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01월 이제 그만, 모욕을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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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도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북구의 다세대주택에서 70대 어머니와 40대의 세 딸이 목숨을 끊었다. 생활고가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유명인 설리 씨와 구하라 씨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생활고가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행복하지 않아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껴서였을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혐오 사회, 모욕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서로 혐오하면서 거친 말로 상처를 주는 개미지옥이다. 자신이 힘들다 보니 남을 혐오하고 모욕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포털 사이트의 댓글난을 보면 여기가 현세 지옥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얼굴을 보고는 차마 하지 못할 말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딱히 미워할 이유가 없는 사람의 죽음에 달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댓글에조차 “화나요”와 악플이 달린다. 불행히도 우리는 IT 강국, 인터넷 강국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기술과 네트워크로 상대방에게 더 큰 모욕을 주는 데 몰두한다. 하드웨어의 속도를 소프트웨어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요리사에게 필요한 칼을 어린아이가 든 형국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 이병헌이 보스에게 묻는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보스는 답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모욕감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까지 파괴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모욕감을 느낀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속담이 있고, “글로 빚은 원한은 만년을 간다”는 베트남 속담도 있다. 지금은 어떤가? 누군가에게 비수를 꽂을 수 있는 말과 글이 지구 반대편까지 닿는 데 1초면 족한 시대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기왕이면 말로 원한을 사지 말고 빚을 갚자. 그게 우리 사회가 훨씬 덜 불행해지는 지름길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서 모욕을 당하고, 부자와 인기 있는 사람은 누린 만큼 모욕을 당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을 모욕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 모욕을 주지 않는 사회, 사실 그런 사회는 요원하다. 그 전에 책임감을 좀 덜 가지는 개인이 되자. 세상에 전교 1등을 하는 아이가 전국 석차가 떨어졌다고 부모님께 미안해서 자살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터뷰하느라 유명인을 많이 만났다.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그들도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행복이라는 말이 사치로 느껴지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에게 모욕감만 덜 줘도 덜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영국에서 뛰는 축구 선수 손흥민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한 14세 소년이 경기장에서 쫓겨났고, 경찰 조사까지 받는다는 소식이 있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사회이기에 취한 조치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욕 발언에 대해 대체로 관대하다. 각종 사회·정치적 이슈로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인 우리 사회도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혐오 사회’ ‘모욕 사회’라는 지적이 뼈아픕니다. 2019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힌 공명지조共命之鳥(자기만 살려고 하면 결국 공멸한다)가 떠오르고요. 새해, 죽비 소리 같은 글을 전한 지승호. 그 이름이 곧 브랜드인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로, 당대의 문제적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펴낸 책만 50권이 넘습니다.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라잉 넛, 그들이 대신 울부짖다>(공저) <유시민을 만나다> <신해철의 쾌변독설>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입니다. 자신의 존재는 뒤편으로 물린 채 전방위적 인터뷰이의 속내와 진정성을 담담히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을 대신 질문합니다.
글 지승호(전문 인터뷰어) | 담당 최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