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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1월 흙탕물 가라앉히기 (이영혜 발행인)

새해, 이 단어가 누구의 이름이기나 한 듯이 속으로 가만히 불러봅니다. 이름은 이르름, 어딘가에 이르고 싶은 뜻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그래서 지난해 못다 했거나 실패한 일을 뒤로하고 새롭게 해보라고 부추기는 이름으로 새해를 부르겠습니다. 펼쳐질 한 해를 위해 이맘때쯤이면 언제나 결심이라는 것을 하곤 합니다. 밥을 좀 더 천천히 먹어야겠다. 칫솔을 입에 문 채로 수돗물을 먼저 틀지 말아야겠다. 목욕탕에서 머릿수건을 예쁘게 제대로 쓰자. 새해의 결심을 멋지게 해보려고 마음을 가다듬어보곤 하는데, 이런 소소하고 시시한 데서 화두가 넘어가질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삶의 속도가 느려진다지요. 동식물들이 모두 얼음 잠을 잘 정도로 말입니다. 1월로 한 해를 시작하지만 시절로 치자면 한겨울입니다. 그래서 생각도 점점 작고 느려지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 꿈이 없어져서인지 까닭을 스스로에게 묻기로 했습니다.

쌀 한 톨이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었는지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아는 나이를 지났습니다. 그것에 감사하고 충분히 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먹는 버릇, 물 한 방울이 부족한 이 지구의 소식을 그리 들으면서도 칫솔질도 끝나지 않았는데 그냥 물을 흘리는 낭비 버릇, 심지어 목욕탕을 갔을 때도 조금 있으면 나갈 거니까 하는 마음으로 콩밭 매는 아줌마보다도 더 엉터리로 머릿수건을 불안정하게 얹고 마는 버릇…. 이런 급한 마음은 어디서 올까요?

어떤 사람은 참으로 여유 있게 식사를 합니다. 먹는다는 행위가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몸과 정신의 시장기를 함께 채워야 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수나 칫솔질을 천천히 완성해나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같은 타월을 가지고 마치 영화 속의 배우처럼 보기 좋게 단정히 싸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 천지에 본보기가 되는 스승을 두고 있으면서도 저는 급한 마음을 왜 고치지 못할까요. 이것은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 왜 아등바등 사느냐고 물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무도 안 보더라도 나를 위해 천천히 단단히 그리고 단정하게 이왕이면 보기 좋게 수건을 싸매는 이 잠깐의 여유조차 갖지 못하면서 어떻게 잘 살았다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흙탕물도 가만히 두면 가라앉아 위에 맑은 물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 잠깐을 기다리지 않으니 언제나 흙탕물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제 일상을 헝클어뜨려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매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별들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지구는 만들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런 만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그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때로는 파괴에 가까운 큰 변화가 우리를 진화하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요함, 단단함을 지녀야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습을 관찰하고 스스로의 변화를 기획할 수 있을 터입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나는 것, 수많은 시작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삶의 주인으로 살려면, 바쁨이라는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여유의 시간을 가져보려는 결심이 어느 해의 그것보다 의미 있다고 스스로에게 대답을 해봅니다. 일상의 습관들이 점點이라면 이것을 오랜 시간 그어보면 인생이라는 선線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심 축에도 못 드는 것들의 대단함을 알아차린 것으로 믿겠습니다.

뱀의 해입니다. 뱀이 영물인 이유는 성장하면서 허물을 한 번 벗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도 자기 허물을 한 번은 꼭 벗을 수 있도록 설계하셨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