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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정숙자 시인)

지구는 가슴뿐인 신체다. 그도 처음엔 수족을 갖춘 몸이었겠지만 헤아릴 수 없는 우주 시간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사이 돌출부나 모난 곳은 다 마모되어 한 덩어리 둥근 가슴만 남았으리라. 풍파에 씻기고 깎여 너나없이 닮은꼴이 되어버린 해변의 몽돌들, 제아무리 개성파였을지라도 결국 엇비슷한 모습의 노인이 되고 마는 우리네 또한 일생이라는 단 한 번의 공전을 향해 쉬지 않고 자전하는 존재다.

나의 공전축도 어느새 기울어 이런저런 생각이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뿐사뿐 ‘생각’ 없이 들뛰어도 좋던 시절의 무릎이야 얼마나 가벼웠던가! 산책로에서 내가 두꺼비를 발견한 건 재작년 봄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할 때,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자니 길섶 비탈진 곳에 들쑥날쑥 만들어놓은 조경석造景石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고 그 틈에 의젓이 앉아 있는 ‘돌 두꺼비’ 한 마리를 조우하게 된 것이다.

몇 년을 두고 걸은 산책로건만 무릎에 고장이 나고서야 알아보다니! 모든 일에는 진정 예정된 때가 있는 걸까? 푸른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에서 무단히 차에 치인 그날 이후 자연自然이 분만한 돌 두꺼비와 나는 절친한 사이가 됐다. 채석장에서 다량으로 쪼개져 나왔을 화강암인데, 또렷한 눈동자와 줄무늬가 어찌 그리 선명한지! 그 친구, 오며 가며 쓰다듬어주는 건 물론이요 가끔은 군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 발치에 틀어박힌 연두색 비닐이 눈에 띄었다. 게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선뜻 꺼내주지 못한 채 서너 달이 흘렀지만… 무의식적인 찰나 맨손으로 그걸 빼내고야 말았다. 염려한 뱀 따위는 나오지 않았고 그저 빈 봉지일 뿐이었다. 나는 늘 휴대하고 다니는 예비 비닐봉지 속에 그 쓰레기를 수습하고는 돌두꺼비에게 물었다. “너, 시원하지?” 룰랄라 다른 쓰레기도 주워 담으며 룰루랄라.

그렇게 돌아오는 길, 별의별 쓰레기가 너무 많은 데 놀랐다. 숫제 내 비닐봉지가 모자라 때마침 굴러다니던 흰색 비닐봉지 하나를 주웠는데 거기에도 금세 꽉 찼다. 그게 바로 지난 7월 11일. 그로부터 생각을 뒤적이다가 산책로 쓰레기를 열흘에 한 번씩 줍기로 해 지금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평일에는 90분 정도 책을 읽으며 걷지만, 그날은 1백80분 이상 쓰레기를 줍는다. 책 읽기를 허락한 산책로에 다소나마 보답이 되었으면 싶다.

담배꽁초, 일회용 컵, 사탕 껍질, 종잇조각, 휴지, 페트병, 캔, 유리병, 면봉…. 턴 지점부터는 쓰레기를 담은 봉투의 무게가 느껴진다(평균 20~30L). 얼마 전엔 쪼그리고 앉아 박살 난 박카스병 쪼가리를 줍고 있는데 “뭘 그렇게 주우세요?” 한 여인이 물었다. “유리 조각이에요. 사람은 신발을 신으니까 괜찮지만 개나 고양이는 맨발이라 다칠까 봐서요. 비 오는 날이면 지렁이도 기어 다니는데 이렇게 줍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서요.”

사용하는 집게가 짧다 보니 꽁초 하나하나에도 몸을 깊숙이 숙이게 된다. 허리가 뻐근하고 뻣뻣해질 즈음이면 점점 밝아지는 가로등 아래… 1백 번, 2백 번, 3백 번 절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를테면 내 남편도 내 아들도 겨우 살아 숨 쉬는 지구의 가슴에 담배꽁초쯤이야 휙휙 버릴 터이니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작은 대속代贖과 위안을 마련해준 산책로 친구 ‘돌 두꺼비’에게도 “고맙구나, 참 고맙구나!”

내 얼굴만 들여다볼 줄 알았지요, 내 모양새만 깨끗하면 될 줄 알았지요. 쓰레기를 주우며 고맙다고 말하는
시인 정숙자 씨의 모습에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코스모스 한 송이도 찬찬히 들여다봐야겠습니다. 발끝에 걸리는 몽돌 하나 주워 곱디 곱다고 칭찬해야겠습니다. 지렁이 한 마리 아프지 않게 쓰레기도 주워야겠습니다. 그리고 고맙고 미안하다며 소리 내어 말해야겠습니다. 1988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해 2008년 ‘들소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는 <열매보다 강한 잎> <정읍사의 달밤처럼> <사랑을 느낄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진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