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지 바른 문살, 격자무늬 창문 등 한국의 여러가지 형태의 문을 보고 놀랐습니다. 닫혀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열려 있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소통이 가능한 것이 한국의 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1 주말 아침마다 커피에 마들렌 한 조각으로 프랑스 식의 긴 티타임을 가지는 로르 쿠드레 로 원장 부부.
2 어머니가 선물해준 스탠드. 어느덧 스무 해를 같이했다.
‘집 구경’ 싫어할 사람 있을까만은, 특히 외국인이 사는 집을 들여다보는 것은 종종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준다. 공간 속에 다채로운 이국 문화가 그대로 스며들어 낯선 볼거리도 많거니와 그네들 눈에 우리 것이 어떻게 비쳐졌는지 반사경처럼 그대로 투시되는 까닭이다. 프랑스 문화원 로르 쿠드레 로 Laure Coudret Laut 원장의 집 또한 그러하다. 2008년 가을 주한 프랑스 문화원에 새로 부임하면서 살림을 차린 지 반 년도 채 안 된 방배동 보금자리. 육중하고 질박해 보이는 한옥 문짝으로 보기 싫은 에어컨을 감춰놓는 등 그는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천착하는 프랑스인 특유의 타고난 기질에 세계를 두루 다니며 무엇이든 적절하게 매치시키는 센스를 더해 한국에서의 첫 번째 보금자리를 완성했다.
가족은 닮은 꼴! 어떤 이는 말했다. 고독한 사람이 영혼에 거는 최면이 수집이라고. 작가 필립 블롬은 그의 책 <수집>에서 ‘수집은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라고 말했다. 결국 무언가를 수집한다는 것은 내면의 발로다.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들어 고이고이 모아두는 것, 그것이 하나 둘 그 수를 더해가면 소소한 수집이 어느새 방대한 컬렉션이 된다. “저는 스물한 살 때부터 커피 잔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은 책을 모읍니다. 특히 각 나라의 대표적인 문학가 책이요. 그리고 제 딸은 부채 컬렉터예요.” 아무리 유유상종이라 하지만 이런 조합이 또 있을까. 이 가족은 외교관인 아내이자 엄마인 그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자연스레 이방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가족 모두 짧게는 한두 해 만에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매번 짐을 싸고 푸는 삶의 동반자와 같은 수집품이 있기에 타국에서도 늘 이방인으로 고립무원하지 않고 즐기며 살 수 있었다. 문학 작가인 남편의 서재에는 이상, 황석영, 이문열, 김유정 등 유수한 한국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나란하게 꽂혀 있다. 책장 사이사이에는 동양적인 도자기들이 칸막이 역할을 하며 나라별로 문학 작품을 구별 짓고,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찍거나 모은 사진은 다소 무거워 보이는 장서들 사이에서 보는 재미를 안겨준다. 일본에서 태어난 딸은 침대 위에 소소한 형상의 부채를 실로 매달아놓아 마치 설치미술과도 같은 진풍경을 연출했다. 로르 쿠드레 로 씨는 “보통 컬렉션이라고 하면 고가의 가치가 있는 것을 생각하는데 저희는 아주 사소한 것도 가치를 부여해 수집합니다. 애정을 가지고 수집품을 모으다 보면 정리하는 방법과 진열하는 감각이 자연히 생겨납니다”라고 말한다.
거주지를 결정할 때 지켜야 할 원칙 로르 쿠드레 로 씨는 지금까지 스무 번 넘게 거주지를 옮겨왔지만 매번 새집을 꾸미는 것은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소파 하나, 서랍장 하나 들여놓는 일에도 모두가 함께할 만큼 삶에서 집이라는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거주지를 결정하는 데 세 가지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바로 넓은 공간, 풍부한 채광, 좋은 전망이다. 워낙 소품이 많은 탓에 공간이 넓어야 하고, 창문으로 스며 들여오는 자연 채광이 풍부해야 하며, 매일 아침 바라보는 풍경이 삭막하지 않아야 한다. 이삿짐을 꾸리고 푸는 데는 가족 모두 도통했다. 각자 무얼 맡아야 할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짧은 시간 내에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타지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유혹을 느끼지만 그것 때문에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세월의 더께가 쌓인 것들이 집 안에서 밀려나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고려해 물건을 구입한다. 이처럼 새것과 헌것의 조화로운 앙상블은 이 가족이 인테리어에서 가장 염두에 두는 부분이다. “일단 가구를 먼저 배치하고 며칠 지내보면서 서로의 느낌을 이야기합니다. 소파에 앉았을 때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이런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방에는 할머니의 치마폭이 떠오르는 따뜻한 패브릭 한 점을 매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눠요. 그런 다음 그에 따라 필요한 작품과 소품을 다시 꺼냅니다.” 으레 귀찮고 번거로워 손사래를 칠 일을 이들은 기꺼이 감당하며 이것을 통해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다져나간다.이들에게 인테리어는 가족 간의 팀워크다.
1 한국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1904년도 프랑스 신문. 황학동에서 구입한 삼베 위에 매달아 멋진 소품으로 완성했다.
2 로르 쿠드레 로 원장의 친구가 직접 만들어 선물한 작품. 캔버스 위에 세운 50여 개의 열린 문은 원장의 사람에 대한, 문화에 대한 오픈 마인드를 형상화한 것.
3 일본에서 태어난 딸의 부채 컬렉션. 실로 매달고 벽에 붙이는 등 디스플레이 감각이 어머니를 빼닮았다.
예술은 마인드 스파와 같은 것 로르 쿠드레 로 씨는 프랑스 문화원 원장으로서 늘 예술을 일로 접하지만 그림 한 점, 영화 한 편을 통해 마음에 낀 세상의 때가 걷히고 뭔가 시원하고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이제는 좋은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제법 수준 높은 전시가 전 세계를 순회하기 때문이죠. 그런 기회를 마음껏 누리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 아닐까요?”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문문하지 않은 예술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수많은 초대형급 프랑스 관련 전시가 열려왔다. <루브르전>이 그렇고 <만레이 특별전>이 그렇다. 최근에는 <프랑스국립퐁피두센터전>이 한창이다. 그리고 이 모든 전시의 중심에 프랑스 문화원이 있다.
로르 쿠드레 로 씨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국립퐁피두센터전>은 사전에 퐁피두센터 관장을 비롯해 수석학예실장 등이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와 머리를 맞대고 충분한 준비 기간을 거쳐 준비한 것이다. 유럽에서 건너오는 통상적인 대규모 전시와 달리 ‘화가들의 천국’이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는 <프랑스국립퐁피두센터전>은 테마를 정해 그에 맞은 작품을 선별하는 등 퐁피두센터 측에서도 최초로 시도하는 전시 방식이다. 그 과정에서 좀처럼 해외 반출이 쉽지 않은 작품이 대륙을 넘나드는 일화를 겪기도 했다. 앙리 마티스의 작품 중 ‘폴리네시아, 하늘’ 같은 그림이 한 예. 워낙 대작으로 캔버스 몇 폭을 이어 붙여 그린 이 그림은 퐁피두 미술관에 전시한 이후론 단 한 번도 해체한 적이 없으나 이번 서울 전시를 위해 전체 그림을 일일이 해체해 나눠 운송한 뒤 다시 조합했다. “파리 퐁피두센터 관계자들은 한국인이 트렌드에 민감하고 적극적인 만큼 이번의 새로운 전시 방법에 남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번 전시가 성공하면 앞으로 유럽 순회 전시에도 이 방법을 적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로르 쿠드레 로 씨는 올 연말 선보일 또 하나의 초대형 전시 <베르사유전>을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작품은 물론 가구와 소품까지 들여올 예정이어서 더욱 기대가 된다. 로르 쿠드레 로 원장에게 예술 애호가로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남다른 방법에 대해 조언을 구하니,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예술 작품은 보면 볼수록 그 안에서 함축적인 의미를 더 많이 얻어낼 수 있으니 그저 많이 접하면서 즐기세요.이것이 제가 터득한 진리랍니다.”
4 일본, 중국, 그리고 최근 한국의 통영에서 구입한 신발들. 로르 쿠드레 로 원장의 소소한 수집품 중 하나다.
5 로르 쿠드레 로 원장은 한국 부임이 결정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한국 문학 서적을 구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종종 티타임을 이용해 문학 토론을 벌이는 이 부부는 최근 이상, 김유정의 작품에 심취해 있다.
6 황학동에서 구입한 한옥 문짝으로 보기 싫은 에어컨을 가려놓았다.
- [아름다운 집] 프랑스 문화원 워장 로르 쿠드레 로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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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프랑스 문화원에 새로 부임한 로르 쿠드레 로 원장. 지금까지 스무 번 넘게 거주지를 옮겼지만 그에게 집을 꾸미는 일은 가족 간의 팀워크를 다지는 소중하고도 가치 있는 시간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