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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9월 우리 사귀어요

“이봐요, 칠팔월 겨우 3개월 피는 감자꽃도 삼재환란을 다 당하건만, 하물며….” 
이게 무슨 말인지 잠깐 멍했습니다. 
그렇지요, 감자꽃 피어 있을 몇 개월 사이에도 엄청난 비와 
지나치게 뜨거운 햇빛과 때론 심한 가뭄을 다 견뎌야 하네요. 
그래요, 하물며… 이 단어가 가슴을 메우는군요. 하물며 우리에게 별의별 일들이 왜 안 생기겠어요. 
날씨마저 덥디더워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던 불만이 툭 던져진 듯한 이런 말에 바람을 쑤욱 빼게 되네요. 
이렇게 비유를 잘 갖다 대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잘 살아내는 방법을 찾아내는 삶의 기술자입니다. 
아니 삼재환란 몇 번 굽이치는 인생을 잘 사귀는 사람입니다. 


‘사귀다’라는 단어는 ‘삭히다’에서 온 것 아닐까요? 
그냥 두어서 시간이 오래가면 썩게 되는데, 같은 내용물에 설탕이나 당분이 들어가면 삭힐 수 있습니다. 
잘 삭히면, 더 맛나게 익거나 또 다른 내용물로 재창조되지요. 
그래서 가끔 흥분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마음을 삭이라고 얘기해주는 것도 실은 발효시키라는 뜻이 아닐까요? 


똑같은 시간을 들여 썩히는 쪽은 불행을 택하는 것이고, 
똑같은 시간을 들여 삭히는 사람은 행복을 택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네요. 
흐음, 그럴듯해지는데요? 
그러니까 같은 일을 당하고도 거기에 당분을 살짝 만들어 넣을 줄 아는, 시간과 잘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지요. 
신이 가장 묘하게 설계해놓은 마지막 선물이 행복이랍니다. 
누구에게도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어서 
부자거나 빈자를 가려서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행복한 쪽으로 전화위복을 시키는 기술자의 몫이 되도록 했답니다. 


<행복이가득한집>에는 이런 삶의 기술자들이 매월 소개됩니다. 
좋은 집이나 맛나게 차린 요리나 물건을 보는 것도 눈으로 먹고 살아보는 남다른 기쁨이지만, 
더 큰 배움은 이런 분들이 터득한 기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알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매달 남 잘 사는 걸 보면서 저를 읽고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먹음 직하게 요리하고, 한 끼를 먹더라도 촛불을 켜보고, 
나뭇잎을 깔기도 하고, 가장 예쁜 접시에 보기 좋게 담는 스타일을 지닌 사람들인데, 
그건 타고난 재능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별것 아닌 것에 당분 대체재를 넣어, 별것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 
일상 중에 작은 예식이랄까, 세리머니를 찾아내어 주어진 상황에 감동할 준비를 하더란 말입니다. 
제가 표현해보면 자기에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들입니다. 
예의를 차리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법! 
이 시간만큼 삭히는, 그래서 인생과 잠깐이라도 행복하게 조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느새 29년 동안 매월 발행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기꺼이 지면을 채우게 허락해준 많은 분은 이 사회의 행복 메이커, 당분입니다. 
또 그들과 사귀어보려고 매월 지면을 넘기시는 독자분들은 우리나라의 최고 지성, 행복 지킴이십니다. 


<행복이가득한집> 발행인 이영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