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파일이 뭐예요?”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늦둥이 딸애 학부모 ‘단톡방’에 질문이 날아들었다. 새 학년 준비물 목록에 올랐나 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답글을 올렸다. “A4 크기의 서류를 정리할 수 있는 파일함. 문구점 가서 A4 클리어 파일 달라고 하면 됩니다.” 사진도 찍어 올렸더니 단톡방에서 스타가 됐다. “역시 둘째 맘이 최고!”라며 엄지까지 올려준다. 늙은 엄마라 기 못 폈던 어깨가 돌연 으쓱했다. 젊음이 최상의 가치로 받들어지는 요즘 시대에도 나이 듦과 경험이 쓸모 있구나 싶어서.
‘전업맘’ ‘직장맘’ 할 것 없이 아이 키우다 보면 몇 차례 위기가 찾아온다. 첫위기는 갓난아기 시절 육아와 사투를 벌일 때고, 두 번째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다. 엄마의 손길이 유난히 필요한 시기라 직장 그만두는 여자들이 부쩍 느는 때이기도 하다. 사표를 낼까 망설이는 후배들이 SOS를 치는 때도 이 시기다.그때마다 귀띔한다. 1학년 또래 엄마만 만나지 말고 2학년, 혹은 3학년 아이 키우는 선배 엄마들을 사귀라고. 한두 해 먼저 시행착오를 경험한 엄마가 전해주는 지혜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보석’이다.
꼭 육아 때문만도 아니다. 나이 든 사람을 친구로, 혹은 멘토로 삼는 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내게도 그런 ‘친구’들이 몇 있다. 정신과 의사인 김 스코글룬드 박사가 그중 한 사람이다. 스웨덴에서 1년간 연수할 때 생판 모르는 북구의 도시 스톡홀름에서 아이 둘 데리고 살아야 했던 시절의 내 멘토이자 보호자였다.여든을 바라보는 그를 무례하게도 ‘친구’라 부르는 건, 김 박사 또한 30 년 연하인 나를 친구처럼 동등하게 대해줬기 때문이다. 글이나 좀 쓸까, 매사 덜렁대고 살림엔 젬병인 내게 박사는 김치 담그고 불고기 재우는법, 스웨덴식 처세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스톡홀름 시청이 건너다보이는 멜라렌 호숫가를 산책하며 한국과 스웨덴의 복지와 교육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나눈 대화를 잊을 수 없다. ‘70대 노인의 생각이 어쩌면 이렇게 젊지?’ 하는 의문도 여러번 들었다. 노인 특유의 확신과 고집이 그에겐 없었다. 스웨덴을 떠난 5년이 넘었지만 요즘도 우리는 카톡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는 요즘 <태양의 후예> 송중기와 열애 중이란다.
수필가 김을란 선생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친구다. 우리 신문사 글쓰기 강의 때 강사와 제자로 만나 3년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며느리뻘인 나를 ‘글 선생’으로 깍듯이 존대하는 그는 수필가답게 하루의 단상을짧게 적어 보낸다. 은퇴한 후 집수리에만 매달 리는 남편을 흉보기도 하고, 손재주 좋은 손자가 그린 ‘어린 왕자’ 그림을 카톡으로 전송한다. 새벽 기도 다녀오는 길에 만난 이웃의 사연도 들려주고, 신문에 난 내 글을 읽은 품평도 배달한다. 그 짧은 글들엔 삶의 연륜과 지혜가 묻어난다. 큰애가 ‘중2병’ 걸렸을 때 그가 보낸 글은 적잖은 위안이 됐다. “드디어 ‘중딩’ 아들에게 소리 지르기 시작했군요. 저는 때리기도 했어요. 새 옷사주면 친구들한테 벗어주고 오고, 집에 안 와 학원에 찾아갔더니 등록한 사실 없다고 해서 기함한 적 여러 번이죠. 녀석이 하도 느긋해서 ‘넌 대체 인생의 목표가 뭐니?’ 물었더니 ‘재미있게 사는 거’래서 두 손 들었잖아요. 아들은 그러려니 하세요. 중학교 때 조용하면 대학 가서 사고쳐요. 그저 엄마 보면 웃게만 해주세요.자식은 원래 그런 거예요.”
얼마 전 영화 <캐롤>을 보다 나이 든 내 친구들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나이 많고 카리스마 넘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케이트 블란쳇 같은 여인이 있다면 나 또한 사랑에 빠질까? 요즘은 일본 그림책 작가이자에세이스트인 사노 요코와 연애 중이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인생에 대한 유쾌하고 신랄한 통찰이 담긴 그녀의 병상病床 명문들에 울고 웃는다. 특히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 “이 나이가 되니 마음이 화사해지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아, 이제 남자 따윈 딱 질색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 자동차를 사버렸다는 여자! 멋지게 나이 드는 친구 하나, 사귀고 볼 일이다.
인공지능이 바둑 아니라 그 무얼 사람보다 더 잘하는 세상이 와도 여전히 변치 않는 것들이 있을 겁니다. 갓난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잠을 깰 테고, 사춘기 ‘중2병’은 완치되지 않겠죠. 김윤덕 기자는 현실이건, 가상의 인물이건 상관없이 멋지게 나이 든 친구 하나쯤 사귀어보길 권합니다. “원래 그런 거예요”라고 말해줄 그런친구 말이지요. 김윤덕 기자는 월간 <샘터>와 경향신문을 거쳐 조선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자로서의 화려한 이력보다 유쾌하고 정감 있는 글솜씨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우리는 모두 사랑을 모르는 남자와 산다> <유모차 밀고 유럽 여행> 등의 책을 썼습니다.