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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2월 천 원 상자 (정숙자 시인)

요즘은 상자도 참 흔한 세상이다. 소소한 물건 하나만 사더라도 튼튼하고 예쁜 상자에 담아 포장해준다. 내가 고른 물건이야 당연한 기쁨이지만, 덤으로 딸려온 상자는 의외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일회용일지언정 휙 던져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은 좁으니 상자가 늘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닌 건 아니다. 그렇지만 몇 주, 몇 달, 몇 년 혹은 몇십 년을 두고 완상玩賞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뿐이겠는가. 끝내 버리지 못하여 내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상자, 또는 내 삶의 마지막을 배웅해주는 상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 그 하찮은 짓거리도 인지상정일까.

물론 빈 상자 하나를 제대로 완상하기 위해서는 애정 깃든 재구성이 필요하다. 요모조모 카무플라주는 필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안에 뭔가를 담아둘 때 의미가 새로워진다. 즉 불가결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야만 ‘좁은 집’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소중히 간직하며 그 가치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우리 집에는 여러 개의 상자가 이 구석 저 구석 숨 쉬고 있는데, 그림엽서라든가 정리가 안 된 사진들, 어디선가 풀어낸 끈들, 헝겊 쪼가리, 파지에서 오려낸 그림 등이 들어 있다. 대개 없어도 무방한 것들이지만 ‘나’라는 존재 역시 그와 비슷한 반열이 아니던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근거 없이 생겨난 허사는 아닌 성싶다. 끼리끼리라야 와락 반갑고, 터놓고 이해하고, 젖은 어깻죽지도 격의 없이 기댈 수 있으니 말이다. 앞서 언급한 우리 집 이 구석 저 구석 여러 개의 상자 가운데 좀 색다른 상자 하나 있거니와 나는 그 뚜껑을 여닫으며 내일의 빛을 잃지 않는다. 그 상자만큼은 어느 물건에 묻어온 게 아니라 ‘상자 값’을 치르고 산 어엿한 것이기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은 오리지널 상자다. 자못 화려하게 언급했지만 이 상자는 동네 문구점에서 구입한 종이 상자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그 상자에 1천 원씩 넣는다. 하루일지라도 두 번 외출했다면 2천 원을 넣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매달 은행에 들러 ‘자선통장’에 입금한다. 자선통장이란 나 스스로 붙인 이름인데, 오지에 돌다리라도 한 개 놓아 강 건너는 사람의 노고를 덜어주고픈 뜻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그 꿈을 실현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다. 뒤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도 안타깝다. 어찌 됐든 거기 쌓이는 잔고는 타인을 위한 기도다. 단 한 방울이라도 피가 섞인 사람에게는 안 쓴다. 피붙이를 위해 쓰는 것은 의무요, 자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료 시인이 손수 만들어 보내온 국화차가 따뜻하다. 노란 꽃들이 찻물 속에서 다시 피었건만 이슬보다 자그맣다.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을 말려 이 병에 채웠을까. 동글동글 실에 꿰어 목에 두르면 그대로 보석이 될 것만 같다. 이렇듯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데는 따뜻한 마음이면 족하다. 오늘도 나는 찻잔에 가라앉은 국화꽃까지 버리지 않고 먹을 것이다. 거기 담긴 가을빛이 고맙고도 아까워서요, 거기 밴 솜씨가 귀하고도 정다워서다. 아 참, 오늘은 현관문을 나선 적이 없어 상자에 1천 원을 넣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제는 잔돈이 없어 5천 원을 넣었으니까.


기부란 여전히 ‘여유’가 있어서 혹은 ‘남는 돈’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는 기부야말로 마음이 담긴 것일 듯합니다. 우리에게 자선통장을 알려준 정숙자 시인은 1988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해 2008년 ‘들소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동안 <열매보다 강한 잎> <정읍사의 달밤처럼> <사랑을 느낄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진다>등의 책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