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 최정심 원장. 서재와 연결된 선큰 가든은 물과 식물, 공기, 사람이 상생하는 공간이다.
#1 2011년 여름, 굳게 닫혀 있던 서울 역사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문화역서울 284’. 서울역과 함께한 지난 80여 년 삶의 기억을 담되 세계 도시 관문으로 성장할 서울역의 잠재적 가치를 구현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2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각국의 정 상들은 뜻밖의 선물에 감동했다. 나전칠기 문양을 입은 태블릿 PC. 삼성전자와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이 협업해 마련한 이 선물은 지금까지도 문의가 쇄도하는 ‘히트’ 아이템이다.
#3 수명이 다한 전기밥솥에서 녹색 잎을 자랑하는 스파티필룸이 자라고, 풍란 한 점이 개수대 거름망에 담겨 우아한 선을 뽐낸다. 도심에서 자연의 푸름을 즐기고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도시농부의 작업실> 전시 현장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도시농업포럼의 공동 대표이자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 원장을 맡고 있는 최정심 씨다. 그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다. 업사이클링과 전통 공예 그리고 텃밭. 지난 5월 20일까지 인사동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KCDF) 갤러리에서 진행한 전시 <도시농부의 작업실>에서는 텃밭에 정원을 융합한 텃밭 정원 아이디어와 30여 명의 디자이너&공예가가 만든 정원용품, 진짜 농부의 땀이 밴 안전한 먹을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지하실을 개조해 만든 서재 겸 멀티룸. 폴딩 도어를 열면 선큰 가든이 펼쳐진다.
1 현관에는 배에서 떼어낸 원목을 업사이클링해 만든 나무 벤치를 두었다. 한쪽 벽에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레 트리버 드로잉이 걸려 있다.
2 박공지붕의 다락방을 침실로 사용한다. 오직 휴식만을 위해 살림을 최소화한 공간. 난간 아래로 거실이 내려다보이고 침대 맞은편에 덱이 있어 항상 햇살이 가득 하다.
3 서랍 표면에 나뭇결이 돋보이는 오동나무 장과 지인의 어머니께 구입한 조각보를 매치했다.
텃밭, 문화 디자인의 시작
2010년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된 최정심 씨는 집과 KCDF 갤러리 옥상에 텃밭을 마련해 농사를 짓는 ‘도시 농부’다. 그가 텃밭 농사에 재미를 들인 것은 지난 1998년. 계원예술대학교 전시디자인학과 교수 시절 학교의 남는 땅을 개간해 밭을 일구기 시작하면서부터. “비슷한 시기에 판교의 30년 된 낡은 주택으로 이사했는데, 그때 생각한 게 바로 ‘텃밭에서 식탁까지’였어요. 농사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밭에만 매달렸죠. 작년에 진행한 <도시농부의 하루> 전시는 제가 십수 년간 쭉 해온 일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가끔 직접 가꾼 채소로 도시락을 싸곤 하는데, 요즘처럼 날씨가 좋을 때는 직원들과 밥 비벼 먹기 딱 좋아요.”
<도시농부의 작업실>의 예고편 격이던 <도시농부의 하루> 전시는 도심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첫 번째 전시가 그린 라이프의 영감이 되었다면 두 번째 전시는 실천에 옮기는 좀 더 구체적 방법을 제안했다. 짚으로 만든 비 옷, 벌레를 잡는 여치 집, 호리병 모양 왕골 바구니, 옻칠한 모종삽 등. 짚으로 만든 전통 공예품에서는 옛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고, 버려진 밥솥이나 헬멧을 이용해 만든 화분은 젊은 디자이너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더불어 전시의 한 코너이던 옥상 텃밭은 ‘그린 문화 네트워크’를 실천하기 위한 장으로 계획한 것.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듦으로써 개개인의 정서를 풍성하게 채워주고, 비슷한 목적과 관심을 가진 이들이 이 공간에 모여 정보를 교환할 수도 있다.
얼마 전에는 골목길 프로젝트로 ‘인사11길’을 진행했다. 차 두 대 주차할 만한 넓이의 땅에 옥수수와 토란, 치커리 등을 심은 것. 텃밭에서 자라는 작물이 주는 감동은 물론, 시골 풍경 같은 친근한 정취를 느끼면서 잊고 지냈던 우리네 동네 문화까지 경험할 수 있을 터. 이처럼 ‘농사’라는 키워드를 소박하면서도 세련되게 풀어내는 그만의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아주 가까운 데 있었다. 바로 그의 삶을 투영하는 공간. 성남 판교, 최정심 원장의 집을 찾으니 <도시농부의 하루> 전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옥상 정원이 오버랩되는 선큰 가든, 손님을 맞느라 분주한 강아지들(그는 동물 보호 단체 카라의 명예 이사기도 하다), 폐목재를 업사이클링해서 만든 가구, 집 안 곳곳의 공예품까지. 생각과 행동,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그린 라이프다.
<도시농부의 작업실> 전시에서 선보인 가든 오브제.
(왼쪽부터) 화분을 식물이 입는 옷이라 상상하고 라텍스를 활용해 만든 최정유 작가의 ‘스킨 포트Skin pot’. 나무에 옻칠을 해 건강함을 배가한 샐러드 서버는 강희정 작가 작품. 농부의 소쿠리를 모티프로 만든 로프 바구니 어번 바스켓 니팅URBAN BASKET knitting은 최정유 작가 작품.
주방과 온실, 서재와 가든… 자라나는 익스텐션 하우스
KCDF 갤러리 레노베이션, 공예 트렌드 페어 주관, 문화역서울 284 개관, <도시농부> 기획 전시까지…. 두 기관을 합친 만큼 총괄해야 할 일도 산더미인 그가 얼마 전 집까지 레노베이션했다. 모던한 큐브 형태의 외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심플한 느낌의 집. 예전 집과 비교해보면 놀랄 만한 변화다. 한 인터뷰에서 본 그의 예전 집은 박공지붕에 나무를 덧댄 소박한 농가 주택이었다. ‘업사이클링 하우스’라 부르며 낡은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동물과 상생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모던하고 심플한 새 집을보니 조금 의외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거나 오래된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요. 30년 된 농가 주택을 골라 추우면 덧대고 물이 새면 메우며 10년 동안 재미있게 살았으니까요. 다만 집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듯 안전 문제가 하나 둘 발생하기 시작했고, 보수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죠. 리모델링은 기존 집의 형태는 유지하되, 쾌적한 공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어요.”
전체 공간 구상은 최정심 씨가 맡고, 구체적인 설계는 남편이 직접했다. 골조를 바꾸지 않고 가구를 모두 맞춤으로 짜 넣어 공정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 설계부터 입주까지 딱 4개월 만에 완성한 집은 하얀 벽과 자작나무로만 마감해 간결하게 구성했는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텃밭과 정원이다. 텃밭은 수확의 기쁨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도록 채소와 꽃을 함께 심었다. 텃밭이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도 재미있다. 주차장 위에 단을 올려 텃밭을 만들고, 그 앞에 온실과 주방을 배치한 것. 주방과 텃밭 사이에 자리한 온실은 최정심 씨의 야심작이다. 주택에 10년 넘게 사니 화분이 하나 둘 늘어 월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서서 작업할 수 있는 작업대와 배수 시설도 필수였다. 온실에는 아궁이와 서서 일할 수 있는 작업대를 두었는데,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온실에서 손질하고 부엌에서 조리하는 효율적인 동선이 탄생했다.
또한 주방의 폴딩 도어를 열면 완전히 개방되어 주방과 온실은 하나가 된다. 이때 온실의 용도는 ‘다이닝룸’. 이는 용도,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공간을 가변적으로 쓸 수 있는 익스텐션extension 개념을 담고 있는 부분이다. 창고로 사용하던 지하 공간은 남편의 서재로 변신했는데, 여기에도 익스텐션 개념을 도입했다. 서재 앞 폴딩 도어를 열면 공간을 구분 짓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선큰 가든이 한눈에 펼쳐지는 것. 선큰 가든은 리빙룸의 연장인 셈이다. 선큰 가든에는 배롱나무, 산딸나무, 수사해당화, 흰말채나무, 산수국, 소나무, 서양측백, 목수국, 산수유, 홍매자, 황매자, 구상나무, 낙상홍 등 꽃나무를 원 없이 심었다.
“선큰 가든은 집에서 쉴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해요. 데이 베드에 앉아 있으면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솟은 도토리 나무가 보이는데 하늘, 햇볕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주 아름답죠.”
(오른쪽) 소음 없이 부드럽게 굴러가는 바퀴를 달아 실용성을 더한 작업 수레. 화분을 올려두는 용도로 활용하면 좋다. <도시농부 작업실> 전시에서 선보인 최근식 작가의 작품.
폴딩 도어를 열면 주방 너머 온실이 펼쳐지는 시원한 구조. 손님 초대를 즐기는 최정심 씨 부부는 주말이면 이 ‘온실’에서 작은 와인 파티를 연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풍성한 샐러드를 만들면 금상첨화.
1 ‘개집’을 싫어하는 개들을 위해 서재 맞은편에 방 한 칸을 마련했다.
2 주차장 위에 마련한 텃밭에서 도시 농부를 실천하는 최정심 씨. 텃밭은 중간에 돌을 깔아 구획을 나눴는데 이는 꽃이나 채소를 밟지 않고 이동할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다. 텃밭 식재, 선큰 가든 조경 등은 <도시농부> 기획전의 전시 작가이자 가드닝 전문가 최원자 씨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다.
3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은 도시 농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보다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지난 4월 19일부터 5월 20일까지 <도시농부의 작업실> 전시를 마련했다.
4 왼쪽부터 <도시농부의 작업실> 전시 기획자 오세원 씨, 신진 작가 최정유 씨, 기획 총괄을 맡은 최정심 원장.
공예와 마을을 잇다
집은 자고로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최정심 씨. 전통 한옥은 아니지만 한옥에서 모티프를 얻은 면면이 눈에 띈다. 앞서 소개한 주방에서 온실, 서재에서 선큰 가든으로 통하는 가변적 공간 확장이 그렇고, 가구를 최소화한 침실과 마주 보는 창이 이를 뒷받침한다. 공간 곳곳에 마주보는 창을 내 햇볕을 듬뿍 담고 바람에는 길을 터주는 사통팔달 구조를 실현한 것. 그래서 집은 별다른 장식 없이도 심심하지 않고, 너른 창문의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롭다. 그의 집에서는 값비싼 수입 가구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젊은 작가의 실험적 작품이 눈에 띈다. 집 안 곳곳을 채우고 있는 소품들 또한 자신이 큐레이팅한 전시의 흔적이거나, 그곳에서 구입한 디자인 물품이 대부분.
또한 몇년 전부터 장인들이 만든 전통 수공예품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콘텐츠 개발, 활성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온양의 민속 박물관을 알게 되었지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잊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 신발, 가구, 헌 거울부터 먹는 것까지 조사해 재현해 놓았어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개인이 수년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 엄청난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과 존경이 우러났죠. 그래서 2009년 서울디자인올림픽 특별전으로 <오래된 미래-낭만 시장>전을 기획했어요. 박물관, 골목길, 책방, 반려동물, 놀이방, 도시락, 음악 다방, 나전칠기, 살림, 디자인 약방 등의 카테고리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지요.”
(왼쪽) 최정심 원장은 홍익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 졸업. 계원예술대학교 전시디자인학과 교수를 지내다 지난 2009년 서울디자인재단에서 주관하는 디자인올림픽 중 <낭만시장> 전시의 감독을 맡았으며, 2010년 4월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 원장이 되면서 그가 내건 ‘오래된 디자인으로 전환’이라는 슬로건 역시 이러한 활동과 고민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 한국공예ㆍ디자인문화진흥원이 운영하는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을 개조한 복합 문화 공간), 통영과 북촌에서 진행할 예정인 ‘공예 마을 컨설팅’ 사업도 그 연장선이다.
“제가 최근에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은 지역 컨설팅이에요. 역사, 자연환경, 인문학적 자원을 바탕으로 지역마다 발달한 공예가 따로 있죠. 담양의 죽공예처럼 그 지역에 재료가 많이 나고 타 지역보다 품질이 좋아서 발달하기도 하죠. 주문 생산을 원칙으로 하는 공예는 궁극적으로 슬로 문화예요. 양산해서 쉽게 버리는 산업 사회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요즘, 꼭 필요한 것을 주문해서 기다리는 마음가짐까지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지역 사회와 공예를 부활시키고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입혀 1백 년의 디자인을 5천 년 역사로 확장하는 일, 누구나 꿈꾸는 도시 농부의 일상을 전시로 기획하는 일, 그리고 오래된 것과 환경, 동물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집. 어쩌면 도시 생활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 중 하나였을 ‘농사’라는 키워드를 세련되게 풀어낸 비결 역시 생각과 행동, 삶이 일치하는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늘 새로운 것만 찾은 요즘, 일관된 철학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의 행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