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천사 같은 아들 루벤 클레오와 화가인 부인 빅토리아 그리고 남편 알레산드로.
(오른쪽) 보고냐 지방은 건축에 요긴한 석재가 많이 나는 곳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곳에서 돌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방의 주거 양식은 지붕까지 돌을 켜켜이 쌓아 만드는 석조 건물이 대부분이다. 1800년대 지은 이 집 역시 ‘돌집’의 매력이 살아 있는데, 문 입구의 돌 장식이 바로 그것이다. 주방 입구를 나서면 벽면의 일부로 연출한 벽난로와 그 뒤로 침실이 보인다.
뾰족지붕 아래 있는 이 집의 보물 창고. 나무 빗살 프레임 사이로 돌이 보이는 지붕은 건축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개조한 적 없을 만큼 튼튼하다고. 비는 새지 않아도 빛은 새어 들어오는 독특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국경에 있는 도모도솔라Domodossola 인근 보고냐Vogona. 자연과 역사, 모든 환경이 중세 시대에 멈춘 듯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이 산간 마을에 현재 시제로 전통을 이야기 하는 집이 있다. 화가인 빅토리아 팔라졸로Vittoria Palazzolo와 금융 컨설턴트인 알레산드로 루가리바 Alessansdro Rugariva 부부가 2백 년 된 증조부의 집을 개조해 마련한 보금자리. 새로 산 것 하나 없이 물려받은 가구와 소품을 재활용하고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더했다는 집, 막상 들어가보면 부부의 ‘겸손한’ 설명과 달리 과거와 현재가 남다른 감각과 호흡을 통해 ‘정반합’이라는 이상적인 비율로 펼쳐져 있다.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유리 블록 프레임 안에서 한층 밝고 모던한 스타일로 재탄생한 2백년 전 그대로의 현관문. 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간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기둥과 같은 구조와 마찬가지로 시멘트로 만든 벽난로에는 로마 시대 사자 머리상이 붙어 있고, 정열적인 빨간색 벽면 앞에는 촛불을 밝혀 악보를 보던 1800년대 피아노가 원래 짝인 의자와 함께 놓여 있다. 장식으로 놔둔 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한다는 피아노, 그 생생한 선율을 들으며 발길을 부엌으로 옮겼다. 집을 지을 당시 켜켜이 쌓은 돌이 드러나도록 연출한 벽면을 배경으로 매끈하고 세련된 스테인리스 스틸 주방 가구를 설치한 부엌.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곳은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않은 사람도 갖고 싶은 주방으로, 단순 명료한 설비와 레이아웃은 프로 셰프도 탐낼 만큼 실용적이다. 여기에 조부모가 썼다는 싱글 침대를 하나로 합쳐 부부의 침대를 완성하고, 파란색으로 칠한 앤티크 옷장으로 아이 방에 컬러 포인트를 더하니 집 안 곳곳, 어느 하나 눈길이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안목과 삶의 철학이 확실한 취향으로 반영된 집.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이고, 비법은 존재하는 것일까?
“인테리어는 전적으로 아내 빅토리아가 담당했습니다. 집 안에 이처럼 독특하고 과감한 색깔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예술가 아내 덕분이지요. 저는 그저 화가가 만든 작품을 감상하는 호사만 누리면 되는 거죠.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취향까지 공감하고 존중하는 게 아닐까요?”
1 일자형으로 만든 모던한 주방. 원래의 돌벽을 그대로 살렸는데 와인글라스를 정리해놓은 수납장은 외부로 통하는 문을 막아 만든 것이다.
2 식탁 역시 창고에서 발견한 보물 중 하나. 의자까지 완벽하게 짝을 이룬다. 노란 벽면에 건 와인은 30년 넘은 고급 빈티지로, 이것도 집을 공사하다 발견했다.
3 주방 옆에 있는 욕실 벽면에는 알레산드로 집안의 역사가 담긴 사진을 연대기처럼 걸었다.
4 정원에서 발견한 고대 로마 부조 장식을 지금은 주방 벽면에 작품처럼 걸었다.
5 창고가 화수분인 양 아직도 계속 나오는 조상의 유물. 앤티크 숍에 갈 필요도, 그 흔한 인테리어 숍 이케아에 갈 필요도 없다.
과거의 살림, 현재의 보물
“이것도 어제 지붕 밑 창고에서 발견한 램프예요. 벽에 설치해 쓸 수 있는 것인데, 마침 심심하다 싶은 욕실 입구 벽면에 고정했죠.” 지중해를 담은 듯 기분 좋은 푸른색으로 단장한 욕실. 간결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골드 샹들리에와 금장 거울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곳에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 소품을 더했다. 결혼한 지 5년이 넘은 지금, 그러나 빅토리아는 신혼 때 하던 인테리어 작업을 아직도 한창 하고 있는 듯하다. 개조 당시도 그랬지만 지붕 밑 창고에서의 ‘보물 발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 “처음부터 이렇게 꾸며야겠다고 계획한 건 아니에요. 둘만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계획하면서 떠올린 곳이 고향이었고, 때마침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 비어 있었죠. 그런데 집을 고치기 위해 살피다 뜻밖의 행운을 만났습니다.” 개조 후에도 과거 흔적을 정확하게 짚어낼 만큼 이 집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알레산드로. 그런 그가 놓친 곳은 박공지붕 밑 창고였다. 공사를 앞두고 켜켜이 돌을 얹어 만든 지붕을 살펴 보기 위해 올라간 창고에 증조부와 조부모가 썼던 가구와 그릇, 조명 기구 등 모든 살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이를 본 순간 알레산드로와 빅토리아는 이처럼 좋은 ‘혼수’가 또 있을까 싶었단다. 그리고 이후 그들에게 남은 과제는 단 하나, 오래된 실내를 지금 그들의 생활에 맞게 개조하는 것이었다.
“원래 집은 이랬답니다.” 집에 대해 설명하던 알레산드로가 사진을 가져와 보여준다. 기념 아닌 기록의 일환일까 싶은 사진을 보니 이 집의 ‘개조’가 그리 쉽사리 이뤄진 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건축가에게 의뢰할까,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섭외할까 고민했죠. 그러나 화가인 빅토리아에게는 집을 디자인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고, 저 또한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싶었습니다.” 부부가 의기투합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꾼 순간, 이를 두고 불안하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인부가 집을 보더니 힘들겠다며 도망가더군요.” 결국 그들이 살집은 그들 손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주방의 노란색, 거실의 빨간색 그리고 욕실의 푸른색. 정열적인 색상을 즐겨 쓰는 빅토리아의 화풍은 그의 붓 터치를 통해 공간 곳곳에 물들었고, 레이아웃을 바꾸면서 벽이 되어야 할 출입구는 수납장으로 되살아났다. 집주인이 아니고서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삶을 꿈꾸는 부부의 열정과 애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모은 결과 그들은 지금 완벽한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과거의 느낌은 분명 살아 있지만 현재 집주인의 라이프스타일을 확실하게 반영한 거실. 원래 천장고가 330cm가 훌쩍 넘었지만 난방 효율성이 떨어져 천장을 보강하고 낡은 바닥을 새로운 마루로 마감하면서 전체 천장고는 270cm로 줄었다. 벽난로는 모던하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도록 채색했고, 소파와 의자는 앤티크로 커버만 바꿨다. 테이블로 사용하는 옛날 여행 가방은 알레산드로의 할아버지가 쓰던 것이다.
1 원래 있던 현관문을 그대로 살린 가운데 현관 벽면을 유리 블록으로 만들어 한층 밝고 세련된 인상을 준다. 피아노는 알레산드로의 할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어릴때 사준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가 이 피아노를 친 적이 없다. 덕분에(?) 많이 낡지 않은 듯하다며 알레산드로가 위트 있는 유머를 건넨다.
2 화가인 아내 빅토리아의 작품을 걸어놓은 거실. 요즘 사회에서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표현한 것으로, ‘머리’를 보지 않는 세태를 꼬집었다.
이제 아들은 자신에게도 엄마 방 화장실처럼 ‘파란색’으로 칠하고, 하트 모양의 열매가 열린 ‘생명의 나무’가 있는 방을 만들어달라고 자신의 취향과 상상을 표현할 줄 안다. 그 결과 화가인 엄마가 실력을 발휘해 벽면에 나무를 그려주고, 창고에서 건진 캐비닛을 파란색으로 칠해 아들 방에 들여놓았다.
“집을 개조하면서 아이가 생긴 걸 알았을 때, 드레스룸으로 꾸미던 곳을 바로 아이 방으로 바꿨지요. 그래서 방문이 없기도 하지만 아이와 자유롭게 소통하기는 그만이죠. 벽화와 컬러 포인트는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줄 알게 되면서 주문한 것을 반영한 결과랍니다.”
생명을 불어넣은 집,
사람과 교감하는 집
장장 6개월이 걸렸다는 레노베이션. 사연을 듣지 않아도 이미 그 시간만으로도 부부의 ‘고행’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부부는 ‘전혀’라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눈에 반해 각자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연을 맺은 빅토리아와 알레산드로 부부에게 개조 작업은 또 한 번 극적인 반전을 안겨준 시간이었으니. 집 공사가 한창이던 때, 이들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아들 루벤 클레오Ruben Cleo의 방은 원래 드레스룸으로 계획한 곳이에요.” 이때문에 빅토리아는 침실에 모던한 붙박이 수납장을 마련해야 했지만 이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상황. 진정한 반려자를 만난 것만도 행운인데 손수 꾸민 집에서 완전한 가족,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어디 그리 쉽게 찾아오는 일인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지만, 오히려 근원을 찾아와 옛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며 세상 유일의 보금자리를 만든 빅토리아와 알레산드로 부부. 이런 엄마 아빠가 만든 집에서 나고 자란 다섯 살배기 아들 루벤이 어느 날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내 방에 나무 좀 그려주세요. 나무에는 하트 모양의 열매가 있어야 해요. 생명과 사랑의 나무거든요.” 무심코 훑어 본 루벤의 방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과연 루벤이 생각한 나무가 자신이 상상하던 나무와 꼭 같은지 알 수 없지만 이를 통해 확신할 수 있는 것 하나가 있다. 사람과 공간이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그 신비한 힘이 이 집에는 강렬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왼쪽) 센스 만점 욕실 액세서리.
1 보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욕실. 지중해 문화를 품은 이탈리아인의 감수성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욕실의 거울과 조명등, 촛대 등도 모두 창고에서 발견한 살림이다. 블루와 골드의 화려한 조화와 대비는 이국적인 매력까지 선사한다.
2 클래식한 거울 맞은편으로 앤디 워홀 작품 포스터가 맞대결을 펼치는 욕실.
3 벽면에 걸 수 있는 램프. 취재 갔을 때 안주인이 ‘바로 어제 발견한’ 램프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기도.
4 앤티크 피아노 위에 놓은 하모니카는 밀라노에 있는 친구가 결혼식 축가를 연주할 때 쓴 것으로 결혼 선물이었다고.
현지 기획 및 섭외 장명숙(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