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10월 산촌살이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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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설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떠난 산촌에 가을빛이 참 곱다. 샛물 흐르는 곳 양지 녘에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집을 짓고 아내와 함께 산촌에 산다. 장닭이 홰를 친 지는 오래되었다. 알싸한 공기가 방 안 가득하다. 고양이 오월이가 문 앞에서 얼른 나오라고 야옹거리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창문을 연다. 안개 낀 앞산이 신비롭다. 빨랫줄에 이슬이 은방울처럼 맺혔다. 여름내 꽃을 피운 무궁화는 오늘도 꽃봉오리를 가득 달고 있다. 으름이 벌어져 곧 떨어질 듯하다. 닭장 문을 열어보니 오골계가 오늘도 달걀 일곱 개를 안긴다. 아내와 텃밭으로 내려간다. 가지, 오이, 토마토, 고추, 애호박을 따고 호박잎도 몇 잎 뜯는다. 오늘 아침 밥상은 애호박된장국에 찐 호박잎이 올라올 모양이다. 밥 솥에 찐 감자와 달걀 두 알도 빠지지 않고 아침 식탁에 오른다. 산촌의 계절은 밥상에서 온다. 울타리에 심은 화살나무에 장닭 부리 같은 홑잎이 돋아나면 뒷산엔 고사리가 아기 손을 쳐들고, 두릅과 음나무도 탐스레 순이 돋는다. 내가 좋아하는 다래순은 올해도 맛보지 못했지만 씨 뿌리지 않아도 텃밭에 무성하게 자라 는 참비름나물이 여름 내내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산촌의 식탁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산촌에 사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산촌살이는 그야말로 풀과의 전쟁이다. 잔디는 한 달에 한두 번 깎으면 되지만, 풀은 뽑고 돌아서면 바로 자라는 듯하다. 옆집 박 씨 아저씨 말씀. “풀이 자라야 곡식도 자라는 거여.” 그것도 모르고 산촌살이를 하다니…. 저만 살겠다고 홀로 자라는 풀은 쉽게 뽑힌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풀은 잘 뽑 히지 않는다. 이웃이 일제히 힘을 모아 저항한다. 풀만도 못한 게 풀을 뽑는다고 풀들이 웅성거린다. 남들은 산림청장 출신인 내가 나무와 꽃을 잘 가꾸는 줄로 알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내가 사는 녹우정綠 友亭 나무와 풀의 생사여탈권은 아내가 쥐고 있다.
아내가 붓꽃을 베라면 오늘이 붓꽃 제삿날이고, 그냥 놔두라니 범부채는 생명이 연장된다. 하루 일이 끝나면 검사를 받는다. “어이구! 작약을 베랬더니 모란까지 싹둑 잘랐네요. 붓꽃만 베야지 범부채는 왜 잘랐어요? 이런! 삼지구엽초, 층층이꽃, 벌개미취에 바람꽃까지 몽땅 잘랐군요.” 낫질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산림 공무원 생활 수십 년에 산림 청장까지 한 경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지만 아내의 꾸중을 들으면서도 행복한 이유는 뭘까? 올여름 무더위와 가뭄을 이겨내고 참깨와 고추 농사가 잘되었다. 가뭄에 여린 순을 꽂아놓곤 이젠 네가 알아서 커야 한다고 방치해놓은 고구마밭엔 곱고 예쁜 고구마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고구마를 캐며 제대로 뒷받침해주지도 못했는데 반듯하게 잘 자란 아들 생각이 난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가을걷이가 끝났으니 비닐을 걷어야 한다. 풀이 나지 말라고 깔아놓은 부직포를 잘 보관해둬야 한다. 수확이 끝난 빈 밭에 비닐 조각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행여 내 모습도 저러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빈 밭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참깨 대궁을 짧게 베라는 아내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길게 잘라두었다. 산촌에 눈 오는 날 모닥불 피워놓고 참깨 대궁을 태우는 그 맛을 그대는 아시는가? 그대 오시면 참깨 대궁 모닥불에 태워 환히 밝혀주리라. 별들 이 내려와 앉는 이 산촌 깊은 밤에.
가을걷이를 끝낸 산촌의 가을 밥상이 궁금하고, 눈 오는 날 참깨 대궁 태우는 타닥타닥 소리, 그 매캐하고 고소한 냄새가 문득 그립습니다. 오랜 공직 생활을 마친 조연환 전 산림청장은 텃밭 농사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미리 마련해둔 충남 금산 녹우정으로 귀촌해 13년째 자연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그리고 한 그루 나무이고 싶어라>, 에세이집 <산림청장의 귀촌일기> 등이 있습니다.
글 조연환 | 담당 정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