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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나를 안다는 것

최근에 나를 마주하는 게 어색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인 줄 알았다.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어떤 포럼에 참여한 일이 있다. 어쩌다 보니 뒤풀이 자리에 합석하게 됐는데,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는 일이든 관심사든 취향이든, 나와는 판이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앞에 놓인 물만 자꾸 홀짝였다. “시인이라 과묵하신 모양이에요.” 대각선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게 말을 건넸다. “아, 그런가요?” 우물쭈물하며 답하고 나니, 내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강연을 하러 지방 도시에 내려갔는데, 도착할 때부터 생각지도 못한 과한 환대를 받았다. 나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귀한 걸음을 해줘서 고맙다는 말, 음식은 입에 맞느냐는 물음 등 예의상 건네는 것일지도 모를 그 표현들에 어떤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다행히 강연의 반응도 좋았다. 강연장에 온 사람들은 내가 던진 무심한 농담에도 크게 웃어주었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에도, 슬라이드를 가리키는 나의 손끝에도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보통 강연이 끝나면 기진맥진해지는데, 이날은 세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했는데도 기운이 났다. 연단에서 내려오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포럼에 참여한 것도 나고 강연을 한 것도 난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어제의 나는 왜 시종일관 머뭇거렸을까. 나는 뭐든 과하면 불편해지는 사람인데, 오늘의 나는 왜 혼신의 힘을 다해 말을 했을까. 머뭇거린 것도 나고 열의가 대단한 것도 나다. 어떤 나가 진짜 나일까, 어쩌면 나는 나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며칠 동안 곰곰 생각해보니, 나는 나에게 우호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인 분위기에서 쾌활한 사람이 되는 듯싶었다. 내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자리에서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얼마 전 <나는 이름이 있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시집 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등장한다. 궁리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빠진 사람, 옛날 사람, 응시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등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나는 기록하고자 했다. 스쳐 지나가면서 내 가슴에 빗금을 그은 사람들이었다. 시집이 나오고 독자가 되어 그 시들을 다시 읽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모르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안에 무수한 ‘나’가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내 모습이 진짜인지, 무수한 나 중 어떤 행동을 하는 내가 실제의 나와 가장 가까운지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옛날 사람도 나고 빠진 사람도 나였다. 기다리는 사람이 어느 순간 궁리하는 사람이나 산책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산책하면서 궁리하는 사람일 때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역할을 소화한다. 엄마로서 나와 과장으로서 나는 만날 일이 거의 없지만, 우리는 그 둘을 어렵지 않게 수행한다. 개중에 어떤 나는 평소의 나와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던 나일 가능성도 있다. 역할이 늘어날수록, 처하는 상황이 다양해질수록 자신에게 어색해지는 순간은 더 많아진다. 살아가면서 어떤 나는 점점 지워지고 어떤 나는 점점 드러난다. 희미해지는 나와 생생해지는 내가 둘 다 존재하는 셈이다. 희미해지는 나를 지키기 위해, 생생해지는 나를 보듬어주기 위해, 나를 알고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나이가 더 들고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쯤, 나의 윤곽은 조금 더 선명해지지 않을까. 그러려면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겠다는 마음, 또 다른 나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하다. 찰리 채플린의 말을 곱씹는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나는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던 예전의 나를 떠올리며 빙긋이 웃고 싶다. 나를 알아가는 여정에 열과 성을 더욱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다. 


아이를 처음 놀이터에 데리고 나간 날,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에 왜 그리 속이 상하던지요. 이유를 곰곰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던 언젠가의 나 자신을 아이에게 투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에게 무척 미안해졌습니다. 나를 사랑해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그런 뜻일 겁니다. 나의 여러 모습을 알고 받아들이는 여정에 열과 성, 여유가 필요하다는 시인의 글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작란’ 동인인 오은 시인은 산책을 좋아하고, 어린아이들의 눈과 입에서 많은 자극을 받습니다. 시인은 직업이 아닌 상태라고 생각하는 그는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등을 펴냈습니다.

 

글 오은 | 담당 정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