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덴마크 대사 호이니스 씨 가족(왼쪽부터 큰딸 샬롯, 호이니스 대사, 둘째 헬레나, 막내 크리스찬 그리고 호이니스 부인). 원래 안뜰이었던 자리에 호이니스 대사의 아이디어로 다이닝룸을 만들었다.
덴마크를 제대로 알려면 평범한 가정집을 꼭 한번 방문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디자인 강국 덴마크의 진면목은 잘 차려놓은 박물관이나 디자인 숍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 공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학생들의 스튜디오나 작고 소박한 가정집을 방문하더라도 유명 디자이너의 고급 가구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덴마크 사람들의 집 꾸미기 실력은 가히 수준급이라고.
업무상 북유럽을 자주 오가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주한 덴마크 대사관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지난 5월 성북동으로 이사한 주한 덴마크 대사 폴 O. G. 호이니스 씨 가족이 살고 있는 대사관저로의 초대였다. 평범한 가정집만 가봐도 덴마크 디자인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하는데, 이국 땅에서 덴마크 문화를 대변하는 집에 다름 아닌 대사관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관저 안으로 들어서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장면이 펼쳐진다. 공식적인 외교 행사나 모임이 빈번히 이루어지는 대사관저의 특성상 그 나라의 전통 가구나 민속적인 장식으로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예상 가능한’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덴마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가구가 곳곳에서 눈에 들어올 뿐이다. 이제는 안데르센 동화나 레고 블록만큼이나 ‘덴마크’ 하면 쉽게 떠오르는 한스 웨그너나 아르네 야콥센, 베르너 판톤의 의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상투적인 대사관저 스타일을 벗어버리니 오히려 ‘덴마크다움’이 한층 강조된 모습이다. 새로운 대사관저로 ‘모던 데니시 디자인’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대사의 인사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1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면은 2층 천장까지 유리창으로 연결되어 있다.
2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이 눈길을사로잡는 이 흔들의자는 조개껍데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앉아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편안하다. 토마스 피터센이라는 젊은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이름은 스팅레이 Stingray.
“한국에서는 가구를 고르고 집 안을 가꾸는 일에 남자가 별로 관여를 안 한다지요? 덴마크 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도 기본적으로 인테리어와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요.” 그의 말에 호이니스 부인은 “특히 대사님은 더 관심이 많아요”라며 운을 뗀다. 그도 그럴 것이 가구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응접실 소파는 포에르솜과 히오르트 로렌첸 Foersom & Hiort-Lorenzen이라는 디자이너가 에릭 요르겐센 Eric Jorgensen과 손잡고 만든 제품입니다. 덴마크에서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디자인이에요. 일본 대사로 부임하던 시절에도 대사관저에 마련해놓고 싶었지만 당시 일본에서 구할 수가 없었어요.” “소파 세트 옆의 원형 테이블과 함께 놓인 렉스 체어를 보세요. 마치 접어서 모양을 만든 것 같지요. 크리스티나 스트랜드 Christina Strand라는 젊은 여자 디자이너가 만들었어요. 한번 앉아보세요. 보기와 달리 정말 편안한 의자예요.”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위의 펜던트 조명은 시몬 크르코우 Simon Karkov의 디자인인데 이 사람의 디자인의 특징은 어디에서 보아도 전구가 직접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미술관 도슨트 못지않은 솜씨로 디자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호이니스 대사의 모습이 놀라울 뿐이다. 문득 덴마크는 왜 자동차도 패션도 아닌 가구 디자인인지 궁금해졌다. “날씨 때문입니다. 덴마크는 겨울이 길어요. 춥고 눈이 많은 겨울이 길어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그러니 인테리어와 가구 디자인이 발달한 겁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장인 정신에 대한 자부심과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오늘의 덴마크 가구 디자인을 이끌어왔단다. “디자인을 부유층이나 상류 사회에서 누리는 것이라 여기는 경우가 있지만, 덴마크 사람들은 디자인을 부자나 빈자나 모두 똑같이 누릴 수 있는 거라고 여겨요. 일종의 디자인 민주주의라고나 할까요? 좋은 디자인은 비싼 값을 지불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죠.”
3 호이니스 대사가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의자 렉스 Rex.
4 학교에 갔던 세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니 크고 웅장하게만 여겨지던 주한 덴마크 대사관저가 아늑한 가정집으로 느껴진다. 천장에 달린 펜던트 조명등은 시몬 크르코우가 디자인했다.
5 대사관저 곳곳에 ‘몬타나 Montana’ 책장이 벽걸이로 설치되어 있다. 몬타나는 42개의 기본 유닛과 4가지 깊이, 50가지 컬러를 조합해 5천만 가지 조합이 가능한 시스템 가구다.
2층으로 오르니 다섯 가족의 생활 공간이 펼쳐진다. 텔레비전과 DVD 플레이어, 컴퓨터와 디지털 피아노, 캐주얼한 디자인의 섹셔널 소파가 놓여 있는 가족실은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하고 편안한 풍경이다. 직업상 해외로 계속 이사를 다니기에 선대로부터 물려받거나 개인적으로 아끼는 살림살이는 대부분 덴마크 집에 남겨두었다. “덴마크 집에는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2백 년이 넘은 클래식 가구도 있고, 고조할머니가 직접 수놓은 1백 년 이상 된 식탁보도 있어요.” 덴마크 가정에서 1백 년 이상 된 대물림 가구나 생활용품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요즘 한창 서울에서 유행하는 북유럽 빈티지 가구의 90%가 덴마크산이라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간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조지 젠슨 Georg Jensen의 실버웨어를 물려줄 거예요. 그의 커트러리는 너무나 아름답지요.” 가구 산업의 비중이 큰 탓에 덴마크 디자인 하면 흔히들 가구만 떠올리지만 실상 덴마크는 건축을 비롯해 포슬린, 테이블웨어 등 생활용품 디자인도 뛰어나다며 호이니스 여사가 말을 잇는다. 대사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세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낯선 이들의 등장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열 살배기 소년 크리스찬. 멋지게 기타를 연주하며 카메라 앞으로 나서보지만 큰누나 샬롯의 제지에 곧바로 기타를 내려놓는다. 둘째 헬레나의 방을 들여다보니 그 감각이 범상치 않다. 잡지에서 오려낸 패션모델 사진을 모아 디자인한 콜라주 벽 장식이 수준급이다.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사관저는 앰배서더 호이니스의 공관에서 미스터 호이니스 가족의 프라이빗 홈으로 탈바꿈한다.
1 대사관저의 리빙룸 전경. 덴마크 에릭 요르겐센사의 소파 ‘EJ 60’과 신진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스트랜드가 디자인한 렉스 체어와 테이블 세트가 놓여 있다. 소파 세트 위의 조명등은 호주 오페라 하우스를 디자인한 이외른 우촌 Jorn Utzon이 오페라 하우스를 조명등으로 재현해낸 것이다. 콘솔 위에 세트로 놓여 있는 테이블 스탠드 조명은 한스 샌드그렌 야쿱슨이 디자인한 ‘라돈 Radon’.
2 호이니스 대사 부부.
3 대사관저로 들어서는 입구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빈티지 가구는 195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로즈우드로 만들었다. 테이블 램프는 시몬 크르코우가 디자인했다.
글로벌 노매드로 유목민적 삶을 살아가는 외교관 가족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두 딸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났어요. 일본에서 5년, 한국에서 4년, 벌써 9년째 아시아에서 살고 있네요.”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덴마크에서의 경험이 너무 적은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라며 호이니스 부인은 말한다. “얼마 전에 우리 부부는 크리스찬을 데리고 비무장지대와 동해안에 다녀왔어요. 반세기 동안 사람의 손길로부터 보호받은 비무장지대는 원시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에요.” 덴마크에서 지인이 방문한다면 가회동, 삼청동과 함께 꼭 한번 데려가고 싶은 곳이라며 호이니스 부인은 주저 없이 비무장지대를 꼽는다. 내친김에 덴마크를 방문한다면 어디를 추천하겠느냐고 물었다. “데니시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호텔 SAS 로열(www.radissonsas.com)에 꼭 한번 묵어 보세요. 그 유명한 에그 체어도 이 호텔 로비를 위해 디자인한 것이고, 건축 설계부터 가구 디자인, 문고리와 수도꼭지 하나까지도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것이지요.”
대사관저 2층은 호이니스 대사 가족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 공간으로 꾸몄다.
한창 패션과 외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둘째 헬레나의 방. 패션모델의 캣워크 사진을 오려 모아 콜라주한 벽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침대 위 아기자기한 인형들을 보면 아직 열두 살 ‘꼬마’ 아가씨임은 분명하다.
현재 호텔은 1958년 당시의 오리지널 소재와 컬러를 사용해 원형 그대로 복구해놓았단다. 덴마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에서 언제나 1등을 하는 나라. “덴마크에는 빌리언에어를 꿈꾸는 사람이 없어요.” 뜬금없는 천만장자 이야기다. “만약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너무 큰 꿈이나 야망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인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라며 호이니스 부인이 말한다. 그의 말에 덴마크 디자인의 힘은 길고 긴 겨울 날씨도, 유명 디자이너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매일의 삶에서 행복을 꾸려가는 소박한 마음이 생활 디자인의 발전을 가져오고, 디자인은 다시 삶의 풍요를 이끌어내는 순환의 고리. 이것이 바로 덴마크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원천이자 덴마크 디자인의 힘이 아니겠는가.
1, 2, 3 북유럽의 대표적인 공에품인 유리 제품이 곳곳에서 포인트 역할을 한다.
4 2층 패밀리룸 한쪽에서 발견한 독특한 디자인의 촛대는 종이로 만들었다.
- 주한 덴마크 대사 폴 O. G. 호이니스 가족 행복을 디자인하는 데니시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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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과 수교 50주년을 맞는 덴마크의 주한 대사관저에서 <행복>에 초대장을 보내왔다. 성북동 산자락에 위치한 대사관저는 덴마크 디자인의 오늘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폴 O. G. 호이니스 대사 가족의 다섯 식구가 서울에서 엮어가는 데니시 라이프를 만나본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