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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만 가지 경치를 안고 사는 성북동 집
북한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성북동. 그 꼭대기에 오르면 빌딩들로 숲을 이루는 서울 시내와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던 성벽이 모두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6백 년 고도의 숨결과 오늘의 삶을, 과거와 오늘을 함께 돌아보게 만드는 ‘만 가지 경치’를 품고 사는 성북동 주택을 찾았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가장 고급 주택가는 성북동 城北洞이다. 한양 도성 都城의 북쪽에 있는 동네라고 해서 성북동이다. 조선시대에 성북동은 도성 밖에 있었으므로 사람이 살 만한 주택지가 아니었다. 심산유곡이었다. 서울 주변의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은 대단한 암산들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보아도 수도 주변에 이처럼 장엄하고 커다란 산들이 포진한 곳은 없다. 오로지 서울만 그렇다. 북한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동네가 성북동이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성북동은 늑대, 멧돼지, 산토끼와 같은 각종 산짐승이 사는 깊은 산골이었다. 물론 인가도 드물었다. 성북동에 제대로 된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 후반이다. 간송이 1만 평 대지에다 문화재와 미술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북단장 北壇莊을 세웠고, 인촌의 동생인 김연수 씨 별장이 있었고, 당시 금광을 캐서 재벌이 된 ‘백 白 부잣집’이 있었을 뿐이다. 길상사 터가 원래 백 부잣집이 있던 자리다. 이 세 집 외에는 제대로 된 집이 없었다. 그러다가 6・25전쟁 이후로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갈 데 없으니까 성 바깥인 이곳에 몰려들었다. 무허가 판잣집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박 대통령이 보기 싫다고 이 판잣집들을 관악구 봉천동 쪽으로 철거시켰다. 그러고 나서 성북동에 고급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평창동과 마찬가지로 성북동도 1970년대 후반부터 고급 주택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평창동이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기운이 너무 강한 터라면, 성북동은 약간 온화한 편이다. 바위의 노출이 평창동보다 덜하기 때문이다. 평창동이 고기를 바짝 구운 ‘웰던’이라면, 성북동은 적당히 구운 ‘미디엄’이라고나 할까. IMF 때에도 평창동은 빈집이 많이 나왔지만 성북동은 빈집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재력도 있는 동네이지만 터가 좋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집을 내놓지 않는 것이다. 터가 좋다는 것은 무엇인가?


집 안에는 동서양과 시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소품과 가구가 즐비하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세계 각지에서 살아온 안주인의 안목이 엿보이는 물건들이다.

성북동에 자리 잡은 이미자 씨 집에 가보면 성북동이 정말 터가 좋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집은 어떤 점이 좋은가?” “우선 전망이 좋다. 세계 어느 대도시를 가보아도 서울만큼 전망이 좋은 곳은 없다. 서울의 특징은 커다란 산자락이 입체적으로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런던, 뉴욕, 파리, 북경, 동경을 가보아도 산이 없다. 그냥 밋밋한 평지이다. 시내 도심에 서울처럼 큰 산이 보이는 경치는 없다. 물론 이탈리아의 로마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는 산이 있다. 산이라기보다는 큰 언덕이라고 보아야 한다. 로마에도 일곱 군데 정도 언덕이 있고 리스본에도 일곱 개의 언덕이 있다. 이들 언덕이 있어서 전망을 만들어내지만, 서울의 북한산처럼 산자락이 길고 높지 않다. 서울은 산이 클 뿐만 아니라 언덕 사이가 넓다. 그래서 그 사이에 집이 많이 들어서고 도로도 난다. 여러 가지 다양한 전망이 조성된다. 어느 경사면에 집을 짓느냐에 따라 앞으로 전개되는 전망이 각기 다른 것이다. 그러나 리스본은 언덕 사이가 좁다. 스케일이 적다. 더군다나 성북동에서 보면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6백 년 된 성벽 城壁이 북한산 자락을 타고 아직 남아 있다. 세월이 6백 년이 된 성벽이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는 서울밖에 없다. 만리장성이 북경 외곽에 있지만 북경의 주택가에서 이 장벽을 바로 바라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집에서 앉아 서울의 성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이자 축복이다. 이 성벽을 보면서 역사와 인간의 삶을 관조해볼 수 있는 것이다. 6백 년의 세월을 생각하고, 현재 나의 삶을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해 있다는 것은 시간의 연속성을 느끼게 한다. 이 시간의 연속성은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아! 내가 6백 년의 세월과 같이하고 있구나, 나 혼자 동떨어져서, 고립되어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굉장히 큰 장점이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이 성벽 밑에다가 조명을 설치했다. 밤에 조명을 비춘 성벽을 바라다보면 중세의 고성 古城에 내가 들어와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앤티크 속에 들어와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도시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이곳 성북동에서 살고 있는 외국의 많은 대사들도 이구동성으로 이 점에 동의한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전망을 만끽할 수 있도록 거실에는 등받이 없는 소파를 배치했다.

나는 이미자 씨의 이 말을 듣기 전에는 서울이 난개발로 인하여 지저분한 도시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나서 서울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 전망에 관한 관점을 형성하려면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안목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도시에서 직접 살아보아야만 한다. 이 집 주인인 이미자 씨는 세계의 대도시에서 직접 살아보았다. 대구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1960년대 초반인 열아홉 살 때부터 세계를 여행해볼 기회가 있었다. 20대 초반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지금의 남편인 앨런 팀블릭 Alan Timblick 씨를 만나 결혼했다. 팀블릭 씨는 영국인이다. 옥스퍼드를 나와서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이다. 남편이 금융업자이므로 직장을 따라 런던, 파리, 로마, 빈, 코펜하겐, 리스본, 취리히, 이스탄불 등에서 직접 생활해볼 수 있었다. 런던에서는 가장 부촌으로 알려진 해러즈 백화점 근처에서 살았다. 런던의 모든 은행은 런던 동쪽에 밀집해 있다. 식민지에서 수금해 온 돈을 여기에 보관 처리했다. 서쪽은 웨스트 엔드 West End라고 하는데, 여기에 은행가를 비롯하여 수백 년 된 오래된 부자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산다. 해러즈 백화점도 이 지역에 있다. 웨스트 엔드는 평지이므로 산이 없다. 따라서 나무나 숲이 보이는 곳의 집값이 비싸다. 집 가운데 네모난 형태로 정원이 있고 거기에 잔디와 나무가 심어져 있으면 스퀘어 square라고 해서 집값이 엄청 올라간다고 한다. 여기에 비하면 성북동은 집 뒤로 온통 숲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성북동은 동네 그 자체로 명품인 셈이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전망. 북한산 자락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성곽과 멀리 남산의 서울 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집은 이미자 씨가 직접 디자인했는데, 멋진 전망을 만끽하기 위해 ㄴ자 모양으로 꺾인 집의 각도를 90도가 아닌 120도로 설계했다.

지난여름에 이 집의 안주인인 이미자 씨를 따라서 집 뒤로 산보를 나간 일이 있었다. 성벽을 따라가다가 숙정문을 거쳐 다시 팔각정 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팔각정 올라가는 길은 심산유곡의 산길을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소나무와 바위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 그리고 공기도 좋다. 이런 상태라면 굳이 강원도 산골에 갈 필요가 없다. 여기가 산골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서울의 빌딩들이 눈앞으로 보인다. 집에서 10분만 걸어가면 산속이요, 고개를 돌리면 도심이 보이는 명당이 아닌가. 도심 속의 산골이요, 산골 속에 도심이 있는 셈이다. 약 두 시간 코스였다. 팔각정에서 이 집으로 내려오는 길은 차가 다니지 않고 걷기에 적당한 오솔길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전에는 이 근방에서 산책을 하려고 해도 도로에 다니는 자동차 때문에 방해를 받았는데, 이 오솔길로 인해 호젓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오솔길은 다름 아닌 팀블릭 씨가 구청에 건의를 해서 조성한 길이라고 한다. 팻말을 보면 팀블릭 씨가 건의해서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현재 팀블릭 씨는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이미자 씨는 남편을 따라 외국의 고급 주택가와 좋은 집들을 많이 보면서 살았다. 그 견문을 종합해서 성북동에다 자기 집을 지었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서 지었다. 집 구조와 방향, 그리고 내부 인테리어 등등을 손수 구상했다고 한다.


넓은 거실에는 크고 작은 응접 세트를 여럿 두었다. 손님이 적더라도 아늑하고 친밀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고, 손님이 많으면 많은 대로 편안하게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집을 지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어떤 것인가?” “바람이 중요하다. 통풍이 잘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을 지으면서 이 점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지역의 지형적 특성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 집을 지어야 한다. 성북동의 이 집터는 남쪽이 뻥 뚫려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이 막아주고, 좌측의 청룡 자락도 북악산 줄기이고, 우측의 백호 자락은 창덕궁과 청와대 쪽으로 내려가는 줄기가 감싸고 있다. 그래서 여름에는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분다. 지대가 높아 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집의 남쪽 사이드는 창문으로 전부 열 수 있도록 설계했다. 남쪽은 유리로 된 창문을 집중 배치한 것이다. 여름에 남풍을 최대한 많이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햇볕도 하루 종일 들어온다. 이 남쪽 방향에다 발코니, 안방, 옷방, 화장실을 배치했다. 화장실은 창문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햇볕과 바람이 들어와야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 통하지 않고 우중충한 화장실은 굉장히 답답한 느낌을 준다. 햇볕은 행복을 준다. 그렇다고 유리를 너무 많이 쓰면 부작용이 있다. 햇볕이 너무 많으면 정서 불안이 올 수 있다. 햇볕의 양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블라인드를 창문마다 설치했다.
북쪽은 어떤가. 겨울에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바람이 분다. 이 북쪽의 바람을 최대한 차단하는 구조로 집을 설계했다. 그래서 북쪽에다 방을 하나 더 만들었다. 방이 하나 더 있으면 북풍을 차단해주는 완충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보조 부엌, 차고의 화장실을 북쪽에 배치했다. 북쪽에 나 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현관이 나타난다. 현관에서 문 열고 들어오면 문이 하나 또 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와야만 비로소 방에 들어올 수 있다. 최대한 북쪽의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서 겹겹으로 문을 설치한 것이다. 그 덕택에 이 집은 겨울에도 실내가 따뜻하다. 집의 동쪽에는 서재, 남편 방, 화장실을 배치했다. 남편이 술 먹고 코 고는 날에는 안방이 아니라 남편 방에서 자도록 한다. 조용한 날은 안방에 와서 잔다. 그래서 남편 방에도 별도로 화장실을 설치했다.”
이 집을 보면 ㄴ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굽어진 각도가 120도쯤 된다. 보통은 90도 꺾어서 짓는다. 집주인은 120도로 더 넓게 꺾었다. 그 이유는 남쪽의 전망을 더 많이 즐기기 위해서이다. 각도가 넓어야 전망도 더 넓게 볼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왼쪽) 거실뿐 아니라 이 집의 모든 공간이 화려한 전망을 품고 있다. 서울 시내를 향해 남쪽으로 시원하게 열린 창을 통해 아침이면 맑은 햇살을 맞는다.
(오른쪽) 계단이 좁고 답답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계단 난간을 유리로 만들었다. 물론 집주인 이미자 씨의 아이디어다.


2층 발코니에서 바라다보면 서울 시내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정면에는 두산타워 빌딩이 보인다. 이 집에서 보니까 두산타워 빌딩이 뾰족한 첨탑처럼 보인다. 정면 한가운데로 이 빌딩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집터로 보면 두산타워는 문필봉 文筆峰으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인조 문필봉이라고나 할까. 중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동네 앞에다 벽돌로 만든 첨탑을 조성해놓은 경우가 간혹 있다. 왜 이 탑을 만들었는가 하면 문필봉 역할을 하라는 뜻에서이다. 인공 문필봉도 효과는 있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 두산타워가 이 집의 품격을 올려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 서울의 야경은 이 성북동 집에서 보는 것이 최고인 것 같다. 밤에 보름달이 떴을 때 발코니에서 보면 동쪽 산자락 위로 덩실하게 보인다. 달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것과 같다. 달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유리창 너머로 달을 보는 것과 다른 감흥을 준다. 유리창 너머로 보면 아무래도 감흥이 떨어진다. 겨울에 설경을 보는 것도 묘하다.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내가 서울 시내에서 돌아다녀 본 곳 가운데 워커힐 38층에 있는 ‘스타라이트 바’가 한강 야경을 보는 데 최고라면, 이 집은 서울 야경 보는 데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이 야경에 반해서 내가 이 집의 택호 宅號를 하나 지었다. ‘만경당 萬景堂’이 그것이다.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는 높은 집’이라는 뜻이다. 당 堂은 높은 곳에 위치한 집을 가리킨다. 만경당의 발코니 앞에다 의자를 내놓고 앉아서 서울 야경을 보면 인간사 흥망성쇠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집의 바닥은 연한 색깔의 대리석이다. 왜 연한 색깔을 썼는가?” “집이 크면 좀 진한 색깔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집처럼 집이 작으면 연한 색깔을 써야만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 대신 가구 색깔은 진한 고동색이 많다. 가구와 그림을 돋보이게 하려면 바닥 색이 연해야 한다. 이 가구들은 외국에 갔을 때 하나씩 사 모은 앤티크 가구들이다. 집에 소품이 너무 없으면 밋밋하다. 가구나 소품은 집주인의 취향과 성격을 나타낸다. 그 집에 가면 집주인의 성격이 어느 정도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 생각도 드러나지 않으면 곤란하다. 특히 집주인이 집에 들어왔을 때 자신을 반겨주는 물건이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이 집에 있는 소품과 가구는 대개 이러한 용도이다.”
성북동에 있는 만경당을 둘러보고 난 나의 소감은 이렇다. “사람이 살고 싶은 곳에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건강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은 큰 복이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실전에 강한 강호동양학으로 유명한 그는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으로 얘기한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편백나무 숲 속에 있는 휴휴산방 休休山房에 머물면서 동아시아의 도가 道家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저서로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방외지사>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조용헌의 명문가> 등이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