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09월 행복을 결심하는 행복이 가득한 집 (이영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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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산속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눈이 쌓여 있는데, 새끼 곰 한 마리가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든 듯 둔한 몸으로 커다란 바위 아래서 비척비척 기어 나왔습니다. 시절로 볼 때, 곰은 한창 동면을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왜 깨어난 것일까요? 카메라가 새끼 곰을 좇으니,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눈이 녹은 바위 위에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가 해 질 무렵이 되자 내려와, 다시 바위틈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카메라와 해설자가 그를 관찰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곰은 동물원에서 키우다가 이번 가을에 어미와 함께 지리산에 놓아주었는데, 그만 어미가 죽고 말아 고아가 된 두 살배기 곰이었습니다. 이 새끼 곰이 잠을 자다 나온 바위를 카메라가 비추는데, 찬 바람이 많이 불고 얼음이 바위틈 안으로 얼어 들어가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이 새끼 곰은 동면을 하기에 적절한 자리 찾아내는 데 실패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면의 시기임에도 깊은 잠을 못 이루고 깨어나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같이 놓아주었는데 어미가 살아 있는 두 살배기 다른 곰을 비추었더니, 녀석은 어미와 함께 엉켜서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들의 동면 자리는 바위 아래 적절히 은폐되었고, 바람이 비켜 가고, 짧은 겨울 해에도 충분히 눈이 녹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다음 해에 어미로부터 독립하여 첫 겨울을 맞은 녀석을 다시 촬영했습니다. 녀석이 혼자 찾아낸 터전은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이미 두 해째 어미를 따라 여기저기 드나들며 어디가 겨울잠 자기에 좋은 곳인지를 전수받았기 때문입니다. 녀석은 자란 몸만큼 감각도 건강했습니다.
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데 결코 슬프다고 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곰한테 홀려서 한 시간이 지나갔지만, 두 해를 같은 장소, 같은 표식을 한 곰을 쫓아다닌 제작 촬영기자가 뒤늦게 생각나고 그들의 노고에 대해 눈물이 났습니다. 한 시간을 방영하기 위해 두 해 겨울을 온전히 바친 그들의 대단한 인내심과 관찰력, 한 종류의 동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그 열정에 감탄했습니다. 촬영에 실패할지도 모르는 자연산 모델을 좇아 발밑에 눈이 푹푹 빠지는 한겨울의 지리산 자락을 헤매면서도 초점을 잃지 않은 그들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 어떤 어려운 용어도 사용하지 않고도 곰을 통해서 이렇게 마음을 울게 하다니…. 그들은 온갖 다른 재미난 프로그램 제작자들보다 훨씬 대우받아야 온당하다고, 우리가 정말 그 가치를 알아주어야 마땅하다고, 아무도 못 듣는 줄 알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어 응원했더랬습니다. 또한 일찍 엄마를 잃어 헤매던 그 새끼 곰 때문에 콧등이 시큰해졌고, 어미 곰이 있다는 것이 왜 다른가, 세상 살아가는 지혜는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달된다는 깨달음도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한겨울의 행복조차도 결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잔상들이 다시 ‘내가 세상 살아가는 것이 과연 나의 의지인가?’라는 질문을 만들면서 평상시 모질기 짝이 없는 제가 눈물을 거의 단맛까지 내면서 맛있게 흘렸다니까요.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의식.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표정과 말과 행동거지를 통해서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커온 사람인지를 알아내려는 관찰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의 ‘뿌리’를 보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미 곰으로부터 충실히 세상 사는 법을 배웠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일인 것입니다. 한겨울 자기 누울 자리를 제대로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세상을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내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상대가 내게 끼칠 영향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 없는 탐색을 진지하게 하면 조상들이 물려준 것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이 결핍되었는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라 해도 좋을 성싶습니다. 이 속 깊은 질문을 마주하면, 우리는 누구라도 스스로가 스스로 살기 이전부터 이미 살았다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 이번 호로 창간 스물한 해가 되었습니다. 행복감幸福感은 적어도 좋은 환경이 전염시킨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한겨울 동면을 잘 보낼 만큼 환경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미 곰의 경험과 지혜를 가진 분들을 더 많이 만나겠습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지녀왔던 우리다움, 그리고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것들이 얼마나 우리를 잘 살게 만드는 부드러운 힘인지를 알리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한겨울 곰을 좇아 지리산을 헤맨 다큐멘터리 촬영기자처럼 그렇게 더 찬찬히 기사를 만들겠습니다. 우리말에서 건져 올린 가장 서정적이고 가장 긍정적인 제호를 가진 매체로서 자존을 가지고 더 성숙해지겠습니다. 행복은 혼자 만들기 어렵습니다. 독자와 함께 생각하게 하고, 행복을 결심하는 매체가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의 가장 격조 높은 우리 독자 여러분이 응원해 마지않는 그런 행복한 매체가 되겠습니다. (으 ~, 정말 어렵지만 가득 노력하겠습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 발행인 이영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