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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 이규헌과 건축가 이병엽의 두 번째 연대 집에서 행복한 이가 진짜 행복한 사람
아늑하고 편안한 집 한 채가 지어지기까지 참 다양한 조건이 필요한데, 점점 존재감을 부풀리며 크게 와닿는 능력이 ‘공간 상상력’이다. 평면인 땅에 입체적 사고와 상상력을 더해 이렇게 설계해보면 어떨까? 이런 느낌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신나게 퍼즐 놀이를 하는 시간. 양평에 있는 회사원 이규헌 씨의 집은 그렇듯 즐거운 발상과 제안으로 포근한 공간이었다.

건축주 이규헌 씨와 그가 사랑하는 진돗개 가족 천송, 북송, 그리고 하리. 아내는 비행으로 자리를 비웠다.
여기, 두 남자가 있다. 건축주 이규헌과 건축가 이병엽. 1분만 함께 있어도 이들이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고 신뢰하는지 알 수 있다. 공영 방송국에서 음향 감독으로 일하다 지금은 부서를 옮겨 법제팀에서 근무하는(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밴드에서 드럼을 치다 어깨너머로 본 음향 시스템에 꽂히면서 직업으로 삼게 됐다고) 이규헌 씨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운을 띄웠다.

“제가 MBTI의 여러 유형 중 INFP에 끌려요.(웃음) 소장님을 만나 몇 마디 나누었는데 ‘아, 이분은 예술가구나’ 싶었어요. 대학 밴드에서 드럼을 칠 때부터 예술적 영역에 경외심 같은 게 있었거든요. 집을 짓기로 마음먹고 처음 만난 건축가였는데 바로 결정 했습니다.” 참고로 INFP는 이런 사람. ‘내적 신념이 깊고 철학적 고민을 자주 한다.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개방적이다. 공유된 가치에 기반한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갈망한다.’ 아, 건축가란 직업에도 무척 잘 어울리는 기질이다.


환하고 훤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집. 엇갈려 쌓은 나무 기둥과 툇마루, 단차와 계단, 곡선으로 마감한 나무 벽면이 우아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이병엽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이규헌 건축주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번 양평 집은 그의 두 번째 집 프로젝트인데, 이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아내와 저는 애초부터 집으로 재테크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좋은 집을 지어서 잘 살면 좋겠다 싶었지요. 주변 선배들이 교육과 부동산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것이 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 삶은 계속 지나가버리는 삶 같았거든요. 저는 집에 머물고 싶었어요. 비 오는 날에는 방이나 거실에서 빗소리를 듣고, 여름에는 느긋하게 마당에서 수박을 잘라 먹는 거죠. 부동산 투자를 열심히 하는 분들을 보니 마지막에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평가 금액일 뿐, 당장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돈이 아니고 같은 수준으로 이사를 할라치면 주변 시세도 그만큼 올라 있으니까요. 원하는 삶에 어떻게 하면 이를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소장님을 만났지요.”


2층 평상은 이 집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널찍한 통창으로 계절의 모든 시간이 고이듯 펼쳐진다.
“이분은 예술가구나”라는 같은 말에 쑥스러운 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이병엽 건축가는 ‘잘 듣는 사람’이었다. 멋쩍어하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끊거나 손사래를 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도 자신의 차례가 됐을 때는 또 자연스럽게 말을 보탰는데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명료함이 있었다. 모든 프로젝트에 함께하는 전담 시공사가 있고, 건축가와 미팅할 때부터 시공사 대표와 함께한다는 내용이 특히 신선했다.

“처음 미팅과 설계 단계에서는 서로 좋은 마음이었다가 공사가 시작되면 현장 상황이나 예산 같은 이런저런 문제로 설계안이 틀어지고 관계도 어긋나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미팅할 때 최대한의 예산을 물어보고 시공사 대표님과 긴밀하게 협의를 해요. 소재를 고급 사양으로 바꾸는 등의 큰 문제가 아닌 한 가급적 그 비용을 맞추려 노력합니다. 도전적이지만 유의미한 시공의 난도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전에 협의를 통해 문제를 최소화합니다.”

그뿐 아니다. 계약이 체결되면 가족 구성원을 모두 사무실로 초대해 약 다섯 시간 동안 워크숍을 진행한다. 각자 어떤 공간을 원하고 꿈꾸는지 확인하는 시간. 가족과 뒤엉켜 보낸 지난 시절과 앞으로의 기대가 교차하면서 가족 중 한 명은 꼭 눈물을 보인다고. 이병엽 건축가에게 ‘집’은 그런 의미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 마음 상할 일 없게 설계 앞뒤단을 세심하게 체크하고 본인도 온전히 마음과 시간을 쏟는.


주방에서 몇 계단을 내려가면 나오는 침실. 정원을 지나 저 멀리 남한강의 윤슬까지 아스라이 펼쳐지는 곳이다.
자연은 욕실에서도 함께.
훤하고 환한 공간, 그 안의 우아한 리듬
이제 본격적으로 집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대지 면적1037㎡ (약 3백13평)에 2층 규모로 들어선 이곳은 모던하고 깨끗한 모습이다. 거실과 주방에서 바라보면 널찍한 정원과 단독주택 단지를 지나 저 멀리 남한강이 보인다. 볕이 좋은 날이면 수면에 윤슬이 왁자하게 반짝인다. 이규헌·조은혜 부부의 보물이자 자식인 진돗개 가족 북송(아빠), 천송(엄마), 하리(아들)는 유리 울타리 너머로 저쪽 세상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마감재는 흰색 벽돌 타일. 줄눈을 안쪽으로 파내지 않고 돌출되도록 해 박서보나 이우환 화백의 작품처럼 은근한 율동감이 느껴진다.

내부는 시원한 천고와 확 트인 개방감이 특징이다. 첫 번째 집이 오밀조밀 잘 짜인 곳이어서 이번에는 크고 넓은호쾌함을 주요한 좌표로 삼았다. 이병엽 건축가의 특기인 리듬감도 눈에 들어온다. 벽난로 위쪽 벽면을 큰 부조 작품처럼 마감했고, 나무로 몸체를 만들어 긴 조각처럼 만든 커튼 박스는 왼쪽에 이르러 부드럽게 휜다. 한 발짝 떨어져 이 리듬을 보고 있으면 선과 면이 만나 크고 우아한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조리대의 몸체와 상판에는 베이지색 트래버틴을 사용해 거대한 조각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섬세한 구획은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진돗개 가족이 편하게 외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바닥을 넓게 뺀 현관 지붕 위로는 작은 천창을 냈고(그렇게 귀여운 천창은 처음 본다) 운동장처럼 넓은 거실은 작은 통로를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비로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단차와 선반, 툇마루를 이용해 입체적 동선을 만든 것도 돋보인다. 계단을 올라가 주방과 다이닝룸이 있고, 주방에서 안방으로 갈 때는 다시 몇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2층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평상이다. 원목으로 만든 마루 위, 방석 같은 낮은 의자에 앉으면 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과 호젓한 풍광의 남한강이 가깝고도 아득하게 펼쳐진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비가 오거나 눈이 날릴 때는 비현실적으로 적막한 풍경이 만들어진다.

건축가가 지은 집을 취재하면서 한 번씩 크게 와닿는 부분이 있다. 집을 지어보고 싶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가장 요긴한 능력 중 하나는 공간 상상력이 아닐까 싶은. 그 상상력에 살이 붙고 피가 돌기 시작하면 집 짓기는 어떤 유희보다 즐겁고 보람찬 시간이 된다. 이규헌 건축주도 그랬다. 인천 청라 지구에 첫 집을 지을 때 ‘렌트 하우스’ 콘셉트를 적용해 부부가 집에 없을 때는 다른 이들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양평 집도 마찬가지. 각종 화보나 CF 촬영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어 여러 곳에서 문의가 많다. 안방을 주방 아래, 거실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아지트처럼 숨겨놓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깔끔하고 담백한 외관의 2층집. 외단열에 벽돌 타일로 마감했다.

이병엽 건축가 역시 공간 구성에 관한 다양한 옵션을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이다. 10대 때부터 엄마와 배낭여행을 다니며 여러 공간을 체험했다는 그의 얘기가 어찌나 재밌던지. “방학 때마다 국내외로 여행을 다녔어요. 절에서 몇 주를 보내고 유럽에서 또 몇 달을 보내기도 했지요. 학원은 안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공간이 주는 힘을 믿었어요. 공간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건축가란 꿈도 꾸게 되었고요. 엄마 몸이 안 좋아지고 더 이상 외국에도 못 나가게 되면서 단독주택을 임대해 스테이로 바꾸었습니다.

상호는 ‘서울방학’. 한정된 예산으로도 마당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었고, 손님은 외국인 관광객만 받았습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해외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기분을 엄마에게 선물하고 싶어서요. 집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치와 확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그 세계에 관심 있는 분들과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어요.” 이규헌 씨가 이병엽 건축가의 말에 공감하며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가 세 번째 집을 짓는다면 건축가는 그때도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병엽 건축가 바이아키텍처byarchitecture를 이끄는 젊은 건축가. 집에 대한 튼실한 애정과 섬세한 조율을 바탕으로 편안하고, 아름다운 집을 만든다. 직선과 곡선을 적절히 섞고 동선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열고 막는 부분을 정밀하게 계산한다. 계단 아래쪽에 대리석 세 장을 쌓아 올려 기단을 만든 데서 보듯 눈과 몸으로 느끼는 감각의 변화를 오롯이 전달하는 데 관심이 많다. 홈페이지는 byarchitecture.kr, 이규헌 씨와 지은 집 소식은 인스타그램 @h21dream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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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