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한옥 미련 없이 비운 2층 한옥의 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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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한옥마을에 있는 이 2층 한옥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비우면 기품이 생기는구나.” 일말의 미련도 없이 “저희는 간소한 게 좋아요”라고 좌표를 찍어 준 집. 그리고 그 주문에 호응하며 기대보다 더 담백하고 밀도 높게 완성한 집. 단언컨대, 공예적 손길과 디테일로 구석구석 작은 힘을 준 이 집은 비워서 풍성한 집으로 오래오래 사랑받을 것이다.
빛을 머금은 창과 단아한 소반이 편안하게 어우러진다.
“여기 사진 한 장 보내드립니다” 하고 날아온 조정구 건축가의 메시지. 사진에는 1톤 트럭의 짐 싣는 칸 위에 비계를 설치하고 그 위에 다시 큼직한 플라스틱 통을 올린 후 그 위에서 조정구 소장이 풍경을 가늠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현장 반장이 뒤에서 조정구 소장의 허리춤을 붙들고 있어 흡사 <타이타닉>의 뱃머리 신scene 같았다. 이 사진은 조정구 소장이 ‘새롭고 아늑한 2층 한옥’을 설계하는 데 얼마나 진한 애정과 의지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2층 한옥은 글쎄, 필자도 ‘베스트’라 여기지는 않는다. 한옥의 매력이자 최고 강점은 ‘땅’과 자연스럽게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도 비도 햇살도 바람도 그 안에서 한층 가깝고 실감 나는 것들이 되는데, 공간이 2층으로 불쑥 올라가면 그 많은 직접 경험이 공동주택과 다를 바 없는 간접 경험으로 바뀔 여지가 크다. 용적률을 최대치로 올리고 옆집에도 기가 죽지 않는 우뚝한 외관에 욕심을 부릴수록 그 2층 한옥은 점점 별로인 집이 된다. 한옥 특유의 기품은 온데간데없고 빵빵한 근육의 로봇처럼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부각된다고 할까. 물론 담백한 2층 한옥도 많은데, 높이를 올리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한옥의 함수를 유지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남편이 거주하는 사랑방 옆쪽으로 자리 잡은 사랑 마당. 이름처럼 정겹고 소담한 공간으로, 남편이 매일 마음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마당과 정원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1년 3백65일 믿음직한 숨구멍이 된다.
조정구 소장에게도 2층 한옥은 오랫동안 ‘굳이’ 싶은 형태였다. 크기와 효율에 휘둘리지 않고 단층 한옥처럼 담백하고 단아한 형식으로 설계할 수는 없을까 고민이 많았다. 이 집을 취재하겠다고 했을 때 그가 자신 있게 한 말이 있다.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형식의 2층 한옥을 완성했다”.
1톤 트럭 위에 올라간 사진이 나름 결정적 순간인 것이 그곳에서 본 풍경을 확신 삼아 2층 공간을 뒤로 쭉 물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의 구조를 한번 볼까?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제법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주요 생활공간을 1층으로 길게 뺀 단층 몸체가 보인다. 가로로 긴 통창 너머로 마당이 있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빛이 넉넉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곳. 바깥 골목과 면한 곳에는 작은 사랑 마당을 하나 더 넣어 거실 코너에서도 마당을 보고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이곳 이름이 사랑 마당인 이유는 예로부터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방’ 옆에 있기 때문. 이 집의 공동 건축주이자 윤수현 씨의 남편은 사랑 마당을 ‘온전한 내 것’으로 여기고 좋아해 거실에 있는 TV도 이곳 한쪽에 캠핑 의자를 갖다 놓고 본다고. 마당에는 매화와 남천 한 그루를 심었는데, 그곳에 하얗고 빨간 꽃과 열매가 달리면 또 얼마나 소중한 공간이 될까 싶었다. 조정구 소장의 말이 재미있다. “설계를 하다 보면 남편들의 공간은 결국 ‘소멸하는 공간’이 되는데, 이곳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웃음)
2층은 거실과 주방이 있는 1층 공간을 그대로 두고 아내의 생활공간 위쪽으로만 올라가 앉았다. 이곳 역시 일자로 길게 뺀 덕에 마루에 앉으면 앞에 있는 이웃 한옥과 그 너머로 북한산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1층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며 올라앉은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공간이 가볍고 산뜻하다.
사랑 마당 쪽에서 바라본 거실. 주방과 아일랜드 식탁을 공간의 중심에 두고 일체의 가구를 더하지 않아 한층 시원하고 아늑한 모습이다. 그림은 벽에 딱 한 점. 계절에 따라 바꿔 걸면 그림 걸 벽이 없는 것이 조금도 아쉽지 않다.
건축과 건축가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건축가만큼이나 쨍한 하이라이트를 주고 싶은 이가 건축주다. 흔히 좋은 집을 짓는 건축주의 자세와 요건으로 “이런 공간은 꼭 필요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취향을 이야기하는데,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이런 공간은 없어도 돼요”라고 과감히 뺄셈을 할 수 있는 용기다.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광고 회사 CEO로 오랫동안 경력을 이어온 윤수현 씨는 그런 점에서 최고의 건축주라 할 만했다. 지금의 터를 잡아놓고 여러 형태의 단독주택에 차례로 살아본 이야기는 놀랍도록 치밀했다.(웃음)
“처음에는 광릉수목원 옆에 있는 전원주택에 살아봤어요. 잔디밭에 대한 로망이 있었거든요. 외떨어진 집이었는데 삶에는 이웃과 마을이 필요하구나 싶었어요. 승효상 선생님이 지은 집에도 살아봤는데 그곳에는 중정이 있었어요. 좋았지만 중정이 마당을 이길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 날 민들레씨가 날아와서 피기도 하면 좋겠는데, 중정에서는 그런 자연의 우연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남편이 건축가고 아내가 셰프인 집에서도 몇 년을 보냈어요. 어마어마한 주방이 있는 곳이었는데 우리는 가스레인지 정도만 쓰지 오븐은 안 쓰는구나, 가용하는 주방 면적이 생각보다 작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요. 지하실도 애초에 생각이 없었어요. 지하층이 만들어지면 1층 한쪽에 ‘구멍’이 생기잖아요.(웃음) 습한 느낌을 원하지도 않고요. 그 모든 시간을 경험하면서 집이 너무 크면 안 되겠다, 자그맣게 짓자, 욕심내지 말자 같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습니다.”
마당에 선 건축주와 건축가. 건축주는 “우리의 소신대로 굳이 필요하지 않은 공간을 적절히 덜어내면서도 짜임새 있고 아늑한 집을 지어주리라는 믿음이 갔다”고 한다. 실제 조정구 건축가는 실측을 기반으로 창 크기까지 세심하게 조율하며 최적의 비례를 찾았다.
이런 생각과 다짐은 집을 짓는 데 확실한 고정값이 되었고 뺄 것이 확실해지니 꼭 있어야 할 것이 더 온전한 모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보자면 집 짓기는 덧셈이 아닌 뺄셈의 미학의 아닐 지. 단단한 미니멀리즘으로 되레 풍성한 맥시멀리즘을 완성한 건축주의 마지막 말. “이사를 오면서 책을 엄청나게 버렸어요. 앞으로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고요. 잡지도 딱 한 권만 보는데 그 잡지가 바로 <행복이가득한집>이랍니다.(웃음)”#지은집 #한옥 #거실 #주방 #건축가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