다법을 행하고 있다.


1 이기정을 찾는 숙우회 회원들이 발우 공양하는 식당이 6층에 마련되어 있다.

이기정에 구질구질한 소품은 보이지 않는다. 벽장에다 수납공간을 마련하여 어지간한 소도구는 다 집어넣었다. 다실은 번잡한 도구나 장식이 많으면 안 된다. 실내에 물건이 많으면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벽장의 장식도 ‘문틀’ 디자인으로 되어 있는데 보는 순간 고졸 古拙하다는 느낌을 준다. 고졸은 왜 좋은가? 편안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주어서 좋다. 고 古는 옛것을 말하고, 옛것은 조상들이 썼던 형식이므로 익숙하다. 익숙한 디자인은 편안함을 준다. 새로운 것은 긴장을 준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끝없이 긴장해야 한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해야 한다. 그러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상하고 있으면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옛것이 주는 혜택이다. 문틀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늘 보아왔던 것이다. ‘ㅁ’자가 기하학적으로 반복된 디자인이 문틀이다. 단순한 것은 졸 拙의 미학을 지니고 있다. 졸은 무엇인가. 못났다는 것 아닌가. 못난 것은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잘난 것은 불편할 수 있다. 그래서 ‘고’와 ‘졸’이 만나면 편한 것이다. 그 고졸이 ‘문틀’이라는 디자인으로 구현되었다. 이기정 다실은 고졸함을 품고 있다. 벽지도 흰색이다. 흰색은 높은 색이다. 백의민족이라 하지 않던가! 흰색은 현실적인 색깔이 아니다. 초월적인 색이다. 그래서 흰색은 사람의 마음을 승화 昇華시키는 힘이 있다. 승화는 성스러움으로 다가가는 첩경이다. 다실은 일상을 초월하는 공간이다. 흰색과 궁합이 맞는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기정은 바다, 고졸, 흰색의 3요소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음악이다. 문틀로 덮인 벽장에는 마란츠 오디오가 내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음악이 나온다. 인간은 눈보다 소리에 더 민감하다. 눈은 앞에 있는 광경만 볼 수 있지만, 귀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귀가 눈보다 더 수승한 감각기관이다. 인간은 소리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소리에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기정은 인도의 명상 음악도 틀어놓는다. 인도 악기 시타르에서 나오는 소리는 내면을 울리는 파워를 지니고 있다. 시타르의 명인이었던 라비 상카르의 음악. 생로병사의 거대한 흐름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거대한 강물의 흐름처럼 우리 인생이 이처럼 흘러가는구나 하고 명상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한잔의 향내 나는 차를 마시며 라비 상카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인간세계에 와서 고생한 보람이 있다. 삶에 시달린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2 회원들이 차회를 위한 예복을 갈아입는 옷방 겸 탈의실.
3 이기정을 운영하는 고명 선생의 티베트 앤티크 가구로 꾸며놓은 중국식 다실.


이 다실에는 어떤 가구가 있는가. 가구는 집주인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곳에는 티베트 가구가 많다. 티베트 목가구는 원색적이다. 붉은색이 많이 들어간 가구이다. 바다, 고졸, 흰색이 한편이라면 그 반대쪽에 배치된 붉은 원색 가구가 티베트 가구다. 담백함 반대편에는 강렬한 원색이 있다. 음이 있다면 양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가 티베트 가구라고 보인다. 다른 공간에서 잘 볼 수 없는 가구인데, 어떻게 이 집에는 이 가구가 여럿 있는가. 이기정 주인인 고명 선생에게 물었다. “티베트 가구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화려하면서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화려하면 눈에 거슬리기 쉽다.


6층에는 중국식 입식 다실을 마련해놓고 중국차의 다도를 시연한다.

이기정을 계획한 고명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수가 없었다. 해볼 만한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차 茶를 좋아했다. 다방을 해야겠다 싶어 부산 시내에 소화방 素花房이라는 다방을 차렸다. 다방은 물장사에 속한다. 물장사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때가 80년대 초반이었다. 범인이 쉽게 갈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것이라고나 할까. 하루에 수백 개의 찻잔을 수건으로 닦는 일이 주된 일과였다. 그 찻잔들을 닦으면서 내면을 응시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차 차에 몰두하게 되었고, 다법 茶法의 세계로 나아갔다. 다법은 차를 마시는 의례를 가리킨다. 다례 茶禮와 같은 말이다. 우리말에 ‘차례 지낸다’는 말은 남아 있지만, 그 차례는 중간에 실전 失傳되었다. 그런데 고명은 이 실전된 다례(차례)를 복구하는 일에 자신의 청춘을 바친 것이다. 우선 일본의 다례(다법)를 참고했다. 일본의 다례도 따지고 보면 백제에서 넘어간 것이 아닌가. 중심부에서 없어진 것이 주변부에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다례가 바로 이러한 경우다. 고명은 일본의 다례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다법을 가다듬어나갔다. 그 다법이 1백2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해조음 海潮音 다법’ ‘만다라 다법’ 등이다. 다법을 행하려면 대략 30분에서 1시간이 걸린다. 다법을 행하는 동안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다법을 행하다 보면 일단 그 동작들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딴생각을 하면 다법을 따라갈 수 없다. 실수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수십 가지 동작을 한다는 것은 다른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근심과 걱정을 잊는 것이다. 잡념이 줄어든다. 걱정을 줄이고 잡념을 줄인다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고명 선생에 의하면 다법이 선법 禪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1 7층 다락방으로 통하는 복도.
2 6층 식당 옆에는 회원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휴게 공간이 있는데 한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명상 할 수 있도록 책상을 놓았다.



3 6층에 있는 입식 다실.
4 7층 다락방에는 고명 선생이 수집한 토속품을 보관해놓았다.


“다법이란 무엇인가?” “차는 풍류가 아니다. 차는 혁명이다.” “왜 차가 혁명인가?” “차를 마시면 우리의 의식주 전체가 바뀐다. 의식주가 바뀌면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다. 생각이 바뀌면 그게 혁명이 된다.” “차를 마시면 어떻게 의식주가 바뀐단 말인가?” “다법을 행하다 보면 채식을 많이 하게 된다. 과식을 피하고 소식을 한다. 담백한 먹을거리를 좋아하게 된다. 옷도 그렇다. 복장을 갖춰야 한다. 전통적인 디자인과 미감을 갖춘 옷을 입게 된다. 화려하기만 하고 족보가 없는 옷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복장의 혁명이 온다. 사는 집도 달라진다. 실내 인테리어가 바뀐다는 말이다. 소파, 벽걸이 TV, 침대를 집 안에서 없앤다. 그러면 공간이 넓어진다. 대신 그 공간에 다실을 만든다. 식구들이 같이 다실에서 차를 마시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다실에서 차 마시며 다투겠는가?” “다실을 꾸미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는가? 최소한의 요건이 무엇인가?” “간단한 차 도구, 차상 茶床, 그리고 꽃을 꽃아두면 된다. 여유가 있으면 좋은 향을 피워도 좋다. 공간은 3평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다. 차는 다섯 명 이상 모여 마시면 소란스러워진다. 다섯 명 이내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 “그 정도라면 아파트에도 만들 수 있겠다” “그렇다. 이기정 회원 가운데는 상당수가 아파트에다 다실을 만들어놓았다. 아파트와 다실은 궁합이 맞다.”
고명이 창안한 1백20가지 다법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보니, 명상다법 冥想茶法과 접빈다법 接賓茶法이다. 접빈다법은 손님을 접대하는 다법이니 비교적 단순하고, 명상다법은 보다 집중도가 높은 다법이다. 평상시에는 접빈다법, 시간이 날 때는 명상다법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두 가지 일이 바로 ‘봉제사’와 ‘접빈객’이었다. 봉제사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일이므로 수직적인 관계에 대한 봉사였다면, 접빈객은 수평적인 관계에 대한 봉사였다. 고명 선생의 다법도 양반 사대부 집안의 두 가지 일과 비슷하다. 고명은 말한다. “망가진 한국의 고급 문화를 복원하는 방법은 차를 마시는 일이다. 차가 혁명이다.” 부산 달맞이고개의 이기정은 그러한 혁명의 산실이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실전에 강한 강호동양학으로 유명한 그는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으로 얘기한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편백나무 숲 속에 있는 휴휴산방 休休山房에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도가 道家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조용헌의 명문가> 등의 저서가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