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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폼 잡으면 보이는 시詩 (이영혜 발행인)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도종환의 ‘시래기’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예전에 발견한 시였지만 계절적으로나 시절이 적절해서일까요, 지금에서야 마음으로 가득 다가옵니다. 시인의 관찰력과 시어 詩語는 잠자고 있는 기억을 건드리고 마음에 물을 준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시는 마음이 바쁘면 읽어도 읽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시가 읽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가 마음에 들어오게 하려면, 시를 읽기 전 작은 채비를 하면 더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단언하건대 계기를 만든 것은 제 친구의 처방전이었습니다.

‘…보통의 찻잔과 소서 saucer, 여기에 그저 조금 더 큰 접시 하나만 더 받치면 훨씬 보기 좋은 모양이 됩니다.
같은 색이면 우아하고 조금 다른 색이면 경쾌한 조화가 됩니다….’
그녀는 테이블 세팅이다, 애프터눈 티… 뭐 이런 것을 일러주는 곳을 부지런히 다닌 적이 있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습과 생활은 항상 별개려니 했구요. 그런데 최근 남편 출근과 아이들 등교 소란이 끝난 후 온전히 그녀를 위해서 배운 대로 폼 잡는 시간을 가져보았답니다. 아주 정성스레 차를 우리고, 예쁘게 담아, 가장 햇빛 잘 드는 곳에 가져가 앉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바르고 고운 자태를 만들고 있더랍니다. 천천히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바라다본 이 신선한 충격은 그날부터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이런 작은 대접을 하고 난 뒤부터 사물이 다시 보이고 어려움을 해석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나요. 무엇보다 이 호사스러운 느낌 저편에서 매사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다가오더랍니다. 그녀는 이제 작은 감각들이 마음의 여유를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런 부분들을 더 찾아내어 남편과 가족에게 서비스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녀, 호젓한 시간에 방문한 이웃에게 향이 좋은 차를 준비해 배운 대로 찻잔 받침 두 개를 색깔 고려하여 준비했습니다. 이웃 친구는 “아이, 설거지하기 귀찮게 왜 그래. 내가 손님이야?”라며 성큼 찻잔만 빼 들고는 손사래 치듯 쟁반을 밀치더랍니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그러나 무참하게도 친절한 이웃의 호의에 그저 ‘이를 어쩌나’ 싶더라나요. 이 상황에서 떠오른 것은 ‘네가 네 스스로를 대접하지 않으면 누가 너를 대접하리요’라는 성경 구절이었답니다. 어쩌다 오는 손님에게나 형식을 갖추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하며, 스스로가 각박해지기로 작심하는 이웃의 모습은 바로 얼마 전 자기 모습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정말 절로 웃음이 나는 이야기였습니다. 무참하게도 친절한 이웃은 저를 방문한 적도 있었고, 저는 남에게 또한 무참하고도 친절한 이웃인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웃 흉이 아름다워서도 웃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가끔은 그녀를 따라 해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시 詩가 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폼을 잡아보면 여유가 생깁니다. 차분하게 변합니다. 주의 깊게 합니다. 음미하게 합니다. 멋지게 합니다. 행복하다 느끼게 합니다.

추신 : 도종환 님의 ‘시래기’ 좋지요? 이만큼이면 족하다는 치유가 되면서도, 세상에는 시리도록 고마운 일이 많다는 것에 동의하게 되네요.
이런 좋은 시는 읽기 전에 감동할 준비를 먼저 해야 한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