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한쪽에 암벽이 자리해 독특한 인상을 풍기는 평창동 문수연 씨 집. 공사 기간 내내 애정을 쏟고, 의미 있는 물건들을 하나 둘 모아 공간을 완성했다. 정갈한 화이트 페인팅과 내추럴한 원목 소재로 마감하고, 가구를 짜 넣어 편안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은 문수연 씨 가족의 유쾌하면서도 평온한 성격을 닮은 듯하다. 왼쪽부터 남편 임동규 씨, 아들 준우, 문수연 씨, 시아버지 임승영 씨, 딸 정우.
집을 이사하고 꾸미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늘 꿈꿔오던 내 집을 갖는다는 기쁨과 흥분은 잠시뿐이고 막상 공사가 시작되면 무수한 갈등과 예산 초과라는 암혹한 현실을 맞닥뜨린다. 또 애정을 쏟는 만큼 현장에 가서 이것저것 요구하다 보면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디자이너에게 무식한 이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그런 의미에서 문수연 씨의 집 짓기는 첫 도전인데도 꽤나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지은 지 32년 된 낡은 이층집을 개조하는 것은 새로 짓는 것과 진배없이 큰 공사였지만 모양보다 내실을 기하고, ‘합’이 잘 맞는 시공업체를 찾은 덕분에 문수연 씨는 마음고생 없이 행복한 집 짓기를 실현할 수 있었다. 두 달 남짓한 공사 끝에 완성한 집은 야트막한 대문을 지나면 현관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펼쳐지고 오솔길 옆 담벼락은 초록 담쟁이넝쿨로 가득 덮였다. 오래된 빨간 벽돌, 돌을 조르르 쌓아 만든 연못, 텃밭까지…. 보통 평창동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대궐 같은 집은 아니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재미난 집. 이사 후 봄을 만끽하며 새집 단장을 마친 문수연 씨와 가족은 요즘 마당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하는 다락방 ‘만화 가게’.
2층 주거 공간. 모양이 다른 고방 유리창으로 장식한 방문이 인상적이다.
암벽, 벽난로 그리고 다락방
북한산 자락, 30년의 세월을 간직한 이층집. 언뜻 보면 평범한 주택 같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희한한 것투성이다. 우선 가족 구성원을 보면 문수연 씨의 시아버지와 손위 시누이,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커다란 개 두 마리까지 여덟 식구가 산다.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이다. 그리고 오솔길. 대문에서 집 현관을 잇는 오솔길만 하더라도 마당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어찌 보면 죽은 공간이지만 가족은 이렇게 특이한 구조가 더 재미있더란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그 놀라움은 배가된다. 거실에 동굴이 있다면 믿을까? 이 집은 거실 한쪽 면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다. 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바위가 부담스러울 수 있을 텐데, 집과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문수연 씨는 이 암벽이 특이하고 좋아 보였다. 오히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습도를 머금고 있을 ‘동굴 효과’까지 기대한 것. 커다란 암벽은 아래쪽에 연못처럼 꾸밀 수 있도록 배수, 급수 시설이 되어 있어 원하면 졸졸졸 물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메리 포핀스>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빨간 벽돌로 만든 벽난로와 굴뚝. 이번 집 공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가지가 바로 암벽과 벽난로다. “집을 상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을 거예요. 저의 로망은 벽난로와 다락방이었는데 두 가지 모두 실현했죠.” 문수연 씨가 소망하던 다락방은 우연치 않게 이뤄졌다. 단열을 하기 위한 철거 공사 중 2층 천장과 지붕 사이에 상당한 공간이 있음을 발견한 시공팀이 마치 선물하듯 만들어준 것. 이 다락방의 용도는 ‘만화 가게’다. 어린 시절, 방학 때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면 만화책을 산더미만큼 빌려 배 깔고 보던 추억이 새록 새록 떠오르는 공간. 지붕에 네모난 천창을 내고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접이식 사다리를 장착했는데, 사다리를 내리면 머리 위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기분이 좋아진다.
1 비싸지 않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그림, 아트 포스터를 활용한 데커레이션이 눈에 띈다. 정우 방 한쪽 벽은 요시모토 나라의 캐릭터와 이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우 사진을 함께 연출했다.
2 식구 많은 집 화장실은 언제나 붐비는 법! 벽으로 나눠 미닫이문을 설치한 샤워 부스 칸을 따로 만들었다.
3 목공사로 아이 방에 옷장과 서랍장이 달린 2층 침대를 제작했다.
4 2층에 모여 있는 침실은 모두 정남향이라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들고 따뜻하다.
5 내추럴한 일본 가정집을 모티프로 꾸민 주방. 공사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신경옥 씨가 쓴 개조서 <작은 집이 좋아>에서도 소개한 시공업체 ‘인테리어 창’이 맡았다.
6 아끼는 나무 그릇과 색감이 예뻐 모으는 북유럽 그릇, 보온병들을 수납하는 창가 그릇장.
멋 내기보다 기능에 충실한 쾌적한 삶
이 집은 건축가 없이 지은 집이다. 그래서 공간 자체의 미학보다는 실용적인 생활 기능에 초점을 맞춘 면면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공간을 알뜰하게 쪼개 쓴 점이 특징. 원래 1층은 큰방 하나와 화장실, 부엌, 거실이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방이 많이 필요한 대식구인지라 화장실을 아이들 방으로 바꾸고, 큰방을 아이들 공부방과 건식 화장실로 나눠 쓰기로 결정. 화장실은 10㎡(3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지만 놀이 공간을 겸하는 2층 침대와 장난감 수납장을 두기에는 충분했다. 공간을 활용한 아이디어는 계단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방향을 90도 틀어 기본 골조를 세우고 페인팅과 원목을 덧대어 완성했는데, 계단 아래쪽에 제법 널찍한 공간이 생겨 다용도실로 활용한다. 2층의 구조도 보기 드문 광경. 작은 거실을 가운데 두고 가족의 방이 모두 모여 있다.
주택은 겨울철 난방 문제로 침실을 한 층에 몰아넣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이는 ‘주택살이 예행연습’을 통해 도출한 결과다. 식구가 많은 데다 아이들이 자라 더 이상 아파트 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한 문수연 씨는 전세로 평창동 산자락에 주택을 얻어 지난 1년간 생활했는데, 5월까지도 무척 춥더라는 것. 낡은 집일수록 난방과 단열 공사는 필수, 멋 내기보다 중요한 것은 ‘낭비 없는 쾌적한 삶’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유리창은 18mm 두 겹을 사용했어요. 천장은 단열 스티로폼과 은박, 합판 등 단열재를 겹겹이 사용했고, 증축하는 외벽은 사이딩siding(단열을 위해 사용하는 외장용 건축자재)을 덧붙여 철벽 단열에 성공했어요. 3월초에 이사 왔는데, 보일러를 한 시간만 켜도 온종일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더라고요.” 문수연 씨는 수납공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층 계단 앞, 1층 계단 아래에도 책장을 설치하고, 거실 창가 아래도 수납장을 길게 짜 넣었으니 이쯤이면 집이 가진 능력을 200% 끌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왼쪽) 연못은 분수를 틀면 암벽 틈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와 한결 운치있다.
(오른쪽) 대문과 현관을 잇는 오솔길. 마당은 구획을 나눠 텃밭, 허브밭, 꽃밭으로 꾸몄다.
새도 쉬어 가는 집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당에 나가 신나게 논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오솔길을 달리며 까르르 웃고 때론 연못 속 금붕어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방수 공사를 마친 연못에는 분수를 설치했는데 분수 아래 빨강, 파랑 조명등이 있어 해 질 녘 켜면 제법 분위기가 있다. 오솔길 따라 심은 꽃잔디에는 분홍 패랭이와 보라색 패랭이가 번갈아가면서 피고 옆으로는 종지나물과 수국, 돌나물, 각종 허브가 무럭무럭 자란다. 현관 앞 양쪽에 심은 홍단풍나무와 청단풍나무는 색이 달라 더욱 아름다운데, 단풍나무는 직박구리의 쉼터가 된다.
단풍나무, 귤나무, 감나무 등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일까? 마치 산장에 온 것처럼 포근하고 나무 냄새가 솔솔 풍기는 문수연 씨의 집에는 친척, 친구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모인다. 지난주에는 준우와 정우 친구들을 초대해 파자마 파티를 열었다. 아파트에서는 뛰 놀 수 없으니 엄마들이 놀이 프로그램을 짜줘야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낮에는 마당에서, 밤에는 2층 침대 아래와 다락방 등 각자의 아지트에서 신나게 놀다 간 꼬마 손님들. 비록 잔디밭과 꽃밭이 초토화되긴 했지만 게임기 없이도 잘 노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고. “가족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쾌적한 공간, 더 나아가 집에 놀러 온 친구들 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좋은 집’이 갖춰야 할 진정한 의미 아닐까요. 우리 집이 가족은 물론 아이 친구들에게도 그런 공간이 되길 바라요.”
나무로 감싼 집, 넉넉하고 푸근한 마음씨도 나무를 닮은 이들 가족을 만나니 싱싱한 기운이 채워지는 듯하다. 역시 공간은 사람을 닮고, 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