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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구박물관 몽휴夢休 작품전 부활을 꿈꾸며
화려한 문양과 색채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나전칠기 장인 故 몽휴 김걸金杰 선생의 작품전이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열린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녹아든 아름다운 서사시. 단순한 전통의 재현에서 벗어나 자신의 철학과 인생 경험을 반영한 창작물을 통해 그의 삶을 회고한다.

포도 넝쿨 문양 농과 매화 그림이 화려한 조화를 이룬다. 궁중에서만 사용하던 주칠이 자개의 무지갯빛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포도 넝쿨은 타찰법을 이용해 화려하게 표현했으며 나비 형태의 경첩을 달아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산에 집 짓고 나 홀로 지내는 이는 도인인가, 풍류가인가. 너럭 바위에 앉아 사색을 즐기고 산들바람을 벗 삼아 차 한잔 나누는 이. 그림 속에서 늘 혼자 노닐던 이는 한국의 대표적 나전 장인 故 김걸 선생이다. 종이만 있으면 무조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는 그는 사는 동안 참 많은 습작을 남겼다. 빛바래고 너덜해진 종이 한 장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녹아 있으니 평생을 시각 언어로 소통하며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수많은 습작은 그가 작고하기 직전까지 몰입한 나전 작업의 도안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1 우리 소반(각상)을 축소한 소품. 선생은 늘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2 끊음질로 정교하게 테두리를 장식하고 포도알을 빨갛게 채색한 거울. 
3 3백 년 된 박달나무로 빚은 차호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4 웜 블루 컬러와 자개의 반짝임이 조화를 이룬 함. 
5 자개가 주인공이요, 시계는 보너스다. 자개를 그저 그림처럼 바라보라는 의미가 담긴 작품.
6 매화, 국화, 모란 문양을 넣으니 술병이지만 이렇게 곱다. 

반세기 세월이 빚어낸 혁신
나전螺鈿은 무늬대로 오려낸 자개를 물건 표면에 붙이거나 박아 장식하는 것. 나螺는 껍질 모양이 나선형인 조개 종류를 일컫고, 전鈿은 금속판을 물건 표면에 새겨 넣어 장식한다는 뜻이다. 반짝이는 자개로 물건을 장식하는 방식은 세계 각지에서 이용했지만 그것을 뛰어난 예술품으로 발전시킨 것은 동아시아요, 우리 나전을 예술의 극치로 끌어올린 이가 바로 몽휴 선생이다.

호남의 손꼽히는 가문에서 나고 자라 어린 시절부터 사랑방 문화를 접한 몽휴 선생은 격동기에 집안이 몰락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불교 철학에 귀의한다. 불교와 함께 발달한 공예에 더욱 매력을 느낀 그는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미술사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일본 칠기 장인 밑에서 손톱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칠기 기술을 익히고 또 익혔다. 생활고로 고미술을 하는 사람들을 좇으며 우리 공예품의 우수성을 느꼈다면, 일본의 채화 칠기를 통해 풍부한 색감에 눈을 떴다. 1980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품 복원과 보존 연구를 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나전칠기 전문가로 유물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불교 철학과 동양 미술, 나전칠기 기술은 물론 창작 욕구가 강하던 그는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열고 먼 미국 땅에서 자개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단순히 전통을 재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은 물론 일본, 미국, 중국까지 다양한 색깔이 깃들어 있다.

1 한옥에 두어 더욱 빛나는 나전칠기. 옷이나 버선, 천 등을 보관하던 2층 농은 전체 면에 십장생, 화조, 사군자, 포도 등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각종 무늬를 자개로 장식했다. 
2 꽃과 나비의 사실적 채색, 자연이 머금은 오색영롱함을 그대로 뿜어내는 테이블과 함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이 아름답다. 

“뉴욕에 있을 때 외국 사람들이 중국 자개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거예요. 우리 자개는 하나하나 손으로 작업해 조각하고, 색을 입히는 중국의 투박한 자개보다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운데, 알릴 길이 없었죠. 우리 것이 세계적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남편은 가족과 떨어져 혼자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외국인의 눈을 사로잡는 자개를 본격적으로,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신념 하나로요.” 2009년 작고할 때까지 서울의 공방에서 작업에 매진하던 그를 머나먼 미국 땅에서 그리워하며 평생을 소리 없이 응원한 아내 김정순 선생은 5년이 지나서야 그의 작품을, 아니 그의 인생을 세상에 내놓았다.

몽휴 선생은 외국에 살았기에 우리 것이 어떻게 해야 세계화될 수 있는지를 더욱 명민하게 깨달은 듯하다. 오렌지빛이 도는 빨간색, 서양인의 파란 눈을 닮은 웜 블루, 깊이가 느껴지는 인디고블루 등 컬러 사용의 스펙트럼을 넓혔고 문양의 배치나 컬러 조합 모두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하지만 방식은 전통을 고수했다. 가늘고 길게 오려낸 일정한 크기의 자개를 촘촘하게 끊어 붙이는 끊음질 기법, 자개를 계획한 무늬로 오려 붙이는 줄음질에 인위적으로 균열을 가하는 타찰법 등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작업은 그래서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1 종이만 있으면 무조건 그림을 그려 부채든, 발이든 남아나는 게 없었다. 몽휴 선생의 담채화와 중간 중간 사방탁자처럼 뚫린 오픈 구조가 조화를 이루는 장식장은 가구 너머 마당과 숲까지도 내다보겠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 
2 관람객이 직접 앉아보고 만져볼 수 있는 테이블과 식탁 의자는 거북 등껍질과 진주패(mother of pearl)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한 폭의 그림으로 즐겨라
“남편은 한순간도 붓을 놓는 법이 없이 꿈꾸듯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어요. 벽을 장식한 발의 그림은 수많은 습작의 결과예요. 가끔 한국을 다니러 오면 여기 저기 쌓여 있는 습작이 많았는데 버리기 아깝더라고요. 발이 다 낡았기에 풀로 막 붙였어요. 근데 이렇게 가구박물관에 걸리니 근사한 작품이 됐네요.” 몽휴 선생의 담채화와 구멍이 조화를 이루는 장식장은 저 너머 세계의 정원이라도 보고 싶은 불교적 이상향을 담은 작품. 안방을 재현한 전시장 한편에 기품 있는 자태로 들어앉은 반질반질한 2층 농은 포도 열매와 넝쿨의 표현, 겹쳐진 포도 알갱이, 면을 가로지르는 넝쿨의 대담한 구도, 게다가 거미줄의 디테일까지 회화적 표현이 공예에서도 구현될 수 있다는 훌륭한 예다. 나비와 벌의 배치는 여백의 절묘한 활용이라는 점에서는 물론, 자연의 생동감을 그대로 전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일본의 쪽물을 들인 종이를 붙여 만든 지장은 모던하기 그지없다.

1 자개로도 다양한 문화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용상 시리즈. 2 2층 농과 함, 찻상 등 전통 주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전시 공간. 
또 거북 등(대모)을 비롯해 산호・호박・상아 등을 가공한 것이 특징인데, 거북 등이나 물소 뿔 안쪽 면에 채색한 기법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그만의 독창적 방식이다. 가구 표면에 구멍을 뚫어서 거북 등껍질을 넣고 안쪽에 채색, 윗면에 금칠을 하는데, 무엇보다 진주패 같은 조개껍데기나 상아 등 재료 자체의 생생한 질감은 그대로 살리는 게 기술이다. 용이 열네 마리 입혀진 용상은 상아와 화각(소뿔)으로 문양을 만들고 인간문화재의 장석을 붙여 완성한 제품으로, 용상을 재현한 백악관 의자와 무굴 왕국의 이국적 문양이 인상적이다.

작은 차통은 3백 년 된 박달 나무를 일일이 손으로 깎아 만든 것. 거북 등껍질과 은줄이 장식된 함은 고려시대 나전칠기 기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으로 미세한 은 입자가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처럼 나전칠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소목장의 손도 빌려야 하고, 두석장의 손도 빌려야 한다. 소목, 나전, 칠, 금속공예까지 서로를 넘나들며 완벽하게 딱 들어맞아야 아름다운 나전칠기 하나가 탄생하니 한 작품을 만드는 데 6개월을 넘나드는 기간은 물론이요, 다소 값이 나갈 수밖에 없다.

1 몽휴 선생의 자화상. 
신발 벗고 맨발로 간다는 짧고도 굵은 철학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긴 그는 유언조차 시각언어로 한 천생 쟁이다.
불교에 귀의한 작가는 보리수 잎을 말려 그 위에 섬세하게 그림을 그렸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한국가구박물관 정미숙 관장은 몽휴 선생의 창작 나전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나아가야 할 세계적 물건이라 단언한다. “중국은 칠 바탕에 조각을 하는 조각칠기가 발달했고, 일본은 나전을 사용하지만 작게 조각낸 것을 흩뿌려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 가구 표면을 깎아 섬세하게 재료를 넣고 마감하는 우리 나전은 문양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면서도 표면이 편편한 고수의 경지를 보여주죠. 젊은 사람들이 결혼할 때 이탈리아 가구, 프랑스 가구가 아닌 이런 2층 농이나 함 하나 가지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지승 공예나 나전칠기, 조각보가 시장에서 명품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우리 1세대들이 집요하게 노력해야겠죠.”

“이렇게 좋은 물건이 있으니 참 행복하구나!”라는 한마디를 위해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물건만 고집한 작가 몽휴. 옛날 한옥을 현대화해서 쓰고 있는 한국가구박물관처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경지, 이것이 바로 전통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요, 몽휴의 창작 나전이 주목받는 이유다.

한국가구박물관 정미숙 관장(좌)과 전시를 통해 남편 몽휴 선생의 작품을 선보인 김정순 선생.
몽휴 김걸 작품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나전칠기 전문가로 유물 복원 작업을 하다 1988년 서울로 돌아와 원형에 가까운 창작 나전칠기 작업을 선보인 몽휴 김걸. 2009년 작고하기 직전까지 매진하던 나전칠기뿐 아니라 글씨, 그림 등 수많은 습작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작가 몽휴의 생애를 오롯이 담아냈다는 평이다. 전시는 11월 말까지 진행하며 예약(02-745-0181)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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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현 수석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