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세계적인 디자이너 론 아라드를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는 스튜디오에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의 모형들을 전시해놓았다.
(오른쪽) 론 아라드를 디자인계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얇은 철판을 구부려 만든 의자였다. 이후 그는 얇은 철판을 이용해 다양한 의자, 특히 예술적인 오브제로서의 의자를 지속적으로 소개해오고 있다. 이 의자는 최근 런던 디자인 아트 페어에서 선보인 작품.
번뜩이는 재치, 기발한 발상, 가끔은 난해할 정도로 실험적인 시도. 론 아라드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한결같다. 건축가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런던에 첫발을 디뎠던 35년 전에도, 세계 초일류 디자이너로서 작품 하나당 수천만 파운드를 벌어들이는 지금도 그는 늘 엉뚱하고 자기 색깔이 강한 예술가다. 그리고 또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의 파격적이고 기발한 작품에는 유머가 깃들어 있으며, 바로 그 점이 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초크 팜 로드 62번지. 길을 잃으려 해도 잃을 수가 없다. 스튜디오 이름이 ‘론 아라드’이기 때문. 알고 보니 회사 이름도 ‘론 아라드 어소시에이츠Ron Arad Associates’이다. 회사 간판도 필요 없을 만큼 그의 스튜디오는 강한 개성이 넘쳤고, 입구에서부터 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론 아라드의 창작 나라. 평범한 바깥 생활과는 철저히 단절된 느낌이었다. 스튜디오 바닥은 굴곡이 심한 곡면이었고, 각기 전부 다르게 생긴 수십 개의 의자가 입구를 채우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평형감각은 물론 방향감각조차 잃어버리려는 순간 론 아라드가 씩씩하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는 참 역동적인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의 첫인상이다. 5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옷차림이야 뭐 디자이너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이 남자 참 호기심이 많다. 인터뷰 내내 기자가 질문하는 만큼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취재원이라니…. 론 아라드의 수많은 아이디어는 어쩌면 이런 넘치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1 두오모 호텔 출입구. 이탈리아 리미니에 있는 이 호텔은 론 아라드가 디자인했다. www.duomohotel.com
2 LED를 이용한 조명 ‘미스 헤이즈Miss Haze’ 시리즈 중 스케치 조명기구.
3 얇은 판이 용수철처럼 감아 올라간 형태의 실험적인 조명기구.
슈퍼 디자이너, 그리고 두 딸 자랑 그칠 줄 모르는 아버지 영국 디자인의 상징적 존재로 현대미술계에서도 주목받는 아티스트이기도 한 론 아라드. 그는 디자인 교육자로 10년째 영국 왕립미술학교에서 요즘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국인 디자이너를 가르쳤고 지금도 계속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젊은 디자이너들에겐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가난한 무명 예술가였던 론 아라드는 21세에 무작정 런던으로 건너왔다. 런던을 선택한 건 영국 영화가 좋아서였다. 사랑 타령만 늘어놓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서 현실을 이야기하는 영국 사실주의 영화는 그의 젊은 피를 끓게 만들었으며, 이런 나라에 멋진 건물을 짓고 싶은 욕심에 건축을 공부했다. 하지만 건축업계에 잠시 몸담았던 론 아라드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 엉뚱하게도 가구 디자인이었다. 1980년대 초 자동차 좌석을 떼어내 만든 기발한 의자를 시작으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의자를 디자인했으며, 어느새 그가 만든 의자는 뉴욕과 런던의 경매 시장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후로 그가 선보이는 범상치 않은 디자인은 실용적인 가구이기보다는 예술적인 오브제로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한국의 가나아트도 그중 하나였고 몇 년 동안 그를 눈여겨보면서 전시회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1 추상 조형물을 연상시키는 의자 ‘빅 이지Big Easy’.
2 2005년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팰리스를 위해 디자인한 샹들리에. 2천5백 개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과 LED 전구를 사용해 만든 조명기구이다.
3 론 아라드가 디자인한 ‘톰박Tomvac’ 의자. 그의 베스트셀러로 한국 시장에만도 수많은 카피 의자가 돌아다니고 있다. 엉덩이의 굴곡을 따르듯 인체공학적인 곡선이 안락함을 선사한다.
4 리미니에 있는 두오모 호텔 객실의 욕실 모습.
예술가 부모 슬하에서 자란 론 아라드. 조각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조각 끌이 그의 유년시절 장난감이었다. 화가였던 어머니에게는 색감을 배웠다. 그의 그 독특한 색감은 바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 놀러 온 ‘어른’들은 항상 예술과 문화를 토론했으며, 부모님을 따라 다른 아티스트의 전시회나 스튜디오를 둘러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그에겐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특별한 수업이 따로 없었다. 그야말로 생활 속에서 예술과 디자인을 터득한 것이다. “영감은 삶에서 오고, 작업의 원동력은 작업 자체에서 오죠. 작업하는 도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샘솟아 종이를 많이 더럽힐수록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술가의 작품에는 예술가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다는 믿음이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유머와 철학에는 그의 모국 이스라엘이 담겨 있으며, 1960년대의 약간은 유치하고 진지했던 TV 프로그램과 20대의 젊은 론 아라드가 미치도록 동경했던 사실주의 영국 영화의 정신이 뒤섞여 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다. 인터뷰 내내 일어났다 앉았다 흥분하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열변을 토했던 그의 입에서 두 딸 이야기가 시작되자 수다쟁이 옆집 아저씨처럼 자랑이 그칠 줄 몰랐다. 사생활 노출을 지독하게 꺼리는 그이지만 딸 자랑만큼은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딸들을 학교에 바래다주고 데리러 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첫째 딸 라일Lail은 24세, 둘째 다라Dara는 15세가 되었다. 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아직도 가장 소중하고 즐겁다는 론 아라드. 1년 중 바쁜 일정을 쪼개서 어떻게든 휴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특히 첫째 딸 라일은 론 아라드의 예술적 감각을 이어받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의 블로그(www.myspace.com/lailarad)에 꼭 한번 들어가보라고 권했다. 론 아라드가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딸의 블로그이다. 한국에서 열리는 본인의 전시 홍보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1 영국 런던 북쪽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는 따로 간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론 아라드의 독특한 디자인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2 인터뷰 중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확인해주어야 했던 그. 이 책상 위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디자인을 만든다.
3 드리아데를 위해 디자인한 플라스틱 의자로 제조 기술이나 디자인을 전개하는 방식이 혁신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당신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건축도 하고 디자인도 하니까 둘 다이기도 한데, 아티스트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건축과 가구 디자인은 전혀 다른 세계니까요. 건축은 누군가의 요청에 맞춰서 특수한 기능과 목적을 가지고 짓게 되니까 의뢰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시간에 딱 맞추는 게 중요하죠. 하지만 가구 디자인은 아무도 나한테 부탁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만들 수 있죠. 누군가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고, 의논하고 상담할 일도 없고, 시청에 허락을 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 자유로운 작업이죠. 그렇다고 두 가지 중 하나를 특별히 선호하는 건 아니고, 둘 모두 즐겨요.”
그런데 왜 하필 가구였을까? 그리고 왜 의자였을까? 론 아라드는 여기에 대해서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고 만다.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재미있는 발상이 떠올라서 만들었고, 그걸 보여주니 사람들이 좋아했고, 그러다 보니 또다시 만들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가구 디자이너로 이름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은 언제나 그렇게 사소한 우연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독특하고 강한 주관만큼이나 강한 호기심은 대화를 묘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논쟁을 하고 있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느낀 순간 그의 ‘페이스에 말려’ 그의 의견을 경청하게 되고 만다. 어눌한 말투와는 정반대로 무척이나 강한 의견을 가진 토론가의 면이 있는 론 아라드. 인터뷰 중 그에게 취조에 가까운 질문 공세를 받아야 했다. ‘의자 디자인이 너무 다양하다. 어떤 건 너무 단순하고 어떤 의자는 너무 예술적이라서 같은 사람이 디자인한 거 같지 않다’는 말을 무심코 꺼냈을 때, 갑자기 론 아라드가 벌떡 일어나더니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어떤 의자가 가장 단순한지 짚어보세요. 왜 그런 것이죠? 그러면 어떤 의자가 예술적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1 두오모 호텔의 바. 역시 인테리어 디자인의 중요한 소재는 ‘철판’이다.
2 두오모 호텔 1층 리셉션 데스크.
3 두오모 호텔 객실의 책상. 톰박 체어를 두 개 맞물려 교차시킨 듯한 형태의 ‘리플Ripple’ 체어를 놓았다.
4 2006년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에서 선보인 드리아데의 ‘스크류’ 체어.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게 참 많다. 서울에는 4년 전에 한 번 와보았는데, 일만 하다 돌아가 특별한 추억은 없지만 도쿄와는 무척 다른 도시라는 첫인상은 강하게 기억한다고. “서울은 역동적이고 환상적인 도시, 하지만 저에겐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도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서울에서 열리는 두 전시회가 기대된다고 한다.
처음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는 그에게 ‘오늘의 궁(한국의 궁)’이라는 주제를 제안했는데 그에겐 어려운 숙제였다. 자신이 스스로 한국의 궁을 보고 관찰할 수는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철학까지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처음에는 그 주제를 거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드웨어만 가지고 소프트웨어가 없는 상황에서 뭘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물론 작업을 억지로 하면 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번개 미팅에서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와 같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운 좋으면 멋진 상대방을 만날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아주 높다는 것. 그래서 못한다고 했었죠.” 그러다가 절충안으로 한국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한국의 궁’을 풀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은 저는 명령받고 지시받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누군가의 요청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스스로 영감을 받아서 만드는 게 더 행복하죠”라고 말한다.
사실 론 아라드는 올해 11월까지 전시회 일정이 꽉 짜여 있었음에도 다른 전시회 일정을 전부 조정했다고 한다.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회는 론 아라드를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만들어준 대표적인 가구뿐만 아니라 건축, 제품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소개한다.
자신의 작품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인터뷰 도중 론 아라드는 정확히 두 번 자리를 떠나 아주 긴급한 전화를 받았으며, 정확히 세 번 동료들의 작업 방향을 결정하는 아주 긴급하고 신속한 미팅을 했다. 그렇게 산만한 중에도 인터뷰 자리로 돌아와서는 아주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던 지점으로 돌아와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던 그. 멋진 작업실이 있고, 행복한 가족이 있으며, 좋은 집이 있고, 명예와 부를 한 손에 쥔 그이다. 그에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지금처럼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작품 만들고 그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렇게 쭉 살고 싶은 게 제 꿈이죠”라는 것이다.
- 건축·가구·현대미술계까지, 디자인 슈퍼스타 론 아라드가 한국에 보따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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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아라드Ron Arad, 그가 한국을 찾는다. 3월 20일부터 24일까지 열리는 서울리빙디자인페어와 3월 27일부터 4월 20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위해서다. 요즘 현대미술계가 주목하며, 세계 디자인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그를, 런던의 북쪽 초크 팜Chalk Farm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만났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