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가득한 집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화려한 이탈리아 가구로 채워진 집일까, 최첨단 IT 기기를 갖춘 집일까? 제 머릿속에 떠오른 행복이 가득한 집의 모습은 책이 가득한 집입니다. 사회학자 이리츠는 “현대의 집은 집이 아니다, 차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밖에서 활동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엔진을 끄고 차고에 세워두는 자동차처럼 집에 오면 정지해버리는 현대 가족의 모습을 비유한 말이지요. 요즘 ‘주거 문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제 귀에는 그 말이 ‘죽는 문화’로 들립니다. 우리말의 살림집은 사람을 살리는 집입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 사람을 살리는 살림집이 되려면 집에 책이 있어야 합니다. 책이 없는 집은 영혼이 없는 몸과 다름없습니다. 나폴레옹과 빌 게이츠는 세계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이 책벌레였다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는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못하거나 놀림감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던 그들이 훗날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출발점은 바로 책이었습니다. 집은 아이들이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책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라는 아이의 미래는 보증된 것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행복이 가득한 집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의 서가에서 책을 읽었다든지 어머니가 글을 쓰는 이라서 자연스럽게 책을 접했다는 겁니다. 저 자신도 지금 이 나이에 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글을 쓰며 활동할 수 있는 지식의 밑거름은 어릴 적 고향집의 책이었습니다. 형님이 네 분 계셨는데 형님들이 여름방학이면 집에 두고 간 책들을 읽었습니다. 어린 나이의 저에게는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일일이 사전을 다 찾아볼 수 없으니 문맥으로 짐작하거나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해 내용을 파악하곤 했습니다. 제 삶을 성공이라 말한다면 그 성공의 배경은 바로 그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면서 키운 상상력과 창조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이 책으로 가득 차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가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가득해진다는 것이지요.
온라인과 통신의 발달은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집전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가족 모두 각각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등 집을 경유하지 않고 개개인의 접촉이 이루어집니다. 가족의 기준을 한솥밥 먹는 이들로 규정하는 것도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가족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며 가족 구성원의 동질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디지털 시대는 그 어떤 때보다도 가족 구성원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가족 문화를 필요로 합니다.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온 가족이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지요. 책도 가족이 함께 읽어야 합니다. 책을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읽고 그 내용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눌 때, 책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루어질 때 깊이 있는 가족 문화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몸이 약해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는데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시곤 했지요.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읽어주셨던 <장발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읽어주시던 이야기가 <장발장>인지도 몰랐지요. 저는 지금도 책을 볼 때면 항상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제게 어머니는 지식의 몸, 영혼의 몸으로 기억됩니다. 책은 이렇듯 부모와 자식을 하나가 되게 해주는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가족을 넘어 사회가 하나로 묶일 수 있는 힘도 발휘합니다. 유대인들이 국토도 없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탈무드>라는 책을 공유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맹자 어머니는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어머니는 남이 만들어놓은 환경으로 이사하는 소극적인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그 안에서 우리 집만이라도, 아니 우리 아이 방만이라도 아이가 보고 듣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환경은 바로 지식과 영혼의 샘인 책입니다. 오늘날의 디자인은 장식이 아닌, 행동을 유발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디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아이들이 책을 읽는 공간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아름드리 나무 위에 지은 통나무집에 들어가 책을 읽고,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넓은 공간에 가면 뛰어놀고 싶어지지만, 좁은 공간에 가면 안정감을 느끼고 주변에 책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책을 보게 됩니다. 나무 위에 집을 지어 아이들에게 모험의 공간에서 책을 읽는다는 흥미를 유발시키고 텐트 속에 작은 램프 하나 더해 책 읽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같은 맥락으로 생활 환경 속에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만약 아파트 정원에 벤치를 하나 놓더라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아이들은 셰익스피어가 누구일까 궁금하게 되고, 다음에 어디서든 셰익스피어 책을 본다면 한 번쯤 관심을 갖게 됩니다. 산책길도 조깅만 할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도 산책을 하면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같은 책도 어느 곳에서 읽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집니다. 청명한 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읽는 책, 천천히 걸으며 읽기도 하고 가다가 바위가 있으면 앉아서 읽는 책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비꼬는 말로 요즘 세상에서 책 읽기 가장 좋은 곳은 감옥과 스키장입니다. 좁은 감옥에 갇혀서 할 일이 없으니 책을 읽게 되고, 스키장에서 다리를 다치면 별다른 도리가 없어 책을 읽는다 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북유럽이 문화가 발달하고 잘사는 이유는 바로 날씨 때문입니다. 추운 날씨때문에 좁은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으니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짓지 않고 골절을 하지 않고 햇볕이 충만한 곳에서 책을 읽을 만한 환경 그러한 집 그러한 아파트를 지어준다면 사람들은 불행 아닌 행복 속에서 즐거운 독서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아파트의 이름만이라도 작가나 시인 혹은 명작 소설의 주인공의 예쁜 이름을 따서 셰익스피어동, 상록수(심훈 소설)동 이라고 하면 독서 환경이 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글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