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디자인 회사 보이드 플래닝의 최희영, 강신재 소장. 거실 속의 거실, 테라스를 확장하고 단을 돋워 툇마루처럼 연출한 라운지는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자개 테이블과 실이 엉킨 것 같은 텍스쳐의 모오이 펜던트 조명등이 인상적이다.
요즘 한창 뜨는 동네, 경리단길에서 남산터널 방면 소월길을 따라 5분쯤 걸어 올라가면 제법 길게 뻗은 회색 담장이 눈에 띈다. 주차장과 마당, 이층집이 계단식으로 이루어져 밖에서 보면 마치 대저택이 펼쳐진 듯한 포스가 느껴지지만 실상은 사뭇 다르다. 주거와 사무실을 겸한 공간이라 늘 사람들로 복작이는 집, 이곳은 강신재, 최희영 소장이 이끄는 공간 디자인 회사 ‘보이드 플래닝Void Planning’의 새 사옥이자 두 소장이 ‘함께’ 사는 사적인 주거 공간이다. 눈치챘겠지만 강신재, 최희영 씨는 부부 디자이너고 그들의 집과 사무실은 2층 주택 위ㆍ아래층에 나란히 자리한다.
두 달 전 보이드 플래닝이 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빙고’를 외쳤다. 개인적 취향을 떠나 그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늘 흥미로웠으니, 다이어리 날짜를 체크하며 오매불망 이사 날을 기다렸고 한 달이 더 지나고 드디어 초대를 받았다.
“먼저 둘러보고 차를 마실까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궁금해하는 기자의 시선을 눈치챈 센스 있는 안주인은 공간 곳곳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먼저 두 개의 대문 중 위쪽 대문을 거쳐 들어선 현관은 이 집의 2층, 보이드 플래닝 사무실과 연결된다. 클래식하면서도 그래픽적 효과를 내는 타일, 천장과 벽면을 거울로 마감해 한 사람만 왔다 갔다 해도 꽉 차 보이는 사무 공간, 보통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탕비실과 화장실을 네온 형광 컬러로 특별히 힘준 디테일까지… 착시 효과와 반전을 거듭하는 업무 공간이 펼쳐진다. 2층 복도를 따라 안쪽 가장 깊숙이 자리한 방은 강신재 씨의 사무실, 메자닌 구조로 2층과 뚫려 있는 3층 다락방이 최희영 씨의 사무실이고, 주거 공간은 1층에 있다. 부부가 같은 직업을 가진 데다 집과 사무실이 위아래로 붙어 있기까지! 1997년 보이드 플래닝을 오픈한 이래 과연 떨어져 지낸 날이 며칠이나 될까, 공간과 상관없는 엉뚱한 질문이 앞섰다.
1 좁고 긴 복도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완벽하게 정리 정돈을 마친 드레스룸이 자리하고 또 하나의 중문을 지나 몽환적 분위기의 침실을 만난다. 다다미 혹은 툇마루처럼 단을 만들고 킹사이즈 매트리스 두 개를 올려 그 자체로 임팩트가 느껴지는 침실. 벽면 십자 오브제가 더해져 범접할 수 없는 오라가 전해진다.
2 1층 욕실은 연두색으로, 2층은 욕실은 주황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벽면에 세워 놓은 사진은 김준 작가 작품.
3 널찍한 다이닝룸과 상대적으로 콤팩트한 주방. 이번 레노베이션은 매번 새 주인들이 ‘인테리어’라는 명목 아래 덧대어놓은 때를 벗기는 작업으로 시작했다. 천장 골조를 덜어내고 화이트로 도장했으며, 바닥은 기존 마루 바닥재에 회색 페인트를 칠하고 에폭시로 코팅했다.
4 3층 최희영 씨 사무실에서 2층 회의 테이블을 내려다본 모습. 지붕에 뚤린 창문은 옛날 골조를 그대로 살리고 마감재를 교체했다. 창문 너머로 관악산 능선이 펼쳐져 더욱 운치있다.
5 아무리 멋진 공간이라 해도 공간이 주는 감동을 사진 한 컷으로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3차원 특유의 공감각을 2차원의 표면으로 담아내야 하기 때문. 하지만 보이드 플래닝에서는 문제 없다. 핑크색 도장으로 포인트를 준 탕비실. 바닥의 그래픽 패턴과 블루 컬러의 슬라이딩 도어, 광택 소재가 어우러져 입체적 장면을 만들어준다.
6 최희영 씨는 모든 유행의 시작은 패션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아트’와 ‘공예’가 그 중심에 있는 것 같단다. 요즘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 자개. 정면의 자개 장식장은 전라도 광주에서 공수한 것. 정교한 문양과 단아한 라인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다.
항상 주거 공간과 오피스를 함께 계획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나? 아무리 가까운 부부 사이고 손이 잘 맞는 파트너라 해도 서로 말하지 못하는 갑갑함이 있을 것 같다. 늘 좋다면 거짓말이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지만, 좋은 날이 더 많으니 만족할 뿐. 부부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보다는 라이프스타일이 흐트러지면서 생기는 문제가 있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그때 이야기하니 사실 우리 부부는 24시간 회의 중이다(강신재).
아, 여자 입장에서는 장점이 크다. 짬 내서 잠깐 빨래도 돌리고, 피곤하면 쉬기도 하는 등 여유 시간을 더 활용할 수 있어 일과 생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을 때 꽤 유용하다. 외국에는 이런 스튜디오형 주거 공간이 많은데, 오너와 직원들이 모두 가족처럼 지낸다. 보이드 플래닝도 그런 편이다. 요리하는 것 좋아하는 강 소장은 가끔 직원들 점심을 차려준다. 단, 퇴근을 해도 컨펌 요청 전화벨이 수시로 울려대니 완벽한 퇴근은 없는 셈. 우리 집은 주말에 가장 고요하다(최희영).
24시간 회의 중이라니, 각자 어린 시절부터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컸을 터. 미대 지망생이었던 강소장, 그리고 디자이너를 꿈꾼 최소장(당시에는 패션 디자이너에 가까웠다). 보이드 플래닝에서 선보이는 디자인은 매우 복합적인데, 어쩌면 둘의 만남부터 그러했는지 모른다. 군대 제대 후 늦깎이로 그림을 시작한 강신재 씨는 명문 미대에 지원하다 세 번의 고배를 마셨다. 그저 ‘합격’의 기쁨이라도 맛보자는 생각에 무슨 학문인지도 모르고 건국대학교 실내디자인과에 입학, 아내 최희영 씨와 동문으로 인연을 맺었다. 졸업 후 강신재 소장은 바로 인테리어 사무실 ‘보이드 디자인’을 차렸고, 최희영 소장은 개오망이라는 설계 사무실에서 일하다 유학을 계획. 유학 준비를 하면서 3개월간 보이드 디자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서로 모든 것을 함께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단다.
7 컬러 블록으로 포인트를 준 최희영 소장의 사무실. 박공지붕의 바리솔 조명 라인을 반사되는 광택 소재로 마감해 공간이 한결 입체적이다.
청담동, 가로수길, 한남동, 경리단길까지… 트렌디한 동네만 찾는 이유는? 결과만 보면 그렇지만 과정을 짚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저 조용할 것 같아서, 친구가 불러서, 한산한 정취가 좋아서 입성한 동네인데, 우리가 이사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바 뜨더라. 특히 가로수길은 늘 공사하는 현장으로 복작댔고 하루도 드르륵 소리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다. 후배 전범진 씨(인테리어 디자이너, 스튜디오 베이스), 가로수길 터줏대감 박성대 씨 꼬임에 넘어가 가로수길로 이사한 후 일보다 뭉쳐 노는 시간이 많았다. 매일 들썩이는 기분, 더 이상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 한남동으로 옮겼다(강신재).
집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저곳 찾아다녔다는 부부. 한남동을 거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보따리를 푼 곳이 바로 이곳, 남산 자락 아래 소월길이다. 파키스탄 대사관저이던 이 집은 클래식한 패턴, 나무 마감재가 뒤엉켜 다소 답답해 보였지만 저 멀리 관악산까지 펼쳐지는 풍광 한 자락이 끝까지 뇌리에 남았다. 산을 좋아하는 강신재 소장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네다섯 시간씩 산에서 시간을 보낸다. 반면 최희영 씨는 아직 산의 매력은 모른다. 두 사람은 언뜻보면 인상이나 옷 입는 스타일 등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진중히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면모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강신재 씨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고, 최희영 씨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다. 쇼핑을 가도, 여행을 가도 늘 1m씩 떨어져 걷는다는 부부. 아마도 평행선을 유지하는가 싶었던 그들의 취향은 디자인에서 거리를 좁혔고 이성과 감성, 내추럴리즘과 모던, 전통과 진보라는 보이드 플래닝만의 스타일로 접점을 이루었으리라.
모던하고 진보적인 디자이너로 통하는데, 과연 이 말에 동의하나? 아마 우리가 쓰는 컬러 때문일 거다. 모노톤 일색은 좀 재미없지 않나. 디자이너로서 색을 자유자재로 다뤄야 한다는 은근한 사명감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개방적인 클라이언트라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으니 우리 스스로가 실험 대상이 되고자 했다. 원색의 차갑고 미니멀한 디자인에 자개라는 이질적 소재가 등장하니 사람들이 재미있어한다(최희영).
지방을 갔다가 우연히 모으기 시작한 자개 문짝으로 만든 테이블은 1층 주거 공간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요소다. 단을 올려 좌식 공간으로 꾸민 다실과 거실을 가로지르는 스케일이 가히 압도적이다. 또한 사무실은 컬러에 거울까지 활용해 몇 배 이상의 공간감을 확보했다. 낮은 천장고와 내력벽 등 집이 답답해 보이는 요인을 보완하고자 천장과 벽면에 거울을 붙이고 컬러 라이닝과 레터링을 더해 확장 효과를 주었다. 따사로운 기운이 가득한 주거 공간, 사무 공간엔 모두 독특한 물성과 포인트 컬러로 생기가 넘친다.
사실 해외 언론이 먼저 알아보았는데…. 우리도 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2006년 독일의 ‘콘트랙트월드 어워드 Contractworld Award’에서 대상을 받은 것. 프로젝트명은 ‘창동 설렁탕’. 한국 음식점이다 보니 한국적 감성을 가미한 이곳은 높이가 3m나 되는 기둥에 사람 손으로 손톱만 한 목구슬을 수작업으로 감았다. 한국 전통 건축 개념인 툇마루도 적용했는데, 이런 동양적 미감이 색다르게 작용한 것 같다. 또 네덜란드 인테리어 전문지 <프레임Frame>에 지금은 없어진 티오도라는 멀티숍이 소개되면서 더욱 많이 알려졌다(강신재).
넥슨 프로젝트는 ‘더 그레이트 인도어 어워드The Great Indoors Award’의 최종 심의에 올랐다. 2001년 당시에는 무척 앞서가는 디자인으로 평가받았다. 자연 모티프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일환으로 재활용 소재와 친환경 소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 후 넥슨과는 12년째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단순히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사이로 그치는 게 아니라 기업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다양한 일에 관여하는 돈독한 관계다(최희영).
사실 인테리어가 경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힘든 시기에 사무소를 오픈했음에도 이력이 꽤 화려하다. 보이드 플래닝은 국내 시장에서 경쟁하기보다 국제 무대로 진출하길 원했고, 도전했다. 의외로 많은 외국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국내 시장을 확보한 만큼 요즘 외국 디자이너와 그들의 필드에서 경쟁하는 일, 그것이 후배들을 위한 선배의 진정한 역할일 것이니.
1층 주거 공간의 백미는 바로 거실 인테리어. 창가 좌식 공간부터 거실까지 이어지도록 자개 테이블을 짜 넣은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조명등은 모오이 제품, 보료는 최희영 씨가 디자인한 것.
1 패션 브랜드 한섬과 협업해 만든 자개 사이드보드. 자개 소재와 애시드 컬러가 상큼한 조화를 이룬다.
2 컬러풀한 기린은 부부가 아끼는 오브제다. 세 개를 제작해 두 개는 기린 사이즈에 맞춰 칸을 제작한 책장에 넣고, 한 개는 계단에 배치. 빈티지 마네킹은 상하이 출장때 구입했다.
3 식물 도안을 그래픽화해 프린트한 후 테이블에 붙여 장식했다. 꼼데가르송의 아트 북과 절묘한 매칭.
4 2층 사무실 책장 윗면의 도트 프린트와 탕비실의 핑크 컬러, 오렌지색 조명등이 유쾌, 상쾌하다.
5 유리로 마감한 테이블에 컬러 라이닝, 레터링을 더해 감각적이다.
6 이 치밀한 책 수납을 보라. 정기 구독하는 잡지의 1년, 2년 치 분량대로 칸을 나눠 제작한 책장은 그야말로 탐나는 수납 아이템.
7 일과 생활의 경계가 없는 보이드 플래닝의 공간은 기다란 담장과 대비되는 간결한 사인 덕분에 주택가에서도 한눈에 찾을 수 있다. 보이드void의 사전적 의미는 빈 공간, 플래닝planning은 계획하다라는 뜻. 빈 공간을 계획하니 인테리어 스튜디오의 이름으로는 의미 전달이 분명하면서도 담백한, 이 부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8 강신재, 최희영 소장은 프로젝트에서 맡은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다. 강신재 소장이 하드웨어(골조 설계)를 맡고 섬세하고 꼼꼼한 최희영 소장이 소프트웨어(인테리어)를 담당한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맺음도 중요한 일이라 ‘돈을 남길까, 사람을 남길까’ 고민이 될 것 같다. 우리는 딱 여덟 명의 직원이 일한다. 규모를 키우다 보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맡기 싫은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하니(강신재).
웃고 넘어져도 즐거운 이인삼각 경주 같던 일터도 돈을 좇게 되면 순식간에 고독한 경마장이 되는 법일지니 뭐든 억지스럽지 않고 여유롭게 판단하려고 노력한다는 강신재 소장. 최근에는 아부다비에 아담한 찻집 디자인을 진행했는데 꽤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보이드 플래닝을 해외에 알린 프로젝트를 유심히 지켜본 독일인 클라이언트가 직접 연락을 취해왔다고. 15평, 천장고가 8m가 넘는 공간은 동양의 모티프가 녹아 있는 곳이다. 한지를 뜰 때 쓰는 발자체를 이미지 월 소재로 활용했는데 반응이 좋다.
공간 디자이너들이 놓치기 쉬운 세심한 디테일까지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물성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다. 제주 닐모리 동동 레스토랑은 제주 오름을 천장에 표현해 역동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기존의 평면적 디자인에 입체감을 주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 특히 요즘은 자개로 만든 가구, 마감재를 프로모션하고 싶다. 장인이 만드는 작품으로서의 자개 말고, 옛날 자개에 디자인 요소를 가미해 리폼한 자개, 모던한 공간에도 잘 어울리고 누구나 살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 말이다. 보이드 플래닝의 디자인을 국적 불문하고 어느 나라 사람이 보더라도 이야깃거리가 있는 공간으로 느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최희영).
한국 디자인만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젊은 동시대적 감성을 보여주는 디자이너 보이드 플래닝. 앞으로 30년은 충분히 일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최희영 씨는 언젠가는 그들의 특기를 내세워 주거, 상업, 업무 공간이 함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호텔을 디자인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 은퇴 후에는 아프리카로 떠나 자신들이 가진 재능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단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페터 춤토르도 그의 나이 예순을 넘어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닐까.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했던, 1년 3백65일 같이 있으면서 다투지 않는 비결을 묻자 “만남은 뜨겁게, 이별은 차갑게”란다. 평소 하루 종일 붙어 있기 때문에 주말만큼은 서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각각의 스케줄을 보내는 강신재ㆍ최희영 씨 부부.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자극이 됩니다. 이견을 모으고, 서로의 믿음을 공간을 통해 증명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끼죠. 두개의 삶이 완벽한 하나가 되면서도 완벽히 독립적이기에 참 괜찮은 파트너로 사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