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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단점까지 사랑하라 (정숙자 시인)

따뜻함은 종교다. 아니, 종교 이상이며 종교 이전이다. 따뜻함이 없다면 풀씨 하나도 움트지 못할뿐더러 제아무리 뛰어난 유전자일지라도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좌절과 역경, 희망을 돌보는 종교는 어느 사원이나 돌탑이 아닌, 그 사원이나 돌탑을 세우게끔 한 어느 한 사람에게서 출발한다. 꺼지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따뜻함을 유지하던 한 사람, 그가 곧 사원의 첫 번째 주춧돌이자 창틀이며 범종이고 바이블일 것이다.

오늘은 11월 10일, 어느새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도 지나갔다. 인디언 서머란 10월 말이나 11월 초, 겨울이 되기 전 아주 잠깐 여름 날씨와 같은 기온이 이어지는 시기를 말한다. 미국과 캐나다 동부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곧잘 우리의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노년에 접어들기 직전 다시 한 번 청춘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디언 서머가 찾아오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디언 서머란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간직한 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며, 마지막 태양 빛이 비치는 며칠이니 말이다. 그 소중함이야! 그 성스러움이야! 그 감사함이야! 어디에 비길 수 있으랴.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법.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시간이 인디언 서머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할 때, 겨울 속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그 현실은 또 얼마나 쓸쓸하고 어둡고 목메는 여운이랴.

지금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건네주고 싶은 사람이 당신의 눈물 안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당신의 마음 안에 따뜻함으로 연결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가 당신의 지붕 아래 살아 있거나, 당신의 하늘 안에 살아 있거나, 당신의 기억 안에 살아 있거나, 당신의 눈물 안에 살아 있을지라도… 어느 길에선가 그는 분명 따뜻함을 함께 나눈 사람이었기에 지금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건네주고 싶은 것이다. 비록 내세에서밖에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그가 없느니보다는 있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어렵사리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태어나고 이루고 꺾이고 돌아가는 등등 한 사람이 일생 겪어야 하는 상황이 지구 전체에서는 매 순간 일어난다. 다사多事와 다난多難 사이로 끼어드는 온갖 행불행이 자연 순환 불변의 법칙일까.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그 행불행이야말로 우리의 목숨이 소진할 때까지 갚아댈 수밖에 없는 절대 채무이며 임무다. 어찌 고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뜻함이 건네는 마음 한 조각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드립 커피를 내리는 오후, 거실에 들어오는 햇빛이 문득 구슬프고 다정하다. 막 내린 커피를 들고 방문을 열면 으레 “고마워요!”라는 말과 함께 반기던 한 사람이 내 지붕과 하늘과 기억과 눈물을 채워주고 있어서일까. 그의 장점을 단점으로 오해하며 세월을 애면글면한 것은 아닐까. 딸에게 사위에게 아들에게 며느리에게 말해줘야겠다. “단점까지 사랑하라”고. 그리고 다음 다음 세대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라고.

단풍이 흐드러진 가을 어느 날, 정숙자 시인은 두 번째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와 함께 남편의 부고를 전했습니다. 일생의 행불행이 순환한다면 곧 이 시련도 강물처럼 흐르겠지요. 그의 말처럼 따뜻한 커피 한 잔 내려 건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정숙자 시인은 1988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해 2008년 ‘들소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는 <열매보다 강한 잎> <정읍사의 달밤처럼> <사랑을 느낄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진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