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02월 천하의 무엇하고도 안 바꾸련다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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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첫 번째 글 다섯 살 때 겨울의 끝자락, 봄바람이 여전히 서늘한 기운을 머금고 살랑거릴 즈음이었다. 동네 형과 누나들이 새 학기를 맞아 모두 학교엘 갔기 때문에, 내가 너덧 명쯤 되는 아이들 ‘왕초’가 되어 신나는 놀이를 주모했다. 우리는 주로 나보다 한 살 아래 재선이네 초막 돼지우리 옆에서 진을 치고 놀았다. 딱지치기도 하고 양지바른 볏짚 울타리에 기대어 햇볕도 쬐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다가 배가 고파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갔다. 한 3분쯤 지났을까. “불이야!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뛰쳐나가 보니 재선이네 돼지우리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돼지우리는 이미 다 타버리고 불길이 막집 본채 지붕으로 번져나갔다. 이 집 저 집에서 부랴부랴 날라온 물동이들 그리고 누군가 잽싸게 지붕으로 올라가 물에 적신 멍석을 덮어 가까스로 진화가 되었다. 남은 문제는 범인을 색출하는 거였다. 이 아이 저 아이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모두 아니라고 잡아뗐다. 그러다 누군가가 얘기했다. “방금 동엽이가 아이들 데리고 노는 것을 봤는데 누구긴 누구겠어, 그놈이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내 행실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그중에는 불을 낼 위인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방화범이라는 혐의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말로는 뒤집을 수 없는, 정황상 알리바이가 아주 확실했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지만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것이 내가 최초로 느낀 분노였다. “화가 치밀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화낼 일을 만들지 마세요. 그게 상책이죠.”
항의는 빗발친다. “지금 저에게 농담하시는 거죠? 화낼 일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다니까요!” “취업 원서를 이미 1백 번도 더 썼다고요. 이 사회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내가 화나지 않게 생겼냐고요.” “한번 짐승 같은 상사 밑에서 일해보세요. 그게 참을 만한지.”
한 고집하는 나는 또 말한다. “화가 나시겠죠. 그래도 상책은 그런 화나는 일을 화낼 ‘꺼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방금 소개한 것은 실제로 내가 쓰는 방법이다. 이는 매뉴얼이 아니라 일종의 지혜다. 그 지혜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이 한마디가 나에게는 모든 감정의 문제를 처리하는 마스터키다. 여기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불행으로 간주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치자. 실직, 실패, 가난, 부부 갈등, 자녀 문제, 이별, 질병 등등. 설령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쳐왔다 해도 나에게는 아직 ‘선택’할 권리가 남아 있다. 그것을 불행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긍정의 문을 열어둘 것인가? 이런 경우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이 일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도록 ‘허락’하지 않노라. 내가 왜 이런 일로 ‘불행’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내 의무가 아니다.” 분노도 화도 마찬가지다. 화의 기미가 마음속에서 미동하려 할 때, 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말해준다.
“나는 저 사람의 저 행동이 나를 화나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노라. 화내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보다 내 행복과 평화가 더 소중하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천하의 무엇하고도 안 바꾸련다.”
지금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이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나쁜 감정을 피하는 최상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면 애초부터 ‘분노’ 또는 ‘화’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
관악산 기슭 달동네 난곡(지금은 ‘난향’)에서 연탄과 쌀 배달을 하던 어린 시절부터 ‘희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차동엽 신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가톨릭대학교·오스트리아 빈 대학교·미국 보스턴 대학교 등에서 수학,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91년 사제로 서품까지 이어진 인생의 행로마다 역시 ‘희망으로 점철된’ 인생,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는 마음가짐을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산 차동엽 신부. 행복의 이정표 같은 밀리언셀러 <무지개 원리>를 통해 대중과 소통해온 차동엽 신부. 그가 앞으로 넉 달 동안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첫 번째 글에서 저는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구절에 밑줄 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