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05월 알리스에게서 배운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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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세계 최고령 피아니스트이자 세계 최고령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알리스 헤르츠좀머Alice Herz-Sommer가 1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알리스를 알게 된 것은 <백 년의 지혜>라는 책을 번역하면서였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지면으로 대단한 인물을 많이 만났지만, 알리스처럼 강인하고 낙관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인생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을 수 있는지, 얼마나 의연하게 아픔과 두려움을 견뎌내 거기서 희망을 찾아서 살아낼 수 있는지 그를 통해 알았다.
1903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난 알리스는 피아니스트가 된 후 결혼해서 평온하게 살았다. 하지만 1943년 남편과 아들, 어머니와 함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면서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단둘이 남아 나치가 항복해서 해방될 때까지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통스럽게 2여 년을 살았다.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 와중에도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과 함께 기억해서 악보를 그리고 몰래 악기를 구해 1백 차례 이상 연주회를 했다. 수용자들은 그 음악을 들으며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생의 기쁨을 맛보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과 절망 속에서도 알리스는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수용소에 갇힌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변 사람에게도 희망을 심어주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번역하는 내내 감동을 넘어 그의 내면에 의아함마저 생겼다.
9년 전 5월, 내 아버지는 암 진단을 받은 지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유독 정이 깊었기에 죽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도 힘들었다. 어머니를 잃은 한 친구가 “옆에 계신 동안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내라”고 조언했지만, 난 ‘웃으면서 재미있게’란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과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부모님이 아파트 옆 동에 사시는데도 2~3일 가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 헤어지는 날이 왔을 때, 이제는 ‘아빠’라고 부를 수도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냥 흘려보낸 시간이 사무치게 아쉬웠다. 어차피 올 시간이었으니 우울한 얼굴이 아닌 웃는 얼굴로, 불안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추억으로 간직할 재미난 시간을 보낼 것을…. 두려움과 불안에 주눅 들어 마지막 기회를 놓친 내가 미웠다. 그때 알리스처럼 아버지와 함께 하루하루 소망을 심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수용소에서 나온 후 알리스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더욱 놀랍다. 그는 46세에 아들과 이스라엘로 이민을 와서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집에서 콘서트를 열어 이민자들의 외로움을 위로했다. 그러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는 첼리스트인 아들이 사는 영국으로 다시 이민을 갔고 이번에는 영어를 배웠다. 그런데 얼마 후 외아들이 돌연사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알리스는 ‘라피가 편안히 눈을 감아서 다행’으로 여겼다. 살아야 할 삶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며칠 후 그는 다시 낯선 영국에서 피아노 연습을 시작했다. 역사와 인생이 안겨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삶의 질곡에서 희망을 놓지 않은 사람. 그 역시 죽음이 두려웠고 낯선 곳에서 외로웠으며, 아들을 잃어 생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전부인 음악으로 자신과 이웃을 위로하는 삶을 이어간 알리스 헤르츠좀머. 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 시련에 비하면 당신들의 고통은 별것 아니니 얼마든지 희망을 갖고 살아볼 만하다고.
사력을 다해 열심히 살다가 예기치 않게 절망, 고통, 슬픔, 비참함이라는 먹구름에 뒤통수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먹구름 위엔 여전히 푸른 하늘이 있음을 알지만 인생의 경험, 인내, 감사가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 절망의 목을 가누지 못해 알리스 헤르츠좀머 여사처럼 다시금v눈을 들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글을 쓴 공경희 번역가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대기업 홍보실을 반년 만에 그만두고 전문 번역인의 길을 택해 25년 동안 3백 권에 달하는 책을 번역하며 전 세계의 훌륭한 소설, 비소설, 아동문학을 국내 그 누구보다 먼저 꼼꼼하고 자세하게 탐독했습니다. 대표작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일요일><호밀밭의 파수꾼><우리는 사랑일까><마시멜로 이야기><좀비> 등이 며, 저서로는 북 에세이 <아직도 거기, 머물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